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고(是故) : 이런 까닭으로,
공중(空中) : 공 가운데에서는, 제법이 다 공하다는 그런 차원에서는,
무색(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
여기서는 첫 번째만 ‘무색’이라 하고, ‘무수 무상 무행 무식’을 간단히 ‘무수상행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공중무색’이란 공의 세계에서 보면 색이라고 할 만한 그런 고정불변한 독립된 실체가 없다,
꿈의 세계, 유의의 세계에서 보면 강도가 있고 은인이 있는데,
꿈을 깨서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 보면 강도도 없고 은인도 없습니다.
무색 무수상행식, 색도 수상행식도 실체가 없다, 즉 오온이라고 하는 법의 실체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두 번째로는 '십이처설이 공하다'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의 여섯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과 그 인식 대상인 6경(색·성·향·미·촉·법)이,
서로 만나서 벌어지는 갖가지 세계가 일체(모든 것)라는 것이 십이처설인데,
그 12처설에서의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 이게 눈이다 귀다 코다 할 그럴 실체가 없다,
즉 십이처의 실체가 없다는 것은 법이 공하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 12처설 : 6根(인식기관)과 6境(인식대상)이 만나서 벌어지는 세계를 일체로 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세 번째로는 '십팔계설이 공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12처설이 객관적인 세계를 더 중요시하여 설명했다면,
18계설은 인간의 정신적 관점을 더 중요시하여 세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정신이 바깥 사회와 부딪히면서 벌어지는 인식작용을 설명한 것이 오온설이라면,
바깥 경계에 어떻게 끄달리면서 인식작용이 벌어지나 하는 것을 설명한 게 12처설인데,
그 두 개를 결합시켜서 나온 것이 18계설입니다.
* 18계 : 6경 + 6근 + 6식
그러니까 바깥 경계 6계, 인식기관 6계, 인식작용 6계의 상호작용을 설명한 것이 18계설입니다.
여기서 ‘계’로 붙인 것은 어떤 세계, 구역을 짓는 것으로,
바깥 경계인 색계·성계·향계·미계·촉계·법계, 인식기관인 안계·이계·비계·설계·신계·의계,
그리고 인식작용인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식계 해서 총 18계입니다.
이것도 실체가 없다고 하려면 앞에 전부 다 ‘무’를 붙여야 되지만,
중간은 생략하고 맨 처음과 맨 마지막만 써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18계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18계설에서 법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소승불교도들에게,
그 법의 실체가 없다, 즉 법이 공하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 역무노사진(無老死 亦無老死盡)
네 번째로는 12연기가 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12연기는 우리가 윤회전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삶의 흐름을 아주 세세하게 분석해서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고, 행으로 인하여 식이 있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이 있고,
그다음에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렇게 12가지 연관된 고리를 통해서 변화해 갑니다.
여기서 현재에 일어나는 가장 출발점인 씨앗과 같은 게 ‘식’이고,
육경이 육근과 부딪혀서(‘명색’이 ‘육입’과 ‘촉’해서) 느낌인 ‘수’가 일어납니다.
‘수’가 자라나서 꽃피는 게 ‘애’이고, ‘애’가 결합하여 ‘취’가 되고, ‘유’는 그 열매이자 씨앗입니다.
그러니까 ‘식’이 씨앗이라면 그 열매가 ‘유’이고, ‘유’가 다시 씨앗이 되어서 다음 생에 되풀이 되는 것이 ‘생’, ‘노사’입니다.
‘유’는 현재에서 보면 씨앗이지만 과거에서 보면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 12연기 :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과거에 수도 없이 행해온 것을 한마디로 ‘무명 행 식’으로 표현해서 윤회전생하는 우리의 삶을 설명한 게 12연기인데,
모든 윤회전생의 근본 무지인 ‘무명’은 무명이라고 할 만한 무지의 씨앗이 있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냥 어리석은 한 생각이 일어나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담배 피우는 습관이 없었는데, 한 번 피워볼까 하는 생각을 내는 데서부터 시작한 것처럼,
‘무지’도 ‘무지’라고 할 만한 그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은 어리석다고 하지만, 중생이라고 할 만한 씨앗도 없고 어리석다 할 만한 씨앗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 나쁘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나쁘다 할 만한 씨앗이 없으니,
천수경에서는 죄무자성 종심기, 죄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다만 어리석은 마음따라 일어난 것이라 했습니다.
쥐가 쥐약을 먹을 때는 꼭 무슨 나쁜 업이 있어가지고 죽을 운명에 놓여서 먹은 게 아니고,
배가 고파 뭔가를 먹으려고 했는데 배고픈데 사로잡혀서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먹었다,
그러니 ‘무명’이라고 하지만, 무명이라고 할만 실체가 없다(無無明),
‘무명’이라고 할 실체가 없으니 무명이 다한다(무명을 없앤다)고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보고 ‘저놈은 나쁜 놈이다’ 이렇게 스스로 단정을 하고, 또 고쳐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쁘다 할 것이 없는 줄을 알면 고칠 것도 없습니다.
