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4-1 묘행무주분

상원통사 2017. 11. 17. 22:06

오늘은 금강경 네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집착하지 않는 미묘한 행

제4분 묘행무주분, 묘행이란 미묘한 행위, 무주는 머무름이 없다(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아니하는 미묘한 행, 머문 바 없는 미묘한 행이 제4분의 제목입니다.

 

부차 수보리(復次 須菩堤)                 : 다시 다음에 수보리야

보살 어법(菩薩 於法)                        : 보살이 저 법에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      : 마땅히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보살이 보시를 할 때에는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라,

여기서 법은 경계를 말하므로, 경계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부딪히고 머리로 알음알이를 하는데,

그런 대상을 여기서는 법이라 말합니다.

 

소위 부주색보시(所謂 不住色 布施)          : 색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며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 聲香味觸法 布施)  : 소리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하며 향기, 맛, 감촉, 법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라

색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 모양과 빛깔을 말하는 것이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 모양과 색깔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마찬가지로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라 이런 얘기입니다.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하고, 법을 다시 여섯 가지로 나누는데,

설명을 할 때는 하나(색)를 먼저 떼어서 하고, 나머지(성·향·미·촉·법)는 같이 붙여서 합니다.

소위 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지 말라,

또한 귀에 들리는 소리에,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혀끝에 스치는 맛에,

손끝에 스치는 감촉에, 뜻에 스치는 알음알이에 집착해서 보시를 행하지 마라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須菩堤, 菩薩 應如是布施) :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를 하되

부주어상(不住相)                                : 상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보시를 한다는 것은 법(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상에 집착하지 아니 하는 것이다.

 

하이고(何以故)                               : 어찌한 까닭이냐,

약보살 부주상보시(若菩薩 不住相布施)       : 만약에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하면

기복덕 불가사량(其福德 不可思量)           : 그 지은 복덕이 한량이 없느니라

‘불가사량’이란 그 양의 크기를 우리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한량없다는 뜻이므로,

만약에 보살이 상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지은 공덕이 한량이 없다라 말하고,

그 다음에 예를 들어서 다시 보충설명을 합니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방허공 가사량부(東方虛空 可思量不)  : 동쪽에 있는 허공을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느냐

불야 세존(佛也 世尊)                    :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가사량부’에서 끝에 不자가 붙으면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사이,

상하허공 가사량부(上下虛空 可思量不)        : 상하 허공을 다 헤아릴 수 있느냐 없느냐

불야 세존(佛也 世尊)                          :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그 사이, 그리고 위와 아래 허공을 네가 다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느냐,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역부여시 불가사량(亦復如是 不可思量)                    :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느니라

동·서·남·북, 사유(그 사이), 상·하(위·아래), 이것은 십방 즉 온 세상을 말합니다.

이 우주의 온 허공을 네가 다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느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허공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이 행한 무주상보시의 공덕도 얼마큼 큰지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 이 말입니다.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須菩堤, 菩薩 但應如所敎住) :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무느니라

여기서 왜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무느니라라고 종결이 지어졌느냐,

제2 선현계청분에서 수보리는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리이까’

즉,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니,

부처님은 먼저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마음을 이렇게 다스려야 하느니라 하고 그 다스린 상태를 이와 같이 가져야 하느니라,

지금 설명한 바와 같이 행하되 집착함이 없이 행하라,

보시를 하지 마라가 아니라 보시를 행하되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이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무주상보시입니다,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게 되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 이겁니다.

 

유루복(有漏福) : 상에 집착해서 행하는 보시

무루복(無漏福) : 상에 집착함이 없이 행하는 보시

상에 집착을 해서 행하는 보시를 유루복이라 합니다.

상에 집착하면 그 복덕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그것은 새어나가 사라져버립니다.

반면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행하는 행을 무위행, 함이 없는 행이라 하고

거기에 지어진 복덕을 무루복, 새지 않는 복이라 합니다.

