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강에서 계속)
우리들의 감각의 대상(색)만 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감각의 대상과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느낌(Feeling)도 영원한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느낌도 변합니다.
어떤 느낌이 처음엔 호(好)의 느낌이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苦)가 되는게 있습니다.
아편을 먹으면 처음엔 좋은 느낌이었는데 나중엔 나쁜 느낌이 되고,
뭘 씹었더니 처음에는 썼는데 더 씹으면 고소한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처음 코 끝에 스치는 것은 좋았는데 자세히 맡아보면 역겨운 게 있고, 역겨운데 조금 더 맡아보면 좋은 게 있습니다.
냄새 자체, 소리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소리에 시끄러운 소리가 있는 게 아니라, 듣기 싫을 때 시끄럽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리는 시끄럽고 좋은 게 없고, 소리는 다만 소리일 뿐입니다.
자기 귀에 거슬리면 시끄러운 소리가 되고, 자기 귀에 좋게 받아들여지면 아름다운 소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음악은 아름다운 소리고 찍~ 하는 것은 시끄러운 소리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라난 환경에 따라 시끄럽다고 느끼는 그런 소리를 좋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소리를 아름답지 않게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는 세상 사람이 다 공통적으로 느낀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베토벤의 소리가 듣기 좋다고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수가 좋아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업식에서 볼 때 아름답게 느껴지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일 뿐,
또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 그것은 더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장구를 치면 옛날 사람은 어깨가 덩실덩실하는데 요즘 애들은 장구소리를 시끄럽게 느끼고,
드럼을 치면 어른들은 시끄럽다고 하는데 애들은 어깨가 덩실덩실합니다.
그걸 귀에 꼽고 공부하는 것을 어른이 보면 이해를 못하지만 애들은 그렇게 잘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도 귀에 들리는 소리에도 코에 스치는 냄새에도 혓바닥에 느끼는 맛에도 몸에 느끼는 감촉에도,
다 이미 자기 느낌을 토대로 또는 우리들의 공통 느낌을 토대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부드럽다는 것도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들의 감각으로 피부를 만지면 부드럽지만, 세균의 입장에서는 산골짜기 오르내리는 것처럼 거칠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 다른 것인데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그것을 진리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태어나서 얼굴 노란 사람만 보면 인간은 얼굴이 노란 게 정상이라 생각하지만,
검은 사람들에게는 검은 게 정상이고 흰 사람들에게는 흰 게 정상입니다.
이렇게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는 공통의식이 상식이 되어버리고,
상식이 되어버리면 그게 진리처럼 되어버리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느낌(受)도 공한 것이니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가 되고,
우리들의 생각(想)도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니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이렇게 됩니다
우리들의 행(行)도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니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이 되고,
우리들의 의식(識)도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니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이 되어서,
색만이 아니라 수·상·행·식도 다 공하다(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즉 오온이 모두 공하다,
공한 것은 모양이나 형상이나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업식(분별)도 공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지만 그 가치관마저도 변하는 것입니다.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렸니 하는 것도 항상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사귀어보니 한 때는 나쁘다가 다른 때는 좋다가, 또 나쁘다가 또 좋다가 이렇게 변합니다.
옛날 기억에는 나빴는데 요새 보니 좋은 사람이 있고,
옛날에는 좋았는데 요새 보니 형편없는 사람도 있듯이 사람이 항상하는 게 아닙니다.
즉 ‘식불이공 공불이식’인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과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부지런하지만 더 부지런한 사람 옆에 갖다 놓으면 제일 게으른 사람이 되고,
크다 하지만 더 큰 사람들 옆에 데려다 놓으면 제일 작은 사람이 됩니다.
자체가 변해서 그리된 게 아니라 비교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볼 때 젊을 때보다 지금은 변해서 좋다 또는 싫다 이럴 수도 있지만,
같은 사람을 같은 날 보면서도 보기 싫을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분별에 맞으면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고 자기의 분별에 안 맞으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없습니다.
