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바꾸면 ~~

16. 부산물

상원통사 2015. 12. 14. 22:19

길을 나서기 전, 일정표를 짜는 게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몇 시에 집을 나서고, 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고, 도착하여 얼마나 머무르며,
그날 돌아올 것인지 하룻밤을 잘 것인지 고민하며 여행 일정표를 마무리한다.
일정표만 짜서 될 일은 아니고 여행지에 대한 공부도 필수 사항.
성지에 갈 때에는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절에 갈 때엔 최완수님의 “명찰순례”를 참조하고,
그 외 다른 곳들의 정보는 주로 인터넷을 이용하여 공부한다.
무엇이 있는지, 눈여겨 볼 것은 어떤 것인지, 숨어있는 전설은 없는지, 특별히 사진찍기 좋은 곳은 없는지 등등...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맨 처음 카메라부터 챙긴다.
내겐 카메라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여행지에 대한 느낌이 조금 다르다.
카메라가 없을 때엔 흘깃 보고 그냥 지나칠만한 것도 카메라가 있을 때엔 예사로이 보지 않는다.
하여, 뭔가 더 담아갈 것은 없나, 사진 찍기 좋은 곳은 없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지게  찍어볼까,
그렇게 고민하며 찍을 거리를 찾다보면 걸음이 늦어지는 것은 흠이지만,
안보이고 숨어있던 것을 찾는 즐거움, 이렇게 저렇게 각도를 바꿔가며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잡아보는 즐거움이 있는데
이것들은 말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고 직접 해봐야 그 참맛을 안다.
가끔씩 아내 모습을 담아 보기는 하지만 내 사진은 거의 찍지 않는다.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어색하니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쩌다 찍은 사진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점점 더 안 찍게 된다.
앞으론 날마다 5분씩 거울 보며 표정연습이라도 해야할까보다...
대신 기억을 되살릴만한 장면들은 많이 찍으며, 그 곳의 느낌을 어떻게 묘사할까도 생각한다.
가끔씩 떠오르는 멋진 단어들을 사진과 함께 머릿속에 넣어두려 하지만, 입력만 있고 출력이 없다는 게 흠이다.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가 참으로 어렵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맨 처음 하는 일은 컴퓨터에 사진 파일을 옮기고 그 사진들을 정리하는 것,
찍어온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면서 그 곳들을 되새기고, 그 중 조금 괜찮은 사진들만 고른다.
배경이 멋진 사진, 이야기에 필요한 사진, 멋진 단어와 어울리는 사진, 그리고 내가 보기에 예쁜 사진.....
그렇게 고른 후엔 앞뒤 순서를 정리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무슨 말을 붙이는 게 좋을까 생각을 거듭하는데,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고 몇 번을 들여다봐야만 겨우 쓸 말이 떠오르고 무엇이 부족한 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글을 쓸 자료들은 우선 현지에서 사진으로 찍어온 안내문이나 그곳에서 얻은 팜플렛 등을 참조하고,
책도 다시 읽으며 필요한 부분은 발췌하고, 또 인터넷을 뒤져 좋은 자료들을 찾아 문구를 만들고,
마지막엔 다시 읽어보며 위 아래 설명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지 한 번 더 검토한다.


그렇게 몇 번의 수정을 거친 여행후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여행이 마무리된다.
떠나기 전 일정을 세우고 갈 곳들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미리 한 번 즐기고,
현지에 가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잘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찾아보며 눈으로 마음으로 한 번 즐기고,
집에 돌아와 사진정리하고, 자료 찾고 글을 덧붙여 블로그에 올리면서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즐긴다.
남들과는 달리 한 번 여행을 세 번씩이나 즐겼으니, 블로그에 남은 글은 양분을 다 섭취하고 난 부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읽어 보고 공감 버튼을 눌러주면 기쁨 두 배이다.


