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강에서 계속)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 현상 = 화작(존재/실천)
사법계, 리법계, 리사무애법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법계에서는 조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니 물에 안 빠지고 싶었지만 빠져서 괴롭고,
리법계가 방파제 안에서 노는 이유도 물에 안 빠지기 위해서이고,
리사무애법계에서 큰 배를 타거나 파도의 원리를 이용하는 이유도 물에 안 빠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는 물에 안 빠지는 것은 좋은 것이고 빠지는 것은 안 좋다 하는 것으로 세계를 나눕니다.
그러나 사사무애법계라는 것은 물에 빠진다, 안 빠진다하는 것 마저도 나누지 않습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물에 빠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빠진 김에 내려가서 해삼 전복 따고 진주조개를 주으면 되니,
어떤 것도 둘로 나누지 않는 세계가 사사무애법계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것을 원효대사의 삶에 견주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 삼국시대 후반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혼란기에 사셨던 분입니다.
속성은 설씨이고, 출신은 육두품으로 귀족출신이지만 왕족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원효는 화랑이 되었고,
전쟁에 나가서도 큰 공을 세워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은 전투에서 크게 졌을 뿐 아니라 가장 절친한 친구마저 잃게 되었는데,
친구를 땅에 묻고서 복수를 다짐하던 원효는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지금 적들은 기쁨에 가득 차 잔치를 벌이고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지난 날 내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그것은 한량없는 기쁨이었지만,
그때 그들도 친구의 무덤가에서 한을 품고 우리에게 복수를 다짐하였을 것이다,
같은 일을 두고서 한 편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슬픈 일이 되는 것이니,
무엇을 옳다 하고 무엇을 그르다 해야 하는지, 세상의 모든 일들에 의문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에 원효는 탄탄대로 열려있는 출세의 길 대신 머리를 자르고 스님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원효는 어느 절에 들어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해서 스님이 된 게 아니라,
스스로 삭발을 하고 자기 집을 ‘초개사’라 이름 붙이고 중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스물아홉이니 당시로 보면 늦게 출가한 편입니다.
절친한 승려 도반인 의상대사(21살)보다는 8살이나 많습니다.
스님이 된 후, 그는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경전도 열심히 공부하고, 도를 구하기 위해 물불을 안가렸는데,
원효에게는 출가하기 이전의 세계가 ‘사법계’라면 출가한 이후의 세계는 ‘리법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양이 안차서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하고,
사촌동생인 의상과 같이 육로로 유학길을 떠났는데,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붙들리게 됩니다.
그들은 첩자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한 병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을 합니다.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또 유학을 시도합니다.
이번에는 서해안쪽으로 가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고자 길을 나섰는데,
하루는 날이 깜깜해지자 동굴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동굴인 줄 알았던 그곳은 무덤이었습니다.
당시 백제의 무덤은 횡혈식으로, 지상에 무덤을 만들고 문도 달았습니다.
그러니 무덤 안은 비를 피하기도 좋아 나그네나 떠돌이들은 그 무덤 속에서 자곤 했습니다.
한밤중에 목이 마른 원효는 더듬거리니 바가지 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 물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고구려 무덤 같은데 가서 보면 무덤 안에 물방울이 많이 떨어지는데 그걸 받아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날이 밝아서 봤더니 자기가 물을 받아먹은 것이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입니다.
그 해골을 보는 순간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리며 구역질을 하고 마침내 토하고 말았습니다.
어제 밤에는 그렇게 달고 맛있었는데 아침에 해골바가지를 보는 순간 구역질이 난 것입니다.
