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4. 반야심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제30/31강 사법계, 리법계, 리사무애법계

상원통사 2015. 10. 27. 21:24

(~~ 제29강에서 계속) 

 

사법계(事法界) : 현상계

우리들의 인생을 화엄경에서는 네 가지 법계관(사법계관, 四法界觀)으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첫째가 사법계(事法界)인데, 이것은 차별현상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각각 고유한 자기의 모양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만법(만상)이라고 합니다.

그 각각은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아는 것이 범부중생의 경험의 세계, 꿈속의 세계입니다.

 

사법계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는데 끊임없이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서,

배가 뒤집어지고 바다에 빠져서 파도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갖가지 경계에 끄달려서, 그 경계로 인해 화를 내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고 방황하면서 허우적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조금만 정신차리고 차별현상계를 관찰해보면, 각각이 다 별개가 아니라 거기에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을 찾아 들어가 보면 만상이 일상으로, 만법이 일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리법계(法界) : 본질계

만법이 일법으로, 만상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세계가 본질의 세계입니다.

이것을 리법계(理法界)라 합니다

이것은 파도에 휩쓸려서 허우적대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파제를 단단히 막는 것과 같습니다.

즉 계율을 굳건히 지키거나 세속을 떠나서 깊은 숲속에서 안온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큰 눈으로 보면 이 사람들은 큰 호수에 갇혀있는 것이고 계율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을 이 차별현상계에 다시 내놓게 되면 똑같이 차별현상계에 빠져버립니다.

그것은 진정한 해탈,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차별현상계에서는 이것은 생이고 저것은 사다, 이렇게 생이 있고 멸이 있는데

본질의 세계는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생멸이 없는 세계입니다.

사법계(범부중생)의 사람들은 세상을 생과 멸의 세계로 나누는데,

리법계의 사람들은 이 세계를 생멸이 없는 세계와 생멸이 있는 세계로 나눕니다.

생멸이 있는 세계를 세간(속세), 생멸이 없는 세계를 출세간(진제)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누는 것도 큰 눈으로 보면 또한 분별입니다.

 

생멸이 있는 세계가 색의 세계라면 생멸이 없는 세계는 공의 세계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생멸이 있는 세계()와 생멸이 없는 세계()가 다르지 않다(不異)고 했습니다.

이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이요, 생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1의 세계는 번뇌의 세계()이고 제2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인데,

3의 세계는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닌 세계인 것입니다.

 

리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 현상 = 본질(존재/인식)

이것이 리사무애법계, 리와 사가 둘이 아니라서 걸림이 없고 나눠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보살의 경지이며 보살의 법계입니다.

범부중생이 바다에 나왔다가 파도에 휩쓸려서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이 사법계의 세계이고,

그것이 두려워서 방파제를 쌓고 고요하게 사는 것이 리법계의 세계라면,

방파제를 허물고 생멸의 바다에 나와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리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리사무애법계는 엄청나게 큰 배를 타고 나가거나 파도를 이용해 윈드서핑을 하는 것처럼,

업의 물결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게 아니라 업의 물결의 주인이 되고 그 업의 힘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중생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입니다.

보살이 중생의 세계에서 원을 성취시켜서 성불의 길로 나가는 것이 리사무애법계입니다.

 

강 가까이에 집을 짓게 되면 물은 구하기가 쉽지만 홍수에 떠내려가기도 쉽습니다.

반대로 강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지으면 물 뜨러 다니는데 힘이 많이 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되는데, 범부중생은 물 뜨는 것만 생각합니다.

반대로 홍수를 피하려고 산꼭대기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홍수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농사짓기도 힘들고 갖가지 괴로울 일이 많이 있습니다.

 

술 먹고 싶다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싶다고 담배 피우며 거기에 습관이 들고 중독이 되어 평생 거기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래서 이것도 안 먹고 저것도 안 먹고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는 것이 산꼭대기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때 떠내려가지도 않고 수고롭지도 않는 적당한 곳에 집터를 장만하는 이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너무 물만 생각하여 가까이 가거나 너무 두려워하여 너무 멀리 가는 것이 양변입니다.

그 양쪽을 버리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치를 잘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우물을 쉽게 찾는 데에만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원하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서 이렇게 될 거다, 이렇게 돼야 해하며 살다가,

그게 뜻대로 안되어서 괴로운 것입니다.

또는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연을 다 끊어버리고 사는 것을 수행이라 생각하고,

세속에 사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수행하는 게 힘들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사가 무애한 세계는 바로 여러분들이 사는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니까 왜 다르냐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 처음부터 파도가 있다는 걸 알고 나가는 것과 같으니,

애초에 큰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크게 만들어서 나가거나, 파도를 이용해서 탈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갑니다.

 

결혼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업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사람들은 뭘 좋아하는지,

인간 간에 갈등은 왜 생기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이미 알고 나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남 쳐다볼 것 없이 자기만 잘 쳐다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좋아하듯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잘해주기는 하는데, 자기 방식대로만 잘 해주면 싫습니다.

그러니 나도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내 방식대로 잘 해주려 하면 상대편이 속박을 느끼거나 귀찮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고 찬찬히 살펴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이 세상 속에서 행해 나가면 조용한 것보다 파도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주니 돛을 올리면 배가 더 잘 나갈 것이고, 파도가 크니 윈드서핑을 해도 더 재미있을 것입니다.

거친 파도에 대비하려면 배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하고,

더 크게 만들다 보니 나만 타는 게 아니라 남까지 태워도 끄덕없습니다.

이런 원리들을 잘 생각하고 하면, 자기만 구제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태워가도 끄덕없는 그런 길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리사가 둘이 아닌 세계, 리사무애법계입니다.

 

(제32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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