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 선현이 일어나서 법문을 청하다
제2분 선현기청분은 ‘선현이 일어나서 법문을 청하다’는 뜻으로, 여기서 선현은 수보리를 말합니다.
즉,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장면을 기록해 놓은 게 선현기청분입니다.
시(時) : 그때에
장로수보리(長老 須菩堤) : 장로 수보리가
재대중중(在 大衆中) : 대중 가운데 계셔서
즉종좌기(卽從座起) : 자리를 좆아 일어나서(자리에서 일어나서)
‘시’, ‘그 때에’란 밥을 드시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았을 때, 즉 명상에 잠겨있을 때를 말합니다.
‘장로’란 ‘원로’라는 말로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원래 불교용어입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이니 그 당시에 원로대접을 받았습니다.
‘재 대중중’, ‘대중 가운데 앉아 있다가’
‘즉종좌기’, ‘자리를 좆아 일어났다’, 그러니까 앉아계시다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편단우견(偏袒右肩) :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우슬착지(右膝着地) :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공경(合掌恭敬) :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부처님을 받들며
이백불언(而白 佛言) : 부처님께 말씀하시되
희유세존(希有 世尊) :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선호념제보살(如來 善護念 諸菩薩) :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염려하고 있으며
선부촉제보살(善付囑 諸菩薩) : 모든 보살들에게 (깨달음의 법을) 잘 부촉해 주십니다.
그 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붙이고,
손을 모아 합장하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말씀을 여쭈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염려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모든 보살에게 바른 법을 잘 부촉하고 있습니다.
세존선남자선여인(世尊 善男子 善女人) : 세존이시여, 어떤 남자와 어떤 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 阿多羅三藐三菩提心) :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사람은
응운하주(應云何住) :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어떻게 그 마음을 가져야 하며)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습니까(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각 또는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그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머무르냐’는 ‘어떻게 가지느냐’, ‘어떻게 항복받느냐’는 ‘어떻게 다스리냐’는 말입니다.
그 번뇌망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고 어떻게 한결같이 유지되도록 그것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불언(佛言)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선재선재(善哉 善哉) : 착하고 착하구나
수보리여여소설(須菩堤 如汝所說) :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와 같아서
여래선호념제보살(如來 善護念 諸菩薩) :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염려하고 생각하고 있으며
선부촉제보살(善付囑 諸菩薩) :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다
여금제청(汝今提聽) : 이제 자세히 들어라
당위여설(當爲如說) :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네가 지금 물으니 거기에 대해서 법을 설하리라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보살을 말합니다.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을 내면 그가 곧 보살인 것입니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줄이면 ‘발보리심’, 더 줄이면 ‘발심’이 됩니다.
선남자선여인이 발심을 하면 이런 사람을 보디사트바, 보리살타, 보살이라 합니다.
응여시주(應 如是 住) :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무르며(마음을 이와 같이 가지며)
여시항복기심(如是 降伏 其心) :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라(그 마음을 다스려라)
유연 세존(唯然世尊) :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요욕문(願樂 欲聞) : 원하옵나니 즐거이 듣기를 바라옵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을 이와 같이 가지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라’고 말씀하니까,
수보리가 ‘기꺼이 듣겠습니다, 즐거이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법회, 즉 금강경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법문이 설해지는 장소·시간·상황에 대한 배경, 법문을 청하는 배경은 1, 2분에 설해져 있고,
제3분부터 본격적인 문답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수보리는 오늘 아침 부처님을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전부터 부처님을 모시고 살았지요.
그런데 왜 밥 잘 먹고 휴식시간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위대하시라 세존이시여’ 라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하고 그럴까요?
부처님도 ‘야야, 그런 말 하지마라’이러는 것이 아니라,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고 합니다.
칭찬을 하면 겸손할 줄 알아야지, 부처님이 수보리 말에 부화뇌동해가지고 잘난 척해서 되겠습니까?
근데 분명히 그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금강경은 글자의 뜻으로만 보면 제1·2분이 금강경이 쓰여진 배경으로 볼 수 있는데,
깨달음의 눈으로, 선적 관점에서 보면, 뒤의 것은 다 허드레 소리고 요지는 제1분에 들어있습니다.