그 순간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물에 있는 것도 바가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마음에 있구나’,
일체가 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짓는 바다)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경전(화엄경)의 문구로서가 아니라 실제 몸으로 확연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일체가 다 마음에 있는 것이니 중국에 갈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법이 중국 땅에 있거나 신라 땅에 있는 게 아니고, 만법이 다 마음 가운데 있다,
분별을 일으키면 만상이 벌어지고 분별을 내려놓으면 제법이 공하다,
이렇게 깨우침을 얻은 원효는 유학 대신 서라벌로 되돌아와서 분황사에 기거하며,
수많은 경을 읽고 주석서를 쓰고 강론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존경 받는 학승이 되었는데,
함께 떠났던 의상은 유학을 다녀와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화엄종을 전하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는 중국에서 공부하고 온 스님들이 많은 종파를 열었는데, 그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근데 원효가 각 경들의 종료(요지)들을 뽑아서 비교해 보니까 다툴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인천사람은 동으로, 수원사람은 북으로, 춘천사람은 서로 가라, 이런 것들을 모아놓은 게 경전입니다.
동으로 가라는 게 화엄경이라면, 서로 가라는 것은 아함경이고, 북으로 가라는 것은 정토경인 것입니다.
각 종료들이 서로 다른 게 아니고 서로 다른 목적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은 다 깨달음의 길, 부처되는 길을 설명하고 있으니 다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입니다.
대승사상을 가장 깊이 잘 아는 분으로 중론을 지은 인도의 용수보살을 들지만,
그보다도 더 뛰어난 저술이 원효의 십문화쟁론입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쓴 글은 뒤에는 ‘소’라 붙이고 보살이 써야 ‘론’을 붙이지만,
원효의 저술들은 워낙 훌륭하여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처럼 뒤에 ‘론’을 붙였습니다.
단, '대승기신론'만은 원래 책이 ‘론’이니까 주석서는 ‘대승기신론소’라 했습니다.
이런 원효이기에 중국에서는 ‘원효대사’ 대신 ‘원효보살’이라 칭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떨치고 보살의 세계를 마음껏 설법하고 글로 표현하고 논의했던 시대,
이때가 흔히 말하는 ‘원효의 전성시대’였습니다.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만법이 다 마음 가운데 있다는 걸 깨달은 후,
그 수많은 저술들을 남겼던 학승으로서의 원효의 삶은 ‘리사무애법계’라 할 수 있습니다.
원효가 당대 최고의 스님으로 명성을 날리며 뭇사람들로 부터 존경 받고 있을 때,
‘대안(大安)’이라고 불리는 스님은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풀로 엮은 움막집에서 살며
어미 잃은 새끼나 늙고 병든 산짐승들을 보살펴 주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대안, 대안이로다!(크게 편안할지어다!)’ 라고 외치고 다녔으므로,
그냥 ‘대안스님’이라고 불렀을 뿐,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자장율사처럼 계율이나 행정체계를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는 분들도 있고,
의상처럼 그것을 학문적으로 깊이 닦으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분들도 있고,
그냥 아무런 형식도 갖지 않고 민중과 더불어서 사는 대안대사 같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효는 걸승인 대안스님을 길거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대안스님은 ‘이보시게 원효, 나와 함께 가볼 곳이 있는데...’ 하며 앞장서서 걷습니다.
원효가 무엇에 홀린 듯 대안을 따라 서라벌 북쪽으로 흐르는 북천내를 건너서 도착한 곳은,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창녀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 동촌 마을이었습니다.
대안은 평소부터 잘 아는 듯한 술집으로 들어가면서 ‘주모, 여기 귀한 손님 모시고 왔으니 술 한상 잘 봐오시게’라고 외칩니다.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성안에서 왕과 왕족, 귀족과 지식인 등, 상류층 인사들과 교유하고,
항상 상객으로만 대접받던 원효는 천하고 더러운 그 자리가 불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러자 돌아가는 원효의 등 뒤에서 대안스님이 한 마디 합니다.
‘이보시게 원효,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여기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인가!’
분황사에 돌아와서 며칠이 지났지만, 등 뒤에서 던진 대안의 외침이 지워지지 않고 귀에서 계속 맴돕니다.
