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강에서 계속)
색은 본질의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에겐 실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일어나는 착각이지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봤을 때 변하지 않는다거나 영원하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짧은 시간 동안 관찰하고서 그것으로 보편화 시켜 말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기둥같다, 배를 벽같다, 꼬리를 빗자루같다, 코를 뱀같다고 하듯이,
일부분의 설명으로는 비슷할 지라도, 그것은 코끼리 전체의 형상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 : <변화> 시간적 연기관(諸行無常)
색즉시공(色卽是空) : <연관> 공간적 연기관(諸法無我)
‘색불이공’에서는 ‘불이(不異)’라는 말을 써서 색이 공하다고 말했고(제행무상),
‘색즉시공’에서는 ‘즉시(卽是)’라는 말을 써서 색이 공하다고 말했습니다(제법무아)
소승에서는 무상(시간적 관점)과 무아(공간적 관점)로서 실체가 없음을 말했는데,
대승에서는 그 두 개를 합해서 그냥 ‘공(空)’이라고 했습니다
'공하다'는 것을 밝히려면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야 되므로,
‘불이’라는 말을 써서 시간적인 관찰, 제행무상을 설명하고,
‘즉시’라는 말을 써서 공간적인 관찰, 제법무아를 보임으로써 ‘색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논리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또한 ‘색불이공 공불이색’에서 보듯이 ‘색’과 ‘공’을 뒤집어서 한 번 더 말했는데
이것은 수학적인 증명법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A = B'임을 증명하라고 하면(A와 B가 같음을 증명하라고 하면),
‘A이면 B이다’를 증명하고 나서, 역으로 ‘B이면 A이다’도 증명해야 됩니다.
역이 성립하지 않으면 그것은 같은 게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이다’는 성립하지만, ‘동물은 사람이다’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사람과 동물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색이 공이 되려면, 색이 공과 같아야 하고 역으로 공도 색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 손을 보면 세포는 순간순간 계속 바뀌지만 손은 그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듯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어떤 일정한 형상을 유지하므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손은 썩으면 그 형체마저도 없어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손을 이루고 있던 세포들의 원자나 분자는 변하지 않고 결합만 바뀌어 있습니다.
이처럼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하는 것도 있고,
또 변화하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보면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색이라 하고, 변화하는 것을 공이라고 한다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같이 있는 것이니,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하므로 공하다고 할 수 있지만, 대승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변화한다는 것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도 진리가 아니고 변화한다는 것만도 진리가 아닙니다.
존재를 관찰해보면 변화 속에 변하지 않는 게 있고 변하지 않는 속에 변화가 있고,
그 변화 속에 또 변하지 않는 게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또 변화가 있습니다.
이런 게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좁게 보거나 시간적으로 짧게 보면서 변한다 또는 변하지 않는다는 단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데,
긴 시간동안 넓게 보면 존재의 참모습은 변화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변화한다고 말해도 맞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맞지가 않습니다.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극단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의 만물은 변하지 않는다, 이게 색(色)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 변한다, 이게 무적(無的) 입장입니다.
그러나 변화만 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속에 변하지 않는 게 있고 변하지 않는 것 속에 변화하는 게 있습니다.
존재라는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분별이 생기는 것이지,
존재 자체는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나있다, 이것이 대승의 공사상입니다
그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색과 다르지 않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공간적 관점에서 관찰해 보겠습니다.
공간적으로 관찰할 때엔 변화를 보는 게 아니라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 방 안에 바람을 넣은 고무풍선으로 빈틈없이 가득 채워봅니다.
이렇게 꽉 찬 것이 색입니다.
이렇게 고무풍선으로 가득 찬 것 같지만 고무풍선 속을 들여다보면 텅텅 비어있습니다.
풍선 속은 비어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풍선은 공기 분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공기분자 하나하나를 분석해보면 그 속은 다시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니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 방안은 텅 비어있다 해도 맞고 꽉 차있다 해도 맞는 것입니다.
대우주는 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먼지 알갱이 같이 작은 소우주들로 꽉 차있습니다.
그 소우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은 또 텅텅 비어 있습니다.
소우주가 텅텅 비어있는 줄 알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태양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태양은 수많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그 원자 속은 또 텅텅 비어있습니다.
이렇게 텅텅 빈 것들이 모여서 가득차고, 가득 찬 것들이 모여서 텅텅 비고,
텅텅 빈 것들이 모여서 가득차고 그런 것입니다.
가득 찬 것이 색이라면 텅텅 빈 것이 공입니다.
가득 찬 것이 곧 텅텅 빈 것이고, 텅텅 빈 것이 곧 가득 찬 것이니, 이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핏 관찰하기 때문에 있다 또는 없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존재는 꽉 차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텅 비었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유'라 해도 맞지가 않고 '무'라 해도 맞지가 않습니다.
유니 무니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부분만을 관찰하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존재 자체는 그걸 넘어서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공'입니다.
물질세계는 이렇게 시간적으로는 변화하고 공간적으로는 관계를 맺고 있어서 무상이며 무아입니다.
물질세계는 변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고,
변하지 않는 그 속을 보면 또 변화하고 있고 또 그 변화 속을 들여다보면 변화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물질세계는 서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물이 꽉 짜여져 있는 것 같아서 가득 찼다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텅텅 비어있고 텅텅 비어있는 줄 알았지만 그 속은 가득 차있고,
가득 찬 것의 속은 텅텅 비어있고 텅텅 빈 것들이 모여서 또 가득 차있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입니다.
'가득 찬 것을 들여다보니 텅텅 비었다', 이것은 ‘색이 공하다’는 되지만 ‘공이 색하다’는 안됩니다.
그러나 텅텅 빈 그걸 또 들여다보니 가득 차있더라 이러면 ‘공이 곧 색하다’가 됩니다.
텅텅 빈 것들을 모으면 가득 차있고 가득 찬 것들을 보면 텅텅 비어있고,
텅텅 빈 그 속이 또 가득 차있고 차있는 그 속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이래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색’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관찰해보고, 또 앞으로도 보고 뒤집어도 보아도 다 ‘공’한 것입니다.
(제20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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