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4. 반야심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제39/40강 대중을 위해서 화작하는 사람

상원통사 2015. 11. 8. 20:12

지난 강의까지 해서 중요한 내용은 다 설명했고, 오늘은 반야심경이 어떤 구조로 짜여있는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반야심경은 중요한 내용이 경전의 전반부에 다 들어있는데,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첫째 줄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하셔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이 짊어짐으로 해서 중생을 구제하고, 그것이 곧 자신의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부하시는 분을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보살이 행하는 수행법에는 여섯 가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바라밀법이 있는데,

반야바라밀법은 여섯 가지를 다 말하기도 하고 그 중에 '지혜' 하나만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범부중생은 받기를 좋아하고, 현명한 사람은 주고받으려하고, 보살과 성인은 베풀되 받을 생각이 없는데,

보살이 베풀되 받으려는 생각이 없는 것은 본래 내거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범부중생은 자기 성질대로 하려하고,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생각이 맞지 않더라도 참고 지내지만,

성인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누가 옳다 할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내가 옳다 할 것이 없어(무아집) 참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환한 이치를 깨닫고 수행해 가는 것을 반야바라밀다라 하는데,

관세음보살은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하셔서 일체 법이 다 공하다 하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일체)은 곧 오온(색····식)이라 말합니다.

오온 중 먼저 색이 공하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인데,

색이 공하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시간적인 관찰을 하고 또 공간적인 관찰을 했습니다.

 

색불이공(시간적 연기관, 無常), 색즉시공(공간적 연기관, 無我)

시간적으로 관찰을 할 때 공하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은 제행이 무상함을 보이는 것이고,

공간적으로 공함을 보이는 방법은 라고 할 실체가 없음을 보이면 됩니다.

여기서는 '색이 공하다'고 보이고 '다시 공이 색하다'고 뒤집어서 보임으로 해서 '색과 공이 같다' 하는 것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헤아리는 그 모든 인식의 대상을 이라 하는데,

그 인식의 대상은 항상함이 없이 변하고 그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단독의 실체가 없다,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습니다.

우선 물질()이 공하다 하는 것은 제가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말씀 드렸고,

그다음에 이름()이 공하다 하는 것은 제가 물컵을 가지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물컵이기에 물을 담는 잔이라고 하지만 술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 담으면 밥그릇이 되니,

거기에는 물잔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 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다 변하고 있고 서로 연관되어서 나타나는 것이지 영원불멸한 단독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을 설명한 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입니다.

 

법이 공하다하는 것을 깨달으면 왜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느냐?

제법이 공하다하는 그런 세계에서는 생멸도 없고 구정도 없고 증감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고,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고,

선도 악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잘못하는 것도 없으니 그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마치 꿈속에서는 나에게 해치려는 강도가 있고 나를 보호하고 도와주려는 은인이 있지만,

꿈을 깨고 보면 강도도 은인도 없어 두려워할 것도 없고 고마워할 것도 없으니,

도일체고액,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시제법공상’, 이 모든 법이 공하다 하는 이런 차원에서는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니 괴로울래야 괴로워할 수가 없습니다.

꿈을 깨서 보니 도둑도 공하고 은인도 공하니, 도둑도 은인도 모두 다 실체가 없습니다.

그게 꿈이었구나라는 말은 그게 공하구나라는 말입니다.

도둑도 없고 은인도 없으니 두려워할 바가 없어, ‘도일체고액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법이 공하다하는 대승의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소승불교인들이 뭔가 수행을 한다, 뭔가 깨달았다, 뭔가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수행한 것도 제대로 깨달은 것도 제대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소승불교를 비판하는 글이 그 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소승불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핵심 불교 사상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 십이연기설, 사성제설, 팔정도설 등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교설을 절대화해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 이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이것만 알면 해탈할 수가 있다, 이것이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절대화해서 거기에 매달려있는 것입니다.

, ‘법은 변하지 않고 법에는 실체가 있다이렇게 생각해서 법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법이라 하더라도 법에 실체가 있다하면 벌써 불법에 어긋나는 것이고,

법은 영원불변하다하는 것도 무상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고,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 또한 법에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가리킨 곳을 봐야 하는데,

산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을 보는 것과 같다고 소승을 비판하는 문장이 그 다음에 연결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반야바라밀 수행을 해서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모든 법이 공하다는 세계에서는 생멸도 없고 구정도 없고 증감도 없다,

일체 법이 다 공하다 하는 그런 차원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없다,

그것이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실체를 인정하면 그건 불법이 아니다,

꿈에서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깨고 나서 꿈인 줄 알면 그것은 똑같이 헛것이지,

선한 꿈을 꾼 것은 좋은 일이고 나쁜 꿈을 꾼 것은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꿈속에서의 얘기고, 꿈을 깨고 나면 선한 꿈이든 악한 꿈이든 단지 꿈일 뿐이다,

꿈에서 세속적으로 살았던 수행을 했던, 눈을 뜨고 나니 꿈이더라 하면 그냥 꿈일 뿐이다,

꿈에 수행한 것은 잘한 거고 꿈에 세속적으로 산 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꿈속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깨고 나면 그것은 다만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 ‘공 가운데서는이 말은 일체가 다 꿈이라는 그런 세계에서 보면이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라는 말 대신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표현했고,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 일체의 모양이 있는 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 아침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다

응장여시관(應作如是觀)   : 마땅히 이렇게 봐야한다

꿈처럼 보고, 아지랑이처럼 보고, 환상처럼 보고, 신기루처럼 보고, 그림자처럼 보고,

물거품처럼 보고, 아침이슬처럼 보고, 번갯불처럼 봐야 된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제41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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