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5. 금강경

[법륜스님의 '금강경'] 제5-1 여리실견분

상원통사 2017. 11. 22. 22:49

금강경 다섯 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있는 대로 이치대로 실다이(있는 그대로) 본다

 

 

 

수보리 어의운하(須菩堤 於意云何)            :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신상 견여래부(可以身相 見如來不)      : 몸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불야 세존(不也 世尊)                          :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이신상 득견여래(不可以身相 得見如來)   : 몸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하이고 여래소설신상(何以故 如來所說身相)   : 왜냐햐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 형상은

즉비신상(卽非身相)                           : 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고 수보리(佛告 須菩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여래를 보리라   

 

 

선에서는 금강경의 요지가 제1분에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문자로 이루어진 가르침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그 요지가 제3분에 있다 이렇게 말했지요.

제3분, 제4분은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제3분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 항복받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제4분에서는 마음을 가지는 법, 머무르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두 군데에서 답하신 것을 정리해서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제5분 여리실견분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의 가장 핵심된 요점이 바로 이 5분에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지요.

 

사구게(四句偈) :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그것을 한 싯구로 표현한 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에 자주 나오는 사구게입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은 질문은,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즉 수보리에게 지금 네 앞에 서있는 32가지 거룩한 상호를 갖고 있는 이 육신이 여래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보리가 그때야 알아차리고, 아니옵니다 몸의 모양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4분에서는, 함이 없는 행을 행하라, 즉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아무런 바람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즉 보살은 그 어떤 형상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바람이 있어도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수보리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슨 인연으로 저런 거룩한 몸매를 받았느냐,

아무런 과보를 받을 바도 없고 행한 바도 없다면 저 거룩한 몸매는 무슨 인연으로 받았느냐?

부처님은 수보리의 의심을 금방 알아채시고, ‘네가 바라보고 있는 이 몸이 부처냐’ 이렇게 물으시자,

수보리가 깜짝 놀라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은 육신이 부처님입니까? 아니지요, 깨달음의 지혜가 붓다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아난다 존자가 슬퍼서 울며 묻습니다.

아난다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처님 :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지금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이렇게 말하신겁니다.

 

똑같은 몸뚱이인데, 한 생각 사로잡혀서 깨닫지 못할 때에는 중생이라고 부르고,

한 생각 내려놓고 깨닫게 되면 보살이다, 부처다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원효대사가 똑같은 몸으로 똑같은 바랑을 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잤는데,

전날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감로수라 느끼고 있는 그때까지는 그냥 중생이었지요.

다음날 아침 그 해골바가지를 보고 구역질을 하면서 일체가 다 마음 가운데 있구나,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똑같은 물인데 그 전날은 깨끗하고 오늘은 더럽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물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거다, 이걸 깨달은 것입니다.

법은 본래 공한데 한 생각 일으켜서 더럽다하고, 한 생각 일으켜서 깨끗하다하며 내가 거기에 매여 사는구나,

그래서 한 마음 일어나니 만법이 생겨나고 한 마음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진다 이렇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물만이 아니라 원효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육신을 갖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물건을 쓰는 똑같은 사람인데,

깨닫기 전에는 중생이라 하더니 깨닫고 나서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깨끗하고 더러운 게 물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래가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룩하신 32상 80종호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보리도 그런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보살은 한량없는 복을 짓고 그 과보로 거룩한 몸매를 받아서 붓다를 이루는데,

아무런 지은 바도 없고 받을 과보도 없다면 저 거룩한 몸매는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는가 이런 의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이 거룩한 몸매가 붓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바로 이 몸뚱아리가 부처냐 이렇게 물으시니,

수보리가 화들짝 놀랍니다, 내가 또 상에 집착을 했구나, 또 내가 망상을 피웠구나,

그래서 금방 아닙니다, 몸의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정리를 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니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여기서 허망이라는 뜻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허망(虛妄)하다는 말은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어떤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깨비 같고 그것은 꿈같고 그것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가 허망입니다.

허망이란 인생이 허무하다 할 때 뭔가 낙담이 서려있는 그런 허무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주관이 아니고 객관적인 하나의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소승불교(근본불교)에서는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다’라고 표현합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여기서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어떤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꿈같은 거다, 있는 것 같은데 깨보니 사실은 없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허망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허망한 것은 집착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허망한데도 허망한 줄 모르고 집착하게 되면 나중에 실망하게 되고 낙담하게 됩니다.

그래서 허무한 감정이 드는 겁니다.

왜 허망한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허무하게 느껴지느냐,

뭔가 잡을 것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때 허무하게 느낍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허무하게 느끼는 겁니다.

잡을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이 허망인데, 그것에 대해 우리들의 마음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인생이 자유로워지는 사람도 있지만,

잡을 것이 없는 줄 알았을 때 허무하게 느끼는 사람(잡을 것이 있어야 된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는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마치 허깨비나 물거품 같아서, 있는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없고 영원한 줄 알았더니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런 것입니다.

허망하기 때문에 허무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망념을 갖고 있을 때 잡을 것이 없어지면 허무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모양(相) : 물질의 색깔과 모양, 고정관념

상이 있는 것, 모양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합니다.

모양 지어졌다는 것은, 어떤 물질의 색깔과 모양, 또 우리들의 어떤 고정관념(선하다, 악하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을 말합니다.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은 깨끗하다, 더럽다, 악하다, 선하다, 옳다, 그르다 할 것도 없다 이런 뜻입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제법(諸法), 제상(諸相)

개시허망(皆是虛妄) : 공(空)

범소유상,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제법’ 또는 ‘제상’이라 말합니다.

