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3-5 대승정종분

상원통사 2017. 11. 15. 23:31

(~~ 제3-4강에서 계속)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각각이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의 생활에도 적용이 되고, 옛 가르침에도 맞고, 다른 학문의 표현과 비교했을 때도 수긍이 갈 수 있는 그런 쪽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상(我相) : ‘나다’는 생각, 오온으로 나를 삼는다

아상이란 ‘나다’ 하는 생각을 말하며, 이때의 나는 ‘오온’을 말합니다.

오온으로 나를 삼는다는 것은 이 몸뚱이와 마음을 가지고 나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몸뚱이가 색이고, 마음(생각, 정신)은 수·상·행·식이 됩니다.

오온의 합성으로, 오온이 쌓여있는 이것으로 나를 삼는다, 이걸 아상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몸뚱이로 나를 삼아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면 아상에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아상을 기초로 해서, 이건 내 것이다, 내 옷이다, 내 연필, 내 방, 내 집 이런 것들도 다 아상에 속합니다

 

아소(我所)     : ‘내 것이다’는 생각

아집(我執)     : ‘나의 견해가 옳다’는 생각

아, 아소, 아집  : 아상(我相)

근본불교에서는 내 몸뚱이를 가지고 ‘나’라고 하는 집착을 ‘아’라 하고,

이걸 기초로 해서 ‘내 것이다’ 하는 것을 ‘아소’라 합니다.

또 자신이 일으킨 견해, 이러면 좋겠다 저러면 좋겠다는 견해를 자기로 삼아서 고집하는 것을 ‘아집’이라 합니다.

나다, 나의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옳다, 이 세 가지를 아, 아소, 아집이라 말합니다.

 

이것들은 '아'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 세 가지를 다 통 털어서 아상이라 합니다.

 

아상을 갖게 되면 부부지간에도 싸우게 됩니다.

이건 나고 이건 너다, 이건 내 것이고 저건 네 것이다, 내 의견이 옳고 너는 틀렸다,

이렇게 부부간에 싸우는 것을 보면 다 아상이 그 원인입니다.

옛날 사람과 비교해보면 요즘 사람의 아상이 더 강합니다

그러니 이혼률도 더 높고 부모자식 간에도 더 화해가 안 되는 겁니다.

 

더 심해지면, 나다 하는 것도 몸과 마음 안에서 나다 하는 것을 따로 만들어가지고,

몸뚱이나 말하는 거나 행동을 내려다보면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못마땅하다는 말은 못마땅하게 여기는 나가 따로 있고 못마땅한 나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분열이라 합니다.

자기분열현상이 일어나면 남이 아니라 자기를 두고 또 괴로워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다 ‘아상’이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나입니다.

네가 정말 누구냐?                                                    법륜입니다

그건 네 이름이지 너가 아니지 않느냐?                              그게 왜 내가 아닙니까?

네 이름 바꾸면 네가 변하느냐, 그대로 있느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 그건 다만 네 이름이지 어떻게 너냐?                         아, 그게 내 이름이구나

그럼 너는 누구냐?                                                    이 몸뚱이입니다

(몸뚱이라는 것은 6개월만 지나면 부속품이 100% 다 바뀌어버립니다)

6개월 후에 네 몸뚱이가 변했으면 네가 아니지 않느냐?              ......

지금 숨 딱 떨어지면 시신인데 네가 시신이냐?                   아닙니다

그럼 너는 누구냐?                                                    생각입니다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데 어느 생각이 너냐?                    ......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나라고 하기는 하지만 뭘 갖고 나라고 하는 지 잘 모릅니다.

잘 살펴보면 나라고 할 게 없습니다.

나다 하는 것은 한 생각이 어리석게 일어나서 그걸 갖고 모양을 짓고 집착해 있는 겁니다.

아(我)라는 모양을 짓고 있는 것이지 아(我)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인상(人相) : ‘사람이다’는 생각

‘인상’이다 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사람이다’ 하는 상은 나와 너로 구분하여 무리 짓는 생각, 무리 지어서 나다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어제 저녁엔 아상에 사로잡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남편과 싸웠지만,

오늘 이웃집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갈 때는 나하고 남편이 한패가 됩니다.

나와 남편사이에는 재산상의 구분도 견해의 차이도 없고, 몸뚱이만 둘이지 마음은 하나의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라고 하는 어떤 그룹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게 ‘인상’입니다.

이렇게 그룹짓는 마음 중 가장 작은 단위가 가족입니다.

