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바꾸면 ~~

36. 전쟁의 기억 - 주검

상원통사 2017. 9. 29. 20:25

** 여시아상(如是我想) : 이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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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어느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곳,

그러나 우리에게 슬픈 일이 있어 가야만 했던 그곳은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국립병원 메디칼 시티 옆에 있었다.

기억하건데, 기분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그곳의 분위기는 음침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 켠에 오래된 책상이 하나 놓여져 있고, 가운데엔 군데군데 뜯어진 소파가 놓여져 있고,

사방의 벽에는 관 하나 들어갈만한 크기의 문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 근무하는 현지인 두 사람은 뭔가를 맛있게 먹으며 서로 히히덕거리곤 했지만,

죽은 영령들이 내뿜는 한숨이 더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실내 공기는 무겁고 끕끕하게만 느껴지고

희미한 조명도 점점 더 흐려지는 것만 같아 들어간 지 10분도 되지 않아 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가 바닥 저 깊은 곳까지 내쉬자 이제야 마음이 좀 나아지며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는 막 넘어가고 어둠이 시나브로 깊어지는데 아이들 떠드는 소리조차 사라진 거리에는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무거운 마음에 담배 한 대 물고 멍하니 서있는데, 화물칸에 뚜껑이 씌워진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다가와 영안실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영안실에 있던 사람들은 화물칸의 뒷문을 열고 서로 힘을 합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뭘까, 궁금증이 동하여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끈 후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순간 말문이 막히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람의 주검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싣고 와서 이곳 영안실에 안치하는 중이었다.

살았을 땐 분명 우리와 똑같이 자고 먹고 말하고 웃고 떠들던 사람들,

그러나 죽어 실려올 땐 더 이상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기억하건데, 그들을 싣고 온 차는 분명 도살된 소나 돼지, 양들을 통째로 실어나르는 11톤짜리 냉장탑차였다.

가축을 실어나르는 화물칸 안에 그들의 시신이 실려 운반되었던 것이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좋다, 사람이 죽으면 적어도 관이라도 하나 마련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 된다면 바닥에라도 편히 누워 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사람을 허리 높이까지 겹겹이 쌓아서, 네다섯 겹쯤 차곡차곡 쌓아서 운반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홀딱 벗긴 채로 켜켜이 쌓아서 운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 대부분은 머리가 짧았고 피부빛은 매우 창백했지만 핏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씻기기는 씻긴 것 같았는데,

왼쪽 옆구리로 내장이 삐져 나와 축 늘어져 있는 시신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가족들이 그 광경을 봤다면 어떠했을까......

산 사람들은 자기 임무를 다하느라 죽은 사람들을 아무 말 없이 영안실 안으로 옮기고 있었고,

난 그 자리를 벗어나 멀리서 서성이며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땐 이라크가 이란과 한창 전쟁을 하고 있던 때였다.

바그다드는 그래도 조용했지만 남부 바스라 지역은 날마다 포탄이 떨어지고 전투가 치열했었다.

그 싸움터에서 죽어 발가벗겨지고 깨끗이 닦이어 실려온 주검들일 수도 있었다.

당시 이라크는 후세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누구처럼 막강한 독재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했기에,

현지 사람들은 습관처럼 주변에 바쓰당원이 있는 지 없는지 살핀 후 말문을 열던 때였다.

왜 그들이 죽어 그런 모습으로 그곳에 실려왔는 지 그 때엔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지금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가축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주검들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 않은 슬픈 역사가 있다.

그 진상이 다 밝혀지지 않은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제주 4·3 항쟁 등등,

그리고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학살되었던 6·25 전쟁!

그런데 또 그런 끔찍한 살육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전쟁을 하더라도 저쪽(한반도)에서 하고, 수천 명이 죽더라도 저쪽에서 죽지 이쪽(미 본토)에서 죽지 않는다"는 트럼프,

미사일이 일본 본토 위를 지나 괌도까지 만큼의 거리에 내리꽂히자 만연의 미소를 띠고 박수를 치는 김정은,

'서북청년단'이란 문구를 버젓이 등 뒤에 달고 자랑스럽게 활보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사람들.


이 땅에서 다시 또 전쟁이 일어난다면?

내가 죽어 발가벗겨져 그들처럼 포개져 차곡차곡 화물칸에 실릴 수도 있고,

내 가까운 사람이 죽어 창자가 삐져나온 채로 화물칸에 실려 영안실로 갈 수도 있다.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러니 조금 더 참아야 하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하고 조금 더 양보해야 한다.

어떻게 하든지 대화의 탁자에 마주 앉아, 속은 상하지만 싸우지 않고 말로 웃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미동맹이 깨진다 하더라도 전쟁은 안 된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우리 길게 보자, 5년 후가 아니라 50년 후의 이 나라를 생각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옳은 것인지 답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