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1강에서 계속)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고 비가 촉촉이 내리면 대지로부터 온갖 싹이 올라와야 하지만,
4월인데도 찬바람이 쌩쌩거리고 비가 오지 않으면 나야할 싹들이 하나도 못 나옵니다.
그럴 때이지만 땅속에서 조그만 싹이 하나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싹은 위로 올라온 모양만 보면 조그마할 지라도 땅속에는 엄청나게 큰 뿌리가 있기에,
날씨가 춥고 비가 안와도 그 뿌리로부터 힘을 받아 싹을 틔워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싹은 비가 오고 날씨가 풀리면 금방 자라버립니다.
이런 말법시대, 오탁악세는 4월인데도 날이 춥고 가문 것과 같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는 악조건 속에서 작은 싹을 틔운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부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은 날이 풀리고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싹은 단박에 커져버립니다.
누구나 다 선행을 하고 악행을 멈추는 시대에 태어나면 여러분들도 다 따라서 그렇게 할 것이지만,
그런 시대에는 이런 법문을 들어도 금방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남이 다 나쁜 방향으로 살아갈 때 그걸 거슬러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는 것은 굉장한 창조성, 주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붓다란 완전한 주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니까 자기 인생의 주인이요 우주의 주인입니다.
그 것은 엄청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걸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지시인(當知是人) :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불어 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 一佛二佛三四五佛) :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이종선근(而種善根) : 선근을 심은 것만이 아니라
이어무량 천만불소(已於無量 千萬佛所) : 저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처소에
종제선근(種諸善根) : 이미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런 오탁악세에서 휩쓸리지 않고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두 부처님, 네다섯 부처님께만 공양을 올리고 선근을 심은 게 아니고,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다 선근의 종자를 심은 사람이다.
문시장구 내지일념(聞是章句 乃至一念) : 이 문장과 글귀를 들으면 한 생각이라도
생정신자(生淨信者) :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니라.
여기서 ‘이 문장과 글귀’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말하는 것이고,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란 뜻입니다
수보리 여래실지실견 (須菩堤 如來悉知悉見) : 수보리여! 여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보나니,
시제중생(是諸衆生) : 이 모든 중생이
득여시무량복덕(得如是無量福德) :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으리라
수보리야,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으리라 하는 것을 여래께서는 다 알고 다 보느니라.
여기서 ‘이 모든 중생(시제중생, 是諸衆生)’이란 ‘유지계수복자(有 持戒修福者)’를 말합니다.
오늘 같은 이런 세상에서도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술 먹고 방탕하지 않고,
나아가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가난한 이를 돕고, 그 몸과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고,
진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바른 문화, 바른 생활태도를 창조해 나간다면
이런 중생은 그 얻는 공덕이 한량이 없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고 다 보고 계신다
하이고 시제중생(何以故 是諸衆生) :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무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無復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 다시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으며,
무법상 역무비법상(無法相 亦無非法相) : 법이라는 상도 없으며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이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모든 중생은 사실은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다,
즉 그는 나라느니 너라느니 중생이라느니 존재라느니 이런 어떤 상을 갖고 있지가 않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만 없는 게 아니라 이게 법이다 하는 그런 상도 안 갖는다,
또한 법이 아니다 하는 상도 내지 않는다
하이고 시제중생(何以故 是諸衆生) :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이
약심취상(若心取相) :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 人衆生壽者)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고 약취법상(何以故 若取法相) : 왜냐하면 만약 법이라는 상을 취해도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한 것이고,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 : 만약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취하더라도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한마디로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너라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되고 나도 너도 없다는 상도 지어서도 안 된다,
있다 하는 상을 지어서도 안 되고, 없다 하는 상도 지어서도 안 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상도 지어서도 안 된다,
어떤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이라도 지으면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전에 들었던 비유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봅시다.