‘부처(Buddha)’란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다,
‘종교란 마루 宗 가르칠 敎, 즉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다’,
‘종교도 이해를 하고 믿어야 그 믿음이 더 깊어진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90%가 힌두교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에는 믿음으로서의 신앙(信仰)과 진리로서의 불법(佛法), 두 가지가 있다’
내겐 거의 충격에 가까운 이런 말씀들에 호기심이 생겨 법륜스님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는데,
들을수록 점점 더 빠져들게 되는 것은 물론,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사람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어,
혼자만 듣고 기뻐하기보다 다른 사람도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강의를 요약하여 블로그에 올리고자 마음먹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듣고 요약하는 것이 간단하리라 생각했는데, 말로 하는 강의를 요약하여 글로 적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선 기초지식마저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무슨 뜻인지 내 자신이 이해하는 게 먼저였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요약해야 그 뜻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 시간만 보내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고기를 잡을 땐 막고 품는 것이 최고!’라는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 제일 무식한 방법, 아예 들은 대로 적고 그것을 보면서 요약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선택은 옳았을지 몰라도 전체 강의를 녹취한 후 그것을 다시 요약하는 작업은 녹녹한 것이 아니다.
우선 타자치는 속도가 느린데다가 오타가 심하니 강의를 들으며 실시간으로 타이핑할 수가 없다.
한 대목 듣고 정지버튼 누르고 자판 두들기고, 그 다음 대목 듣고 또 정지시키고 자판을 두들기다 보니,
30분짜리 강의 한 편 녹취하는 데 세 시간 정도, 날짜로 따지면 대략 사흘쯤 걸리는 작업이다.
녹취가 끝나면 제대로 받아 적었는지 다시 한 번 들으면서 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데,
이 작업은 가장 쉬운 것이어서 30분 강의 한 편을 수정하는데 대략 1시간쯤이면 끝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요약작업을 시작한다.
군살은 빼고 진액만 취해야 하고, 앞뒤 문맥을 봐서 자연스럽게 말을 엮어야 하는데,
문외한이 백지상태에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동시에 요약까지 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도 몇 번을 거듭하다보니 요령이 생겼다, 이름하여 단계별 요약법!
처음에는 군더더기를 빼는 작업으로 단순히 요약하는 작업만 한다.
다음은 문맥에 맞게 수정하고 반복되는 구절은 합하여 하나로 만든다.
그 다음엔 잘 모르는 것이나 이상하다 싶은 것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며 그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공부를 더 하고,
내용이 부족하다 싶은 것은 보태고, 없어도 괜찮은 것은 빼고, 연결이 잘 안 되는 부분은 내 생각도 조금 보태기도 한다.
여기까지 하면 거의 윤곽이 잡히기에 이후엔 좀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문장을 가다듬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하면 A4용지로 10여장 쯤 되는 30분 강의가 4~5장 정도로 줄어들게 되는데,
녹취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작업하는데 대략 10시간 정도 소요된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할 때에는 분명 법륜스님의 강의를 다른 사람들도 읽어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먼저 알아야 하기에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찾아보고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다보니 내 공부가 깊어지게 되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말씀의 뜻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 재미에 빠져들게 되고,
2,600년 전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었는 지 부처님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색불이공’ 한 마디 이해하는 데 보름씩이나 걸렸지만 이제야 겨우 감이 잡힐 정도이니,
불교가 뭔지를 제대로 알려면 아직도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어쨌든 내가 누릴 기쁨은 다 누리고 세상 살아가는 또 다른 맛까지 챙겼으니,
블로그에 올린 요약문은 양분을 다 섭취하고 난 부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고 공감버튼을 눌러주면 기쁨 두 배이다.


이렇게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그냥 부산물로만 남아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가고 싶은 데 마음대로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40년쯤 지나면 몸과 마음은 따로 놀게 될 것이고 어쩌면 요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 때 방구석에 틀어박혀 하릴 없이 시간만 보내기보다는 지금 만들어 놓은 것들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즐거웠던 날들도 되새기고 좋은 말씀들에 감탄하며 내가 살아왔고 살아있음을 한 번 더 즐기려 한다.
그러면 이 부산물들은 단순히 찌꺼기가 아니라 정신적인 노후 보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 생각 바꾸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 [헤어짐] 탈상(脫喪)  (0) 2016.11.24
17. 가을걷이  (0) 2015.12.22
15. 기도하는 마음  (0) 2015.12.07
14. 날마다 행복  (0) 2015.12.01
13. 학이시습지  (0) 201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