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강에서 계속)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 이와 같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우리는 재물을 얻으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권력을 얻으려 하고, 도를 얻으려 합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얻어지지 않으면 한탄하고 후회합니다.
이런 것들은 얻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무엇을 하든지 똑같이 고뇌가 생깁니다.
얻으려는 대상이 돈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도든 그건 다 하나의 상에 불과한 것인데,
뭔가를 얻으려고 하기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놔버리면 그 즉시 괴로움이 사라지고 번뇌가 사라져버립니다.
보리살타(菩提薩埵) :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때문에
심무가애(心無罣碍) : 마음에 장애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니 마음에 장애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마음에 걸림이 생기는 것은 다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얻을 생각 없이 절에 왔다면 스님이 법문해주면 법문 듣고, 불공하면 불공하면 되고,
연등 만들면 앉아서 연등 만들고, 밥 주면 밥 먹고, 안주면 안 먹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는 안하고 법문만 하니 신경질이 나고, 법문 들으려 왔는데 연등 만드라니 짜증이 납니다.
얻으려고 하면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지만,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바람이 허공에서 아무 걸림이 없는 것처럼 그냥 통과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못났다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 잘났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못났다 생각하고 살면 자존심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잘났다 하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잘났다 생각하니 인생이 피곤해지고, 세상이 자기를 안 알아주니 한탄이 생깁니다.
자기가 못난 줄 알면 아무 괴로움이 없고, 못난 줄을 아는 게 참으로 잘난 인생입니다.
잘나고 싶다고 잘나지는 것이 아니라 천하에 걸림이 없으면 저절로 잘나지는 겁니다.
‘잘났다’는 의식이 있으니 ‘못났다’는 열등의식이 생기지, 정말 못난 사람은 ‘못났다’는 열등의식도 없습니다.
사람은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잘나고 못난 것이 없는 줄 알면 천하에 누가 잘났다고 해도 하나도 부럽지도 않고,
내가 못날 수가 없기 때문에 천하가 나를 못났다 해도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 몸이 본래 공한 줄을 알면 천하가 내게 어떻게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시대 인연을 잘못타고나 정신대에 끌려가 수많은 남자가 내 몸을 스쳐갔다 해도 내 몸은 더러워진 게 아니고,
그 인연에서 풀려나면 즉시 보통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더러워졌다는 한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 짓밟힐 때도 불행했지만 그 뒤에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한 줄 깨쳐버리면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무가애고(無罣碍故) : 마음에 장애가 없으니
무유공포(無有恐怖) : 두려움이 생기지 않게 되고
원리 전도몽상(遠離 顚倒夢想) : 잘못 알고 있거나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을 멀리하게 되어
구경열반(究竟涅槃) :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전도’란 거꾸로 되었다는 말이고, ‘몽상’은 꿈이라는 말입니다.
뒤집어진 헛생각,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몽상이라고 표현하였고,
쥐가 쥐약을 보는 것처럼 거꾸로 알고 있는 것을 전도라 했습니다.
여기서 ‘원리 전도몽상’은 앞의 ‘조견 오온개공’과 내용상으로 같은 뜻이고,
‘구경열반’,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말은 앞의 ‘도일체고액’과 같은 뜻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모든 부처님도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기에
득 아뇩다라 삼먁삼보리(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무상정등각을 얻었습니다.
온 누리의 모든 부처님은 시방제불이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삼세제불이니,
합하면 시방삼세제불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시방을 생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시공간을 떠나 이 세상에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 있을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수행을 한 까닭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
여기서는 얻었다는 표현을 했는데 그 뜻을 잘 새겨봐야 됩니다.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에서 ‘아뇩다라 삼먁삼’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번역합니다.
아뇩다라(anuttarā)는 무상(無上),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최고로 높다는 뜻이고,
삼먁(samyak)은 정등(正等),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보편타당하다는 뜻으로, 같을 等 대신 두루 徧(변)을 쓰기도 하며,
삼보리(saṃbodhi)는 원만한 깨달음(覺)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타당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알 수가 있는 깨달음,
즉 ‘득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는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 이런 까닭으로 반야바라밀다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야 됩니다.
시대신주(是大神呪) : 이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내용으로 충만한 최상의 주문이요
시대명주(是大明呪) : 무지함과 몽매함을 밝혀주는 광명의 주문이고
시무상주(是無上呪) : 더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주문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무엇과 비교할 바가 없는 주문입니다.
제법이 공하고 깨닫는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주문 얘기가 나왔는데,
산스크리트어 다라니(陀羅尼, dhāranī)는 ‘진실한 말씀(진언, 眞言)’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주(呪)로 번역했습니다.
중국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주문’을 외우는 민간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병이 났을 때 중얼중얼 외우면 병이 낫는다든지, 중얼중얼 외우면 돈이 벌리고,
부정타지 않도록 주문을 외우고 잡귀를 물리치도록 주문을 외우는 그런 비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이 공한 줄을 알면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으니, 이 보다 저 좋은 주문이 없기에 ‘주’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법이 공한 줄을 깨쳐버리는 것이 그 어떤 주문보다도 뛰어난 주문이 되는 것입니다.
즉, ‘다라니’, ‘진언’, ‘주’는 다 같은 말이며, 여기서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진실한 말씀’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제46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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