산이 하나 있다, 그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서산이라 부르고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동산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곳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건 틀림없는 동산이고 틀림없는 서산이다,
이랬을 때 서로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 것이 아상이다,
그래서 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착각한 중생들을 보고 그게 잘못되었다, 상을 깨트려라,
상을 깨트리려면 그 동네에서 나와야 된다,
그 동네에서 나와 보니 그것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비동비서더라, 이걸 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비동비서산이다, 이러면 또 법이라고 하는 상을 취한 것이 된다,
그럼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도 아니다, 이래도 정답이 아니다,
그 산은 어떤 상도 취하면 안 된다,
동산이라 해도 맞지 않고 서산이라 해도 맞지 않고 비동비서산이라고 해도 맞지 않다,
그러기에 또한 그 산은 동산이라 해도 맞고 서산이라 해도 맞고 비동비서라 해도 맞을 수가 있다,
동쪽에 가면 서산이요 서쪽에 가면 동산이요 동쪽 서쪽을 떠나면 서산도 동산도 아니요,
남쪽에 가면 북산이요 북쪽에 가면 남산이고 남쪽 북쪽을 떠나면 남산도 북산도 아닌게 된다,
그래서 무유정법, 이것이 법이라고 정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법이라 하는 상을 취해도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법 아니다 하는 상을 취해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게 된다.
서울가는 길은 인천사람에게는 동이요 춘천사람에게는 서요 수원사람에게는 북이다,
그러나 인천사람에게 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서울은 동쪽으로 가야 된다 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
북쪽으로 가야 된다 서쪽으로 가야 된다, 그렇지가 않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가 않다, 무유정법이다,
그러면 서울 가는 길은 없는 거구나, 이게 비법상이다, 이것도 옳지가 않다
아무렇게나 가도 서울 가네 이렇게 말해도 옳지가 않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갈 수가 없다,
서울 가는 길은 없는 게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서울 가는 길이 생겨난다,
인연을 따라서 인천사람에게는 동이 되고 춘천사람에게는 서가 되고 수원사람에게는 북이 된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르니 방황하지 내려다보는 사람에게 서울 가는 길은 너무 쉽다,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쓴 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생각을 일으켜서 어떤 상이나 고정관념을 만들면 안 된다,
어떤 상이든지 좋고 나쁘고가 아니다,
부처님 법이다 라는 상을 지어도 이미 그것은 아인중생수자에 집착한 거라서 어긋나버린다.
시고 불응취법(是故 不應取法) :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 말며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 법 아닌 것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이 법이다 라고 단정도 하지 말고 이건 법이 아니다 라고도 단정을 하지 마라,
나는 잘했고 너는 틀렸다 이렇게 단정하지 말고, 네가 잘했고 나는 틀렸다 이렇게도 단정하지 마라.
이시의고 여래상설(以是義故 如來常設) : 이런 뜻으로 여래는 항상 말하노니
여등비구(汝等比丘) : 너희 비구들은
지아설법 여벌유자(如筏喩者 知我說法) : 나의 설법이 뗏목에 비유한 것과 같이 알지니,
부처님은 자신이 설한 법을 뗏목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강을 건너려 하는데 마침 뗏목이 한 척 있어 그걸 타고 저어서 건너갔다,
그 뗏목이 너무너무 고맙다, 그러니 은혜를 알아야 되겠다,
그 은혜를 갚는다고 뗏목을 메고 가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것처럼 인천사람이 서울을 갈 때는 동쪽으로 가지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동쪽을 버려야 됩니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 서울을 지나가버립니다.
서울을 가는 길은 동도 있고 서도 있고 남도 있고 북도 있지만, 서울에 도달하면 동도 없고 서도 없고 남도 없고 북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 수행의 길이 있지만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면 그 수행의 갖가지 방법들은 고집할 게 못 됩니다.
그건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법마저도 깨달음에 도달하면 놔라, 집착하지 마라 이겁니다.
(제6-3강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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