그 다음은 일가친척, 전라도 경상도 하는 지역, 동문, 사회, 나라 등이 될 것입니다.

 

나다 너다 할 때는 나 아닌 너는 죽든지 살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부부가 싸울 때 자기에게 사로잡히면 상대편은 죽어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가족에 사로잡히면 내 자식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은 관심이 있지만 남의 자식은 못이 박혀도 관심이 없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이렇게 패를 가를 때는 누가 직장에서 잘리기만 해도 지역차별했다고 난리가 납니다.

이렇게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바깥은 빼버립니다.

인상 중에 가장 작은 것이 가족이고, 점점 커져서 지역, 남한, 우리 민족 이렇게 됩니다.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세운다고 하면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왜 거기까지 가서 도와줍니까?

한글도 안 가르치고 인도어를 가르치려면 뭣 때문에 학교를 짓습니까?

불자가 낸 돈을 갖고 절을 지어야지 왜 학교를 짓습니까?

이런 게 다 인상입니다. 우리 것이다 이겁니다.

 

제가 어떤 토론회에 나가서 북한의 실정을 이야기 하고 도와줘야 된다고 했더니,

어떤 고위 공직자 한 분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결식아동이 몇 명인지 아느냐, 그들을 위해서 당신은 뭘 했느냐, 그것도 안하면서 왜 북한을 돕느냐?’

질문 자체만 보면 충분히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굶어죽는 사람에 비하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못산다 하는 것은 저기서 굶어죽는 사람과 비교하면 100배도 더 잘 사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애들이 굶주린다 하면 여러분도 관심을 갖고 정부도 관심을 갖고 돌보지만,

잘 보이지 않는 북한같은 곳에서 죽어가는 애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역할분담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사람고기를 먹으면 안 되지만, 다른 짐승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다른 동물을 먹고 쓰고 하도록 권리가 주어져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런 것도 인상입니다.

자기 개인을 넘어서서 그룹을 짓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지어서 그 밖과 안을 구분 짓는 것을 인상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무엇인가 선을 그어가지고 모양을 짓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 피부 색깔로 구분하고, 양반 상놈으로 나누고, 가문으로 구분합니다.

남의 나라를 침범해 영토를 넓히면 우리 민족이 볼 때는 굉장한 영웅이지만 다른 민족이 볼 때는 원수입니다.

이처럼 인상은 그 그룹 안에서는 이익이지만 그 그룹 밖에서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성인이다 인류의 스승이다 하는 사람은 민족을 뛰어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민족은 그 성인을 받아들이지만, 제 민족 안에서는 환영을 못 받습니다

제 민족의 이해만 생각해야 되는데 그 바깥까지 생각하니까, 이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환영을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유태인만 세상에서 제일 낫고 하느님의 선택받았다, 그러니까 유태교는 발전하지 못하고 그냥 있습니다

힌두교나 민족주의 종교는 그 나라 안에서는 꽉 잡는데 그 나라 밖으로는 못나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나 불교 같은 것은 그 나라의 한계를 벗어나니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애국자라 받드는 사람일지라도 그 집안에서는 부모 속 썩이는 사람, 가문의 적이 되기도 합니다.

정의를 위해 민주화 투쟁을 한 사람도 부모 입장에서는 인종 말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남북이 통일하려면 북한 사람의 심정도 이해하고 그 이익도 대변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북한의 입장과 심정을 함께 껴안는다는 생각만 해도 남한에서는 맞아죽을 죄가 됩니다.

 

우리가 훌륭한 지도자다 하지만 보통은 다 그 울타리 안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류의 성인도 사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각할 때 성인인 것입니다.

사람의 울타리 밖에까지 생각하고, 다른 생명까지 생각하면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살인하지 마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살생하지 마라’고 되어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도둑질하지 마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주지 않은 남의 물건을 갖지 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상을 넘어서면 많은 생명들을 같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나만 생각하지만 나 혼자 이 세상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이 사회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가 입는 이 옷도, 내가 끼는 안경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은혜를 생각할 줄 알 때 아상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 생성되는 데에는 수도 없이 많은 다른 생명들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이 있어야 동물이 있고, 작은 세균과 지렁이와 온갖 것들의 생명 작용 위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만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사람 밖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이 사람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을 싹 그어서 요 안의 것만 중요하고 밖의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인상이 무너져야 됩니다.

모든 생명들을 한울타리로 봐야 됩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다 인상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가정의 불화는 아상 때문에 생긴 것이고,

사회적인 제반 갈등은 패를 지어서 서로 이익을 쟁취하는 인상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제3-6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