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4. 반야심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제24/25강 생한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니다

상원통사 2015. 10. 13. 21:20

(~~ 제22/23강에서 계속)

 

실제의 세계는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한다느니 멸한다느니 하는 것도 착각에서 일어납니다

어린아이에게 얼음구슬을 주었더니 방에서 갖고 놀다가 놔두고 밖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돌아와 보니 구슬은 없어지고 그릇에 물만 담겨있습니다.

이때 아이는 엄마, 내 구슬이 없어졌어!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가 볼 때는 얼음은 있다가 없어지고 물은 없다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긴 시간 동안 관찰을 했다면 얼음이 물로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짧게 부분적으로, 즉 얼음일 때 한 번 관찰하고 다시 물일 때 한 번 관찰했기 때문에,

얼음과 물이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는 말은 얼음과 물은 다른 것이라는 말입니다.

얼음은 얼음으로서의 실체가 있고 물은 물로서의 실체가 있어 서로 독립된 별개의 것이다,

얼음은 늘 얼음이고 물은 늘 물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실체가 있다는 것과 변하지 않는다는 아견과 상견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아견과 상견을 갖게 되면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 하는 견해, 즉 생멸의 관이 생깁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긴 시간동안, 있는 그대로를 보면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됩니다.

얼음은 항상 얼음으로 존재하고 물은 항상 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니 항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얼음은 얼음이라고 할만한, 물은 물이라고 할만한 별개의 고유한 실체는 없습니다.

얼음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겨난 것도 아니라 다만 형상이 바뀌었습니다.

그 형상에 집착한 사람에게는 죽고 태어나고, 사라지고 생겨난 것처럼 인식되지만,

실제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생했다 하지만 생한 것도 아니고, 멸했다 하지만 멸한 것도 아닙니다.

생했다 멸했다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을 때 일어나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고 있었으면 그런 잘못된 인식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존재가 생겨났다는 것은 무엇인가로부터 변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니,

이미 변하여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는 생하기는 하지만 멸하지 않는 것, 있기는 있는데 없어지지는 않는 것을 바라는데,

생하면 반드시 멸하게 되어있고, 있다면 반드시 없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생하지 않으면 그것은 멸하지도 않고, 처음부터 없다면 있다는 인식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한다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든지, 생한다 하고 멸한다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견과 상견으로 어떤 사물을 잘못보았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눈이 어두워서 생긴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봐도 생기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볼 지라도 이런 착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즉 부분적으로 관찰하고 순간적으로 관찰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이 너무 작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구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지구 밖으로 나가서 보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닙니다.

생했다 멸했다 하는 것도 이처럼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눈을 뜨고 사물을 전체적으로 제대로 관찰해보면 그것은 생도 멸도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근데 우리는 있다 없다를 단정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컵을 보며, 왜 여기 컵이 있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느냐,

죽는 것을 보고 왜 죽는 것도 아니라 하고, 생기는 걸 보고 왜 생기는 것도 아니라고 그러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들이 생멸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해가 동산에서 뜨니 그 산이 동산이라 하는데 그 마을에서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동도 없고 서도 없고 남도 없고 북도 없습니다.

자기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쪽을 동이라 그 반대를 서라 부를 뿐입니다.

 

여기 한 물체가 있습니다.

있으니까 인식이 되는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은 텅텅 비어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실제의 세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꽉 차있는 것도 아니고 텅텅 빈 것도 아닌 것입니다.

존재는 변하는데, 그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측면만 보면서 영생불멸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씨앗을 하나 심으면 그것이 자라서 꽃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때 씨앗은 시작이라는 말이고,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곧 씨앗이니 열매를 심으면 자라서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습니다.

한 사이클만 잘라서 보면 여기가 출발점이고 저기가 종착역이다,

여기서 시작이 되었고 저기서 끝이 났고, 여기서 태어났고 저기서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사이클과 연결해서 보면 이쪽의 종착역과 저쪽의 출발점은 같은 점입니다.

씨앗은 시작이고 열매는 결과이니 서로 정반대 개념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닌 그냥 한 존재라 해야 옳습니다.

거기에 금을 그었기에 씨앗이 생기고 열매가 생기고, 시작이란 말도 있고 끝이란 말도 있습니다.

금을 긋지 않으면 시작이란 말도 없고 끝이란 말도 없습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 :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작이 있다 끝이 있다 하지만 실제의 세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고 끝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면 어떻게 시작이 되고 어떻게 끝나느냐, 이런 사고는 필요가 없습니다.

시작이 있다 끝이 있다, 즉 시종의 분별이 있을 때 분별 위에 나타난 게 창조와 종말입니다.

무시무종,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면 창조론이니 종말론이니 하는 말은 생겨날 필요가 없습니다.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있다고 해야 밥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하는 시간적인 질문이 나오지,

모래로 밥이 안 되면 애초에 밥할 생각도 안하고 밥이 몇 분만에 될까이런 생각이 안 일어납니다.

소가 신성하다 해야 왜 신성하냐는 질문이 일어나지 소가 신성하지 않다면 왜 신성하냐는 질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이 일어나지,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했다는 생각은 시작과 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시작과 끝이 없다라고 사물을 보는 사람에게는 창조라는 말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질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질문이 어떤 전제 위에서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중국귀신은 외다리로 뛰고, 한국귀신은 다리가 없고, 서양귀신은 다리 두 개라고 합니다.

귀신이 있어야 어느 귀신이 더 잘생겼느냐 더 못생겼느냐, 어느 귀신이 진짜냐 가짜냐,

어느 귀신이 착하냐 악하냐 이런 얘기가 나오지,

귀신이 없다면 다리가 하나 달렸니 두 개 달렸니 하는 질문은 생기지 않습니다.

착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질문이 안 일어납니다.

질문을 할 줄 모르거나 질문은 있는데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질문 자체가 일어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일뿐만 아니라,

비유비무(非有非無),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있는 눈으로 사물을 바르게 본다면 이런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모든 괴로움은 없어지게 됩니다.

 

 

(제26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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