인식으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천하고 귀한 게 둘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다 깨우치고 생사가 둘이 아니고 색공이 둘이 아니다라고 얘기 했지만,
결국 경계에 부딪혀서는 귀와 천을 나누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나누고,
또 더러운 것을 멀리하고 깨끗한 것을 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요’
대승불교 사상이라는 게 다 보살사상이고, 보살은 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 것인데,
원효는 대승불교의 이론과 주장은 폈지만 스스로의 행동과는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깨우쳐 주고 보살펴 줘야 할 사람은 왕족과 귀족이 아니라, 빈천하게 사는 중생이라 생각한 원효는,
모든 명성과 지위를 버리고 분황사를 떠나 구제해야 할 중생들이 있는 동촌을 다시 찾아가지만,
그곳 사람들은 원효와 함께 어울리려고 하기는커녕 마주하기조차 피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원효가 자기들 곁에 있는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챈 원효는 자신의 명성마저도 벗어 던지기 위해 가장 비천한 일을 찾다가,
아무도 모르게 신분을 숨기고 강천사라고 하는 큰 절을 찾아가서 부목살이를 시작합니다.
부목이란 밥하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설거지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천한 위치이기에,
부목들을 대하는 스님들은 대개 하인을 부리듯 하대를 하며 무시하였습니다.
그런 부목살이이지만 적당히 눈치보면서 꾀부리고 게으름 피우는 다른 부목들과는 달리,
원효는 정성껏 일할 뿐 아니라 일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서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 절에는 ‘방울스님’이라 하는 키가 작고 볼품없고 모습조차 괴이한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밥을 안 먹고 숭늉이나 누룽지 같은 찌꺼기를 먹고 행동조차도 어린아이와 같아서,
스님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심지어 부목들에게서도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항상 방울을 흔들고 다녔다고 해서 방울스님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원효대사도 방울을 흔들고 다녔습니다.
원효는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식사를 하지 않았으면 밥을 차려 주기도하고 아플 때면 보살펴 주는 등
다른 부목들과는 달리 방울스님을 특별히 챙겨주고 정성을 기울여서 잘 모셨습니다.
어느 날 스님들이 경전 해석을 두고 양편으로 갈라져 갑론을박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옆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원효가 들으니 얼토당토 않기에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게 됩니다.
그러자 논쟁하던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세하여 원효를 야단을 칩니다.
무지랭이 부목 따위가 자신들의 토론에 끼어든 것 자체로 상당히 기분이 상한 스님들은 토론을 파하고,
조실스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자 조실스님은 원효가 저술했던 ‘대승신기론소’를 건네줍니다.
법당에 돌아 온 스님들이 그 책을 보니 그간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책 속의 내용과 법당 청소를 하던 부목이 던진 말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자 스님들은 지금까지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 부목의 행동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고,
다른 부목들과 달리 뭔가 이상하고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부르게 됩니다.
원효라는 때를 벗기위해 부목을 택했지만 스님같은 언행으로 말미암아 신분이 탄로났음을 깨닫자,
원효는 절에서 몰래 빠져나가기로 작정하고, 한밤중에 짐을 챙겨 조용히 대문을 밀고 막 나가려고 하는데,
문간방에 사는 방울스님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는 ‘원효, 잘 가게’하면서 방문을 탁 닫아 버립니다.
그 순간 원효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크게 깨닫게 됩니다.
원효대사의 눈에는 거기 있는 모든 스님들이 다 보였지만 그들은 원효를 보지 못했습니다.
원효대사는 하심한다고 갖가지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대자대비심을 갖고 보살행을 했는데,
방울스님은 원효대사가 보살행 하는 것을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늦게 가서 밥 달라고도 하고 욕도 하며 떠보았는데, 원효대사 눈에는 방울스님이 안보였습니다.
방울스님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서 밝게 보는 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원효는 행색이 초라하고 볼품없기에 불쌍하다 여기고 잘 돌봐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를 중생이라고 스스로 규정을 해놓고 또 중생을 구제한다고 열심히 보살행을 했던 것입니다.
방울스님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상을 정하고, 또 구제해야 한다는 상을 짓고나서,
그에게 보살행을 베푼다는 상에 집착했는데 지금 그 상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제35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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