‘금강경 좀 읽었다’ 이러면 선방에서 조실스님이 ‘금강경의 요지는 제1분에 들어있는 데 1분에 있는 어느 글자인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게 뭘까요?
수보리는 출가한 지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부처님 모시고 늘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문을 매일매일 듣고 늘 부처님을 존경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도 참 많이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에 문득 크게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 어떤 것이 오늘 수보리의 눈에 확 뜨여서,
너무너무 기뻐서 그 깨달음의 기쁨을 부처님께 토해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수보리가 뭔가 크게 깨달은 줄을 아시고, 수보리의 깨달음에 대해서 호응을 해준 것입니다.
그게 지금 여기 들어있는 것입니다.
제1분을 눈을 감고 가만히 상상해보세요.
제다바나(Jetavana, 기원정사)라는 숲이 있습니다.
그 숲의 이 나무 밑에는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저 나무 밑에는 수보리가 있고, 그 옆 나무는 아난다가 있고,
그 옆에는 사리푸트라가 있고, 마하가섭이 있고, 목련존자가 있고, 이렇게 1,250명이 큰 숲에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밥 때가 되자 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성내로 들어갑니다.
부처님이 앞에 서고 그 다음에 아난다가 서고 수보리가 서고 아니롯다가 서고 사리푸트라가 서서 성내로 들어가는 겁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제일 먼 골목으로 들어가면 뒷사람은 이 골목으로 또 다른 사람은 저 골목으로,
맨 끝에 온 사람은 제일 먼 골목으로 들어가서 밥을 빕니다.
집집마다 앞에 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서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밥을 먹고 있다가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 줍니다.
주든지 안 주든지, 뭘 주든지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기에 분별하지 않고 무심하게 서 있습니다
이게 뭘 주나 하고 분별을 하고 서있으면 거지가 되는 겁니다.
비록 껍데기는 거지지만 속은 거지가 아니라 붓다이고 붓다의 제자들이니, 다소곳이 그러나 얻으려는 욕망 없이 서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숟가락 얻기도 하고 두 숟가락 얻기도 하여 하루 먹을 치 정도 되면 돌아옵니다.
돌아와서는 둥그렇게 앉아서 밥을 먹는데 많이 얻어온 사람도 있지만 적게 얻어온 사람도 있겠고,
환자는 얻으러 가지 못했으니 다 모아서 다시 분배를 합니다.
그렇게 다 같이 나눠먹습니다.
또한 음식은 절대 나중에 먹으려 남겨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발우는 씻어서 덮어놓고, 옷도 벗어서 얹어놓고 발 씻고 와서 앉아있습니다.
밥 먹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앉아 조용히 있는데 수보리가 벌떡 일어납니다.
오늘 부처님과 같이 탁발을 하고 밥을 먹고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법의 진리가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대로 다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때가 되면 일어나 밥그릇 들고 옷 입고, 걸어갈 때엔 걸어가는 것에, 밥 빌 때는 밥 비는 것에,
돌아올 때는 돌아오는 것에, 나눌 때는 나누는 것에, 먹을 때는 먹는 것에, 먹고 나서는 치우는 것에, 끝나고 나서는 앉는 것에,
그 하나하나에 그대로 여래의 무상심심 미묘법문(無上甚深 微妙法文)이 다 들어있는 것을 오늘 확연히 깨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분의 그런 삶이 부처님 자신의 그러한 자유로운 삶뿐만이 아니고,
미래에 수행해 갈 수많은 수행자들을 염려해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돈 많은 신도들도 다 부처님의 제자이고, 큰 나라의 왕들도 다 부처님의 제자이고
또 주위에 1,250명이나 되는 출가한 스님들도 있는데 왜 손수 밥을 얻으러 다니고 얻어서 먹고 그럴까?
제자들이 얻어다 준 것 먹을 수도 있고, 신도들이 서로 오라고 하니 가서 대접받고 먹을 수도 있고,
좋은 옷 입을 수도 있고, 좋은 집에 가서 잘 수도 있는 데,
그런 것들을 누리고도 남을 만한 자격이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미래의 중생들, 미래의 보살들에게 바른 법이 무엇인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게 핵심인 것입니다.
(제2-2분에 계속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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