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앞으로 간호사가 왔다. 남자 간호사이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 수술부위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손목에 찬 인식표를 확인한다.
수술실까지 걸어가겠느냐고 물어보기에 그런다고 했더니 슬리퍼를 내준다.
앞장서서 걷는 그를 따라 가니 우선 간호사실에 가서 서명을 하고 승강기에 오른다.
1층 수술실에 도착하니 나보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는 이도 있고, 뒤이어 오는 사람들도 있다.
걸어서 오는 젊은이, 침대에 누워서 오는 할머니, 아이를 달래며 들어오는 젊은 엄마....
수술실에 근무하는 이가 내게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름을 묻고, 수술부위를 묻고, 인식표의 이름을 확인하고, 환자번호 '1979943'을 확인하고,
안경, 시계, 목걸이 등 몸에 부착물이 없는지 확인하고 심지어 매니큐어를 발랐는지까지 확인한다.
춥다.
냉방이 과한 것인지 내 마음이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별 생각 다 난다고 하던데 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시키는 대로 앉아만 있을 뿐 아무 생각도 없다.
입원하여 수술하라니? 무슨 소리인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가 워낙 부실하여 임플란트 시술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개인병원은 불안하여 가지 못하다가,
믿을만한 선생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돈이 많이 드는 줄 알면서도 대학병원을 찾았다.
파노라마 사진을 찍고 자리에 오자마자 벌써 화면에는 사진이 올라와 있고, 그 사진을 보며 의사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임플란트 하는데 문제없어요. 우선 입원하여 뼈이식부터 하고, 심는 것은 나중에 부분마취로도 충분합니다.”
치과라고 하면 따끔한 마취주사를 맞고 길어야 몇 시간정도 입 벌리고 있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2박3일 입원해서 전신마취를 한 뒤 수술해야 한다고 하니 고개가 갸우뚱거려졌지만
그러기에 개인병원에서는 할 수 없는 수술이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내 차례, 수술실에 들어가니 의사선생님 외에도 예닐곱 분이 내 수술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시키는 대로 수술대에 누우니 발가락 끝에도, 손가락 끝에도, 몸통에도, 머리 끝에까지 뭔가를 붙이고 꼭꼭 누른다.
아프다.
나이 지긋한 여자 마취의사께서 ‘수술 중엔 호흡이 곤란할 수도 있어 산소를 공급합니다’ 라며 코에 호스를 댄다.
약한 바람이 느껴지며 익숙하지 않은 옅은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오는 듯 싶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째 숨을 들이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기까지가 의식의 끝이었다.
난 마취가 되었고 잠에 빠져 들었다. 영원한 잠이 아닌 다시 깨어나는 잠에 들었던 것이다.
저승사자가 있어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를 데리러 온다면 어떻게 할까?
우선 어디 사는 누구인지부터 확인할 것이다.
간호사가 내게 그랬듯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들고 온 장부의 기록과 맞으면 고개를 끄덕인 후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앞장서서 저승 가는 길을 안내할 것이다.
수술실 입구에서 그랬듯이 저승문에 도착하면 문을 지키는 이가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이다.
이름을 확인하고, 언제 태어났고, 어디에 사는 지 확인하고 이상이 없으면 저승문을 통과시킬 것이다.
이승에서의 기억은 거기까지뿐일 것이고, 저승 문을 통과하면 이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볼 때는 그저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멎어있는 몸뚱이만 보일 것이다.
몽롱하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주위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같기도 하다.
침대에 누워 이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입원실의 내 침대로 옮기는 것 같기도 하다.
입안이 아프고, 얼굴엔 붕대 같은 것이 붙여져 있는 것 같고, 입안에는 실밥이 느껴진다.
춥다. 이불을 덮었어도 춥다.
의식은 희미하고 머릿속이 멍하고 수술부위가 아프고 자꾸 졸음이 온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몇 번 거듭하자 점점 주변이 밝아지고 옆에 앉아있는 아내의 얼굴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야 내가 입원실에 돌아와 누워있다는 것이 인식되고 주변도 보이고 옆 침대에서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확실히 깨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수술실을 나온 나는 같은 나일까?
마취가 진행되면서 의식은 한순간에 끊어졌다.
희미하다가 서서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소냄새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까지만 기억난다.
그때 그 순간에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니라 깨어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이다.
오온(五蘊)이 '나'라면, 의식이 있을 때까지의 내가 ‘나’인 것이지 의식이 없는 ‘나’는 내가 아니다.
만약 의식이 없는 동안 들숨과 날숨이 멈추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숨만 쉬고 있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식이 없어지기 전의 ‘나’와 의식이 돌아온 후의 ‘나’는 같은 ‘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몸의 세포 수는 60조 개, 부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세포의 수명이 28일이라 하니,
의식이 없던 3시간 동안 2,500억 개의 세포가 내 몸에서 사라지고 새 세포가 그 자리를 채웠을 것이기에
나는 나라고 할지언정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큼 달라져 있는 것이다.
또 멀쩡했던 의식은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처럼 흐릿한 상태로 바뀌었고,
아무 것도 없던 입안에는 칼로 자른 수술 자국과 그곳을 꿰맨 거친 실밥이 남아있고,
멀쩡했던 얼굴은 도토리 머금은 다람쥐마냥 양 볼이 퉁퉁 부어 있고,
두 발로 걸어서 수술실로 향했는데 간호사가 밀어주는 침대에 실려 입원실로 돌아왔으니,
의식이 없는 3시간 동안 달라져도 한참 많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수술 전의 '나'와 수술 후의 ‘나’가 똑같은 '나'라고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
두 씨앗이 만나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고, 거기에 많은 물질들이 보태지며 생명활동이 시작되고,
마침내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으로 나와 한 삶을 시작한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텅 빈 공간에 살아가는 동안의 갖가지 기억들을 담아 그것이 마치 자기인양 하다가,
이제 제 할 일 끝내고 돌아갈 때엔 그 기억만 간직한 채 훌훌 털어버린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라 알고 있다.
아이의 태어남이 아닌 또 다른 태어남(굳이 이름붙인다면 化生?)도 있다.
수술실에 들어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 사라졌음을 죽음에 견준다면,
2,500억 개의 세포를 바꾼 달라진 몸으로 의식이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태어남이라 할 수 있고,
캄캄한 밤이 되어 서서히 잠이 몰려오면서 의식이 없어짐을 죽음에 이르는 것에 견준다면,
6,500억 개의 세포를 바꾼 몸으로 밝은 아침에 깨어나는 것도 또 다른 태어남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남은 기쁘고 좋은 일이다.
갓난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그 태어남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기뻐한다.
갓난아이만이 아니라 강아지도 송아지도 망아지도 병아리도, 우린 새 생명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한다.
의식이 사라졌다가 그것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태어남의 하나이니 기쁜 일이고,
아침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는 것도 또 다른 태어남이니 마찬가지로 기쁜 일이다.
이렇게 기쁘고 좋은 일이 날마다 내게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지금껏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2박3일의 입원과 수술,
소나타 한 대 값을 입안에 부었기에 기둥뿌리 하나 뽑힌 것 같아 속이 쓰렸는데,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우쳤으니 그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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