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구조로 보면 한 가운데에 위치하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공간을 용케도 찾아낸 아내는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이 놔두고 간 헌 서랍장을 깨끗한 천으로 덮어 기도하는 제단으로 탈바꿈 시켰다.
제단 위 벽면에는 왼손에 못이 박혀 움직이지 못 하지만 오른손을 우리에게 내밀고 계신 예수님 십자가상이 있고,
제단 옆에는 두 손을 합장하고 그윽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계시는 성모님상이 있고,
제단 위에는 아기 예수님, 교황님 사진, 그리고 아이들이 초를 깎아 만든 예수님 얼굴 등이 놓여져있다.
아내는 그 제단 앞에 앉아 촛불을 켜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제단 앞에 앉아 기도를 마치고 촛불을 끄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세례는 받았지만 ‘주님의 기도’조차 외울 줄 모르는 나이기에 아내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와 주변의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몸이 아파 힘들어 하는 사람, 뜻하지 않게 힘든 일을 겪어 마음이 아픈 사람,
이 생을 마치고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사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계속한다.
그렇게 하는 아내를 보며 왜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기도를 하는 지,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 지,
무슨 남는 것 있고 무슨 좋은 일 있다고 그러는 것인지, 나 같은 사탄띠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작년이었는데 여름쯤으로 기억한다.
둘째 아이가 달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수능이 108일 밖에 안 남았네!”
그래? 벌써 그렇게 됐구나, 그동안 하기 싫은 공부하느라 고생 많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겠구나.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딸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라곤 학원비 벌어다 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뭔가 하나쯤 딸을 위해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래, 남은 108일 동안 108배를 올려주는 것이 좋겠다!
안하던 것 시작한다면 부담이겠지만, 지금까지 이틀에 한 번꼴로 ‘운동 108배’를 하고 있기에 절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은 처음으로 해보는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겨우 기도문을 만들었다.
“오늘도 우리 작은 딸이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108일을 목표로 딸을 위한 108배를 시작했다.
‘운동 108배’는 귀찮다고 빼먹고, 힘들다고 빼먹고, 술 먹었다고 빼먹고, 게으름 피우다 빼먹곤 했지만,
‘기도 108배’는 앞에서 지켜보고 뒤에서 지켜보고 위에서 지켜보고 또 안에서도 지켜보고 있어,
아침에 못할 때엔 밤에라도 했고 어쩔 수 없이 빠진 날엔 다음날 아침·저녁으로 한 적도 있었다.
기도문이 입에 익숙해질 즈음부터는 주변 사람들도 한 사람씩 기도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하루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하고 나면,
내가 진짜로 그들에게 뭔가 해준 것 같은 느낌에 스스로 기분도 좋아지고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기도는 과연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딸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는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인내심을 선물로 받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건강해지는 선물을 거꾸로 받았다.
궁금하여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했더니 내 자신이 더 좋아지는 것 같은데 진짜로 그런 것이냐고?
답은 간단했다. “당근이지요!!!”
아내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을 난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기도하는 마음은 우선 나를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올리더라도 그것이 꼭 남을 위한 것이라만 할 수도 없다.
애써 이름 붙인다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108배를 시작하면 자연스레 기도문이 따라 나온다.
하느님께 바라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께 비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찾는 것도 아니다.
단지 바라는 바를 마음 속으로 되뇌일 뿐이지만 우선 내 마음이 편해져서 좋고,
바램이 이루어지면 그들도 좋겠지만, 내가 바라는 바가 이루지는 것이니 나는 또 한 번 좋고,
그렇게 하여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우리가 행복해질 것이고, 행복한 세상에서 사는 나는 더욱 더 좋은 것이다.
요즘은 기도문이 조금 더 길어졌다.
우선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내가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스스로 변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감사하고,
마지막엔 이런 기도문을 외우며 108배를 마무리 한다.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깨끗한 물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우물 10,000개만 팠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파 힘들어하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국수공장 10개만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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