원효대사가 마지막에 깨달았다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방울스님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자기가 한 생각을 일으켜서 정해놓고,
불쌍하니 구제해야 된다고 또 한 생각을 내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방울스님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쌍하다고 내가 상을 지은 것이지 그 존재 자체는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중생이다’라는 것은 내가 어리석은 한 생각을 낸 것이지, 중생이라 할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명이라 할 것이 없고, 또한 무명을 다한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볼 때 ‘나쁘다’하고 규정해놓고 고치려고 하니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나쁘다 할 것이 없는 줄을 알면 고쳐야 할 것도 없이 그냥 해결이 됩니다.
깨끗하고 더러운 게 있다면 더러운 걸 버리고 깨끗한 걸 취해야하지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는 줄을 깨쳐버리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고, 더러운 걸 깨끗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대승불교는 차원이 다릅니다.
본래 존재는 한 존재일 뿐인데 더럽다 깨끗하다고 자기가 한 생각 내서 분별을 해놓고,
그걸 토대로 해서 더러운 것은 버리려 애를 쓰고 깨끗한 것은 취하려 애를 씁니다.
나는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얻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뭔가 성취했다 하는데,
본래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니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고, 깨끗한 걸 얻었다 할 것도 없습니다.
본래 사람은 천한 것도 아니고 귀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천하다 귀하다고 상을 짓습니다.
노예라고 할 게 본래 없는데 노예라 상을 지어놓고, 노예를 해방시킨다고 또 상을 짓습니다.
노예는 자기가 노예라고 꿈을 꾸다가,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하고 또 상을 짓습니다.
노예해방이라는 표 쪼가리를 쥐고 다니면서 ‘나도 이제 노예가 아니다’라고 부르짖는데,
자유시민은 내가 자유시민이다 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자기를 종으로 알고, 종들 중에서 우두머리 종이 되려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본래 자기가 종이 아닌 줄을 알아버리면, 우두머리 종 될 것도 없고 해방될 것도 없습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無無明 亦無無明盡) : 무명이 없으므로 무명의 다함도 없고
내지(乃至) : (중간의 열 개는 생략하고 끝의 노사로 감)
무노사 역무노사진(無老死 亦無老死盡) : 노사가 없으므로 노사의 다함도 없다
생이 있고 멸이 있다, 생이 있고 사가 있다고 생각하니 생사를 뛰어넘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게 되는데,
제법이 공한 줄 알면 생과 사가 없는 줄을 알게 되고,
생과 사가 없는 줄 알면 생사를 뛰어넘을 것이 없어 즉시 열반에 듭니다.
꿈을 꾸면서 강도가 있고 강도를 쫒아주는 은인이 있다는 생각 안에서는
강도로부터 도망가서 은인의 집에 숨는 것으로 그 괴로움을 해결합니다.
그래서 쫒길 때는 괴롭더니 숨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아까는 힘들더니 지금은 편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눈을 딱 떠버리면 쫒아오는 강도도 없고 구해주는 은인도 없고, 또 괴로워할 일도 본래는 없었습니다.
이름하여 괴로웠는데 눈을 뜨니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지, 본래는 괴로워할 일 자체가 없는 것이니,
눈을 떴든 눈을 못 떴든 관계없이 괴로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강도가 쫒아온다 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중에도 사실 괴로울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
괴로워할 일이 없으니 괴로움의 원인도 찾을 것도 없고 그걸 없앨 것도 없으니 없애는 방법도 필요없습니다.
괴로움이 본래 없는 줄을 알아버리면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괴로움의 소멸도 없고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는 것입니다.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 :
깨달았다 할 것도 없고, 깨달음에 실체가 없으니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불교를 잘못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산이 하나 있는데 한 사람은 동산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서산이라 하며 서로 싸웁니다.
이것이 범부중생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나와서 보면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게 법이다’ 이렇게 했는데,
그 법을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 이렇게 정답화 시킵니다.
‘이게 이 산의 진짜 이름이다’, 이렇게 정답화 하면 이것은 법집이 됩니다.
법집이 되면 누가 동산이라 하거나 서산이라 하면 그게 아니라면서 또 다투게 됩니다.
법집을 짓지 않으면 누가 동산이다 하면 저 사람은 산 서쪽에 살고 있구나,
누가 서산이다 하면 저 사람은 산 동쪽에 살고 있구나, 이렇게 금방 이해하고 다투지 않게 됩니다.
법은 부처님이 설하셨지만, 법집은 사람들이 갖는 것입니다.
즉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라는 것도 아닌 것이기에,
그 산은 무어라 이름할 수가 없고 무어라 정할 수가 없으니 '무유정법'이다, '공'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산은 동산도 서산도 남산도 북산도 아니라 그냥 공한 것입니다.
그냥 뭐라고 할 수가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산은 동산이라 해도 서산이라 해도 좋고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해도 좋습니다.
이게 제법이 공한 세계의 이치입니다.
법이 되고 법집이 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직 자기를 향해서 들으면 살아있는 가르침이 되고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데,
그것을 정답화 해서 남에게 적용하면 이미 법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정형화하고 남에게 적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으니, 법이 금방 법집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우리는 법에 대한 집착도 놔야하고, 법을 그대로 살아있는 법으로서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제44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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