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25강에서 계속)
불구부정(不垢不淨) :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
불구부정에서 구(垢)는 티끌 구자로 더럽다는 뜻이고, 정(淨)은 깨끗할 정, 깨끗하다는 뜻이니,
불구부정이란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념에 의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상은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도 신성하다고 여기고,
스님이나 목사님이나 신부는 신성한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천민은 부정하고 여자는 부정하고 절에서 고기는 부정한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성스러움과 성스럽지 못함, 성스러움과 부정 타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재수가 좋게 되고 어떻게 하면 재수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성스러움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로 먹은 물은 전날 밤이나 다음날 아침이나 똑같은 물이었지만,
깜깜한 데서 먹을 때는 감로수였고, 밝은 데서 보는 물은 구역질나고 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원효가 깨달은 것은 깨끗한 것과 더럽다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닌데 그것을 깨끗하다니 더럽다느니 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여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실제로 있다고 착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재소에 큰 나무토막이 굴러다녀 사람들이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하고 거기에 오줌도 눕니다.
그런데 누가 그걸 가지고 가서 조각을 해서 부처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 부처님을 여기에 모시면 그건 성스러운 것입니다.
나무토막은 성스럽지 않은 것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변했는데, 그럼 언제부터 성스러워졌을까요?
제재소에 있을 때는 분명히 성스럽지 않았는데, 조각가의 집으로 옮기는 중간에 성스러워졌는지,
조각가가 조각을 하고 있는 도중에 성스러워졌는지, 조각을 끝내니까 성스러워졌는지,
절로 모셔오니까 성스러워졌는지, 불단에 올리니까 성스러워졌는지, 점안을 하는 순간에 성스러워졌는지,
언제 성스러워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히 이쪽은 성스럽지 않았는데 이쪽은 성스러운 게 되었으니 도대체 어느 순간부터 성스러워졌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떨어진 나무토막이 두 개 있습니다.
귀신이 나타나자 나무토막 두 개를 열십자 모양으로 놓고 새끼줄로 묶어 귀신에게 보이니 귀신이 도망갑니다.
그 나무토막은 어느 순간부터 성스러워졌을까요?
두 개의 나무토막을 손에 쥘 때부터, 열십자로 놓을 때부터, 새끼줄로 묶을 때부터, 다 묶어서 들 때부터일까요?
그 본질은 본래부터 성스럽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다만 공할 뿐입니다.
성스럽다느니 부정하다느니 하는 것은 우리들의 관념이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면 두 가지 증상, 자유로워지거나 허무해지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면 정과 부정에 늘 속박을 당하고 있다가 일순간에 해탈해버리는 사람이 있고,
늘 잡고 있었는데 잡을 대상이 없어지니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 남아 허전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잡을 대상이 없어졌으니 잡아야 된다는 생각도 없어져야 해탈을 하는 것인데,
잡으려고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니다가 잡을 것이 없는 줄 알았으니 모든 방황이 끝나야 되는 것인데,
저걸 잡아야 된다고 이제까지 알고 있다가 잡을 필요가 없다, 잡을만한 게 못된다 하니,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멍해지고 허망해지는 것입니다.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성스러운 것도 없고 부정한 것도 없다, 이건 굉장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더 확대하면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하지만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다,
옳으니 그르니 하지만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
아름답다 추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도 없고 추한 것도 없다,
약이니 독이니 하지만 그건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다, 이렇게 됩니다.
사람에게 장점이 있다 단점이 있다 하는데 사람에게는 장점도 없고 단점도 없습니다.
그냥 그런 성질, 그런 특징이 있을 뿐이니, 여러분들이 공부를 할 때도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법륜스님은 훌륭한 사람이라 해야 할까 나쁜 사람이라 해야 할까요?
법륜스님은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알아야 바로 아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야 우리들의 관계가 평등해지고 우리들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저 앞에 있는 불상도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불교인이 볼 때는 성스럽게 보이고 기독교인이 볼 때는 부정하게 보입니다.