 

유위(有爲)의 행 : 상에 집착해서 행하는 것, 찌꺼기가 남는 행

무위법(無爲法)  :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행

어떤 상에 집착해서 행을 하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

그래서 그 행위 뒤에 뭔가 찌꺼기가 남는 것을 유위의 행, 또는 유위법이라 합니다.

나무판자에다가 못으로 금을 긋게 되면 흔적이 남지만,

허공에다가 지팡이로 선을 긋게 되면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을 무위의 행, 또는 무위법이라 합니다.

 

행한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고,

행한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인과의 법칙, 인과의 사슬마저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유위의 행(유위법)에 의해서 지어진 공덕을 유루복이라고 합니다.

유루복은 인연에 의해서 지어졌으니 그 인연이 멸하게 되면 그 공덕은 사라지게 됩니다.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선행을 하면 선업을 짓게 되어 천상으로 나아가게 되고,

악덕을 하면 악업을 짓게 되고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갚음을 다 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게 되고,

천상에 간다해도 영원히 있는 게 아니라 그 복을 다 까먹게 되면 도로 내려오게 됩니다.

육도윤회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천상에 보내고 누가 지옥에 보내느냐, 아무도 보내는 이가 없습니다.

마치 물보다 가벼운 기름은 물위로 뜨고, 무거운 돌맹이는 가라앉는 것처럼

그 지은 업에 의해서 선업은 위로 악업은 아래로 이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이 유위의 행에 의해서 지어진 유루복이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반면에 무위의 행이라는 것은 어떤 행은 있었지만 그 행의 과보(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전혀 없고,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이 행하기에

그 결과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 없으면 지어진 복도 없어지지 않나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살은 그 복을 탐착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 복은 다 중생에게로 회향이 됩니다.

이러한 무루의 복(무위의 행)은 그 공덕이 한량이 없고, 지어진 복은 소멸되지 아니합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미워하거나, 자식에 대해 실망을 한다는 것은 뭔가 기대를 하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뭔가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행하는 행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유위의 행에 속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이 행하면 섭섭한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바라는 마음, 뭔가 얻으려는 마음이 모든 괴로움의 근본입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바로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게 됩니다.

얻으려는 게 없으니 빌 일이 없고, 빌 일이 없으니 천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우리는 보통 결혼할 때에도 뭔가 바라는 마음을 갖고 결혼하게 됩니다.

돈을 잘 번다든지, 지위가 높아진다든지 이런 저런 기대를 갖고 하는데 막상 살아보면 내가 바라는 만큼 안 됩니다.

그러면 속았다 싶고, 실망을 하게 되고,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 원망으로 바뀌게 되고, 원망이 지나치면 증오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한다는 것은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지옥과 다름이 없습니다.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거기 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나의 기쁨과 슬픔이 오고가고, 그가 하는 한 마디에 내 애간장이 녹아납니다.

마치 내 목에 밧줄을 매서 그에게 주고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부부간에 자식에게 친구에게 바라고 절에 와서도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자기 목에 밧줄을 걸어 제일 굵은 것은 남편에게 그 다음은 부모에게, 그 다음은 자식에게 주고,

자질구레한 밧줄은 스님에게 하나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면 그 밧줄을 쥔 사람이 잡아당기는 대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마치 소가 코뚜레 하고 멍에에 걸려가지고 사람이 잡아당기는 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고통과 똑같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마치 굴렁쇠가 어린아이들이 굴리는 대로 굴러가듯이 이렇게 굴러 가고 있습니다.

주인이 개에게 목줄을 하고 산책을 나가면 개는 주인 앞뒤로 옆으로 자기 맘대로 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주인따라 왔다갔다하며 산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개인적으로는 자유롭게 산 것 같지만 결과를 두고 보면 다 세상의 군림을 당했습니다.

태어날 때도 왜 태어난 줄 모르고 태어나고, 먹고 입는 것도 그저 세상 따라 습득했고,

학교가고 시집가고 애기 낳는 것도 남이 할 때 안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인생을 거스르거나 초연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홍수에 휩쓸려 가는 나무토막과 같이 살아가는 게 우리들의 삶입니다.

 

 

(제4-2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