전두환이 나쁘다 하지만 자기한테 잘해주면 전두환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사람도 있고,
김대중이 좋다 하지만 '김대중, 그놈 미친놈이고 나쁜 놈이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두고도 좋다 하는 사람 나쁘다 하는 사람도 있고, 선하다 하는 사람 악하다 하는 사람도 있고,
똑 같은 물건을 놔놓고 독이다 하는 경우도 있고 약이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 같은 것을 보면서도 거름이다 똥이다 하기도 하고, 약이다 밥이다 하기도 하니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입니다.
물질만 공한 게 아니라 우리들의 느낌도 선악관도 가치관도 의지도 생각도 분별도 업식도 모두 다 공합니다.
각자의 업식은 온갖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합니다.
변화한다 하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법칙입니다.
'공하다' 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고, 제행무상도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다 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허무하다’가 아니고, ‘그냥 없다,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종은 종으로서의 종자가 있다고 하면 ‘유’이고 ‘색’이지만, 종은 종이라고 할만한 종자가 없다 하면 ‘무’이고 ‘공’입니다.
그러니 종의 신분에 있는 사람은 ‘종은 공하다’ 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공하다 무하다 하는 것은 그냥 하나의 법칙입니다.
그걸 모르면 괴롭지만 알면 해방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해방사상을 만든 게 아닙니다.
그 실제 모습을 알면 우리는 종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은 종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양반은 양반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양반이 있어서 종이 있고 종이 있어서 양반이 있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니,
양반이 없어지면 종도 없어지고 종이 없어지면 양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 있는 것이지 종이라고 하는 종자도 양반이라고 하는 종자도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현재 있는 것을 종자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되고,
단독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알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영원한 게 아니라 변합니다.
내가 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니라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알면 우리는 고통과 속박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해방하기 위해서 이런 사상을 만든 게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되면 누구나 다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실체를 몰라서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고 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반, 남자, 가진 사람, 높은 사람에게는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있고 변하지 않아야 좋을 것입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하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 기득권을 버려야 진리를 보는 안목이 빨리 열립니다.
종이 ‘나는 종이다’ 하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깨달을 수가 없고,
양반이 ‘나는 양반이다’ 하는 우월의식을 가져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피해의식이나 그러한 우월의식도 놔버려야 빨리 진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중입네’ 하면 깨닫기가 어렵고, ‘우리는 뭐 신도라서’ 이러면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상이라도 상을 지으면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어도 본질에서 벗어납니다.
어떤 종교는 언어를 진리라고 그대로 규정을 합니다
한문에서도 보면 '無면 無, 空이면 空' 거기다가 절대적인 관념을 부어서 많이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획수를 따지고 그러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볼 때는 그런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지만,
안목이 열린 사람에게는 얼토당토 않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중생은 늘 그런데 현혹이 됩니다.
무엇인가 자기가 선점한 것에 집착하여, 양반이다 높은 중이다 남자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진리의 길,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본인도 못가고 남이 가는 것도 막습니다.
또한 나는 여자라서, 나는 신도라서 이렇게 열등의식도 또한 역사발전에 장애가 됩니다.
스스로 깨닫는데도 장애고, 남을 깨닫게 하는데도 큰 장애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도 큰 장애입니다.
‘종의 실체가 없다 양반의 실체가 없다’는 것은 종도 아니고 양반도 아닌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종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종 대신 양반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버리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도 죽여버려라,
이 때에는 부처라는 관념, 조사라는 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 어떤 관념이나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 공이라는 상도 지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사고를 바르게 하고 사물을 관찰하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남편 하는 걸 자기식대로 보고, 스님이 하는 말을 자기식대로 들으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만,
자기를 내려놓고 남편의 말을 가만히 듣고 남편의 행동을 가만히 관찰하고,
스님이 뭐라고 할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바로 진리의 길 깨달음의 길이 있습니다.
근데 보통은 다 자기 유리한대로 갖다 붙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화내지 마라’하면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남편에게 가서 그대로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의 진척이 없고 공부가 발전이 안됩니다.
오직 자기에게로 정해 법문을 듣고 자기에게로 향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남편이 귀찮고 잔소리하는 것도, 여러분들을 깨우쳐 주고, 관념을 깨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돌려야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요건 잘못했나 안했나’ 이런 정도로 생각을 돌려가지고는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건 틀림없다 할 때 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그래야 해탈의 길이 오고 얼굴에 가득 찬 화기가 빠지지 안 그러면 심술이 안 없어집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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