개시허망, ‘모두 허망하다’ 이 말을 반야심경에서는 ‘공’하다고 말합니다.

즉 ‘제법은 모두 공하다’, ‘제법개공’ 또는 ‘제상개공’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아직 ‘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허망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범소유상이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모든 함이 있는 법’과도 같은 말입니다.

 

‘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린 고정관념입니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는 것도 상이고,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다는 것도 상이고,

선악도 상이고 신성하다 부정하다 하는 것도 상이다,

이렇게 모든 모양 지어진 것,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다 공하다,

모양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텅 비어있는 것처럼,

깨끗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끗하다 할 것이 없고,

더럽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럽다 할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에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으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곧 여래를 보리라

모든 상(諸相)은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非相),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모든 상에는 상의 실체가 없다 ,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이 상인데 선이라고 악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다,

이것을 비상, 상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비상, 상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이 말입니다.

 

비상을 뒤에 가서는 무상(無相) 또는 공(空)이라 표현합니다.

제상이 비상인줄 알면, 모든 형상 지어진 것에는 형상의 실체가 없는 줄을 알게 되면,

즉견여래, 곧 부처를 본다,

부처를 본다는 것은 법의 실상을 본다, 깨달았다, 내가 곧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선이다 악이다, 옳다 그르다고 알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진실상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이 꿈을 현실로 착각하여 가짜 상을 진짜 상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깨고 나니까 그게 가상이었구나, 그게 헛 것이었구나 이렇게 알게 됩니다.

이 때 헛 것인줄 알면 그걸로 끝이어야 하는데, 그건 헛 것이니 그게 없어지면 진짜가 있을 것 아니냐,

그게 가상이니 실상이라는 게 또 따로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본 것은 가짜지만 그 가짜배기를 없애면 그 아래 진짜배기가 있을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해탈의 길에서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내가 이제까지 진짜배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거기 집착을 했는데,

그게 보니까 꿈같이 허망한 것인 줄 알아버리면 집착할 바가 없어져야 합니다.

집착할 바가 없어지면 곧 자유로워지고, 모든 괴로움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뭔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 뭔가 잡으려고 하는 생각을 안 버립니다.

이제까지 잡고 있었던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헛것에 집착하지 말자 그러면 끝나는데,

잡을 거리,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쥐고 있으니 의지처가 없어지면 허무해집니다.

그러니까 또 새로운 의지처를 찾겠다고 나섭니다.

진짜배기 따로 있어야 됩니다. 왜? 의지를 해야 되니까, 뭔가를 잡아야 되니까,

이래서 가상을 또 실상이라고 만들어가지고 집착하는 겁니다.

 

얻으려고 하는 마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무엇인가 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버려지지 않으면,

'공하다' 하는 것이 '허무하다'고 느껴집니다.

잡아야 되는데 잡을 게 없으니 또 생각이 나아갑니다.

이제까지 이게 좋다고 잡았는데 가만 보니 이것은 허무한 것이구나,

그럼 진짜 잡아야 될게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냅니다.

이제까지 실체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걸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꿈같고 아지랑이 같은 줄을 알면, 즉 꿈에서 깨면 ‘아 꿈이었구나’ 이걸로 끝나야 하는데,

그 꿈을 가지고 또 해몽하러 다닙니다.

이것은 꿈을 깼다고 하지만 아직도 꿈속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미망 속에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진실상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이건 대승불교 후반에 나온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을 지금 나라고 하는 나는 ‘가짜 나’고 그 밑바닥에 ‘진짜 나’가 있다,

그 진짜 나를 불성이라고 하는데 그걸 잡아야 된다 이렇게 착각합니다.

꿈을 꾸면서 그 꿈속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웠는데, 눈을 뜨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모든 중생이 지금 괴로운 것은 꿈꾸는 것과 같다,

눈을 뜨면 그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이 이 미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니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은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지,

불성이라고 하는 어떤 종자가 밑바닥에 들어있다 이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꿈을 깨면 그걸로 끝나야 됩니다.

그런데 꿈을 깬 뒤에 이제까지 한 것은 꿈이라면 진짜배기 삶은 뭔가 하고 또 찾으러 다니는 겁니다.

꿈을 깨면, 이미 허망한 줄 알아버리면 모든 '고'는 끝나버립니다.

모든 상, 모든 모양이 지어진 것은 비상, 모양이 아니다,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다, 즉 실체가 없다,

그 모양 지어진 것 그것이 진실상인 줄 알았는데,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허망한 거다,

허망한 줄 알면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할 것이 없으면 모든 괴로움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가짜 나를 없애고 진짜 나를 찾는다고 산천을 헤매고 다니는 병자가 굉장히 많다,

이것은 그냥 해매고 다니는 것에 불과합니다, 헤맬게 뭐가 있습니까?

일체가 마음 가운데 있고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공한 줄을 알면 그냥 해탈하는 겁니다.

 

약견 제상비상(若見 諸相非相) = 조견 오온개공(照見 五蘊皆空)

제상이 비상인줄을 보면(알면) 즉견 여래다,

반야심경도 똑같은 논리입니다.

조견 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한 줄을 깨달으면, 도일체고액,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여기서는 즉견여래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경전 저 경전 글자가 다르고 설명 방법이 다르고 비유가 다를 뿐이지 내용은 다 같은 얘기입니다.    

 

 

(제5-2강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