기도하면 들어줄 거라고 생각할 때는 갖가지 영험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다가,
자기 욕망대로 안 되면 ‘에이, 천하 쓸 데 없는 것’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기로부터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식당에 들어갔는데 스님이 거기 앉아서 고기를 먹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중이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내 눈에 보기 싫은 겁니까?
그럼 그 중이 사복입고 가발 쓰고 앉아서 고기를 먹으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또는 중이 아닌 사람이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거기 앉아서 고기를 먹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런 것은 실제로 그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다 자기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문제이고, 깨끗하다느니 더럽다 하는 것들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늘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깨끗하고 더럽고, 아름답고 추하고, 선하고 악한 것들은,
사실 알고 보면 다 자기가 만드는 것이고 꿈과 같은 것입니다.
뭐가 보여서 보는 게 아니라, 눈감고 누워서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근데 우리는 한 생각 잘못 일으켜서, 옳으니 그르니 아름답니 추하니 선하니 악하니 모양을 짓고 그 모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로잡히니까 실제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고, 거기에 애증을 일으키고 집착하게 됩니다.
제가 법문을 할 때도, 자기 맘에 들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자기 맘에 안 들면 고개를 흔듭니다.
여러분들은 법문이 좋으면 끄덕거리고 법문이 안 좋으면 고개를 흔든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법문이라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고개를 흔드는 것입니다.
기준은 자기한테 있어 자기 생각에 맞으면 훌륭하고 좋다고 하고, 안 맞으면 그날부터 원수가 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보니까 줏대가 있고 박력도 있어 그런 점이 좋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근데 밖에서 남한테 줏대가 있고 박력이 있는 것은 보기가 좋은데,
집에서 같이 살면서 나한테 줏대가 있고 박력이 있다는 것은 고집불통이란 말입니다.
내가 장점이라고 좋아했던 것도 나중에 보면 단점이고 그것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나를 감싸주고 내 의견을 들어주니 사람이 부드러워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같이 살아보니 모든 사람에게 다 부드럽고 유해서,
돈을 벌어도 다 남 줘버리고 온갖 여자한테 다 부드럽고 유하니 도저히 같이 살지 못할 정도입니다.
스님과 상담을 해보니 자기 고민을 다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감싸줘서 너무 좋았는데,
근데 알고 봤더니 딴 여자한테도 다 그러니 나중에는 원수가 됩니다.
이 스님은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일만 하니 너무너무 훌륭하여 좋아했는데,
자기를 보고서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너무너무 냉정하니 나중에는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에는 장점도 없고 단점도 없고 훌륭한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그런 줄을 깨치면 천하에 자유로워지는 데, 여러분들은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남편에게 집착을 하다가, 실망을 하면 상담하는 사람한테 가서 거기에 집착했다가,
돌고돌고 돌아 절에 와서 스님하고 상담하다가 스님한테 집착을 하는 겁니다.
이때는 스님이 아니고 남편 대용품인데, 그 대용품이 마음대로 안 되면 나중에 원수가 됩니다.
집착을 끊지 않으면 절대 자유로워지지 못 합니다
우리 수행문에도 있듯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안심의 도를 구하기 위해서 이 절 저 절 다니고 이 스승 저 스승 구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천한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습니다.
양반이라고 귀한 것도 아니고 상놈이라고 천한 것도 아니고, 남자라고 성스럽지도 않고 여자라고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남자하고 하룻밤 안잔 여자는 성스럽고 남자하고 하룻밤 잔 여자는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게 불구부정인줄 알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들을 부정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천하가 여러분 몸을 어떻게 해도 몸뚱이가 더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와서 쓰다듬어주고 부처님이 껴안아 줬다 해도 성스러워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 무슨 경험을 해서 나는 몸이 더러워졌니 이런 생각도 어리석은 생각이고,
나는 나이가 오십이 되도록 아직도 결혼 안하고 살고 있으니 순결하다는 생각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다 세상의 윤리 도덕적 생각이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해탈의 길은 바로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입니다.
여기가 해방의 길이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28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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