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강에서 계속)
불교에는 많은 경전이 있는데 경전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씩 다르니
공부를 할 때 혼선이 일어나거나 오해할 수 있어 그 특징들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 가는 길은 인천사람에게는 동이고 수원사람에게는 북이고 춘천사람에게는 서가 됩니다.
그처럼 부처님은 서있는 사람의 위치에 맞게 설법을 하셨습니다.
즉 근기에 따라 방편이 설하셨는데, 이 근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여기 큰 산이 있고 그 아래 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끼리 누구네 땅이 세상에서 제일 넓다, 아니다 라고 서로 우김질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저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봐라’이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아함경입니다)
그 산꼭대기 올라가서 넓은 세상을 보면, 옳으니 그르니 안 따져도 저절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산봉우리에 올라 내려다보니까 일단 고뇌가 해결되고 분별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보니 더 높은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될까요, 부처님이 이 봉우리를 가리켰으니 여기까지만 올라야 될까요?
부처님이 손가락은 이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높은 곳에 올라가보라는 의미이니,
더 높은 곳이 있으면 더 높은 꼭대기에 오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 뜻을 이해하고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초기 불경인 아함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 봉우리를 가리켰으니 여기이지 더 높은 봉우리는 아니다,
이렇게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는 것이(문자에 집착하는 것이) 소승입니다.
아함경이 소승경전이 아니라, 아함경의 문자에 집착하면 소승이 되는 것입니다.
대승경전은 소승을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 생각은 버렸지만 경이라고 하는데 집착을 해서,
즉 땅만 보고 있다가 얼굴을 들어 위를 쳐다보기는 했는데, 해와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땅만 쳐다보지 말고 내 손가락 끝을 보라고 했더니,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정말로 손가락 끝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산봉우리 보란다고 그 봉우리만 보는 것이 법에 대한 집착, 법집입니다.
이렇게 집착을 하니 소승이 되는 것이지, 부처님이 소승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소승의 병을 고치려면 '손가락 보지 마', '그 산봉우리는 아니야' 이렇게 말을 해야 됩니다.
즉, 반야심경은 땅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손가락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소승이 법집을 일으켰으니 그걸 깨트리고 진리를 보게 하기 위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소승은 법집을 일으켜서 오온을 오해하고 12처 18계 12연기 4성제 8정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마치 산 중턱에 올라가 앉아서 여기서 세상 다 보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산중턱에 있으면 산 밑에 있는 것보다는 많이 보이니 중생보다는 낫지만,
산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더 멀리까지 볼 수 없으니 이것은 해탈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산중턱까지만 올라온 사람에게 '여기가 아니고 저리 가거라' 이렇게 말해야 되니,
마치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인 소승경전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처님의 말씀을 잘못이해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오온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오온설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을 위해 오온도 없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또 소승은 틀린 것이고 대승만 옳다 이러면 안됩니다.
법집을 일으켜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소승이라 하면,
그 소승의 법집을 깨트리기 위해서 그걸 부정하면서 더 바르게 가도록 한 것이 대승입니다.
즉 이 작은 봉우리를 아니라고 말하고 저 높은 봉우리로 가라 이게 반야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위해 반야부의 가르침은 근본교리(소승교리)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형식을 빈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님이 꼭대기에 가라 했으니 꼭대기에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꼭대기에 살면 사흘도 못되어 굶어 죽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꼭대기에 가서 보고 세계가 넓은 줄 알고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평지에 돌아와서 잘 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꼭대기에서 사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면 '내려 오너라' 이렇게 말해줘야 됩니다.
이것을 '올라가라 할 때는 언제고 또 내려오라고 그러냐'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글자에 매어가지고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이 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후반부 대승경전(법화경, 정토삼부경)에서는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내려오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정토삼부경에서 세속에 내려와 세상을 잘 만들라고 한 것을 속되라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떤 법문을 들어도 헷갈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함경을 공부하신 스님은 불자는 부처님의 말씀, 즉 경전에 근거해야 된다고 하실 것이고,
대승하시는 스님은 글자에 매이면 안되고 법집도 타파해야 되고 부처님 말씀도 떨쳐버려야 된다고 하실 것이고,
선불교하시는 스님은 경전 볼 필요가 없다, 지 마음 깨달으면 되지 다 쓸데없는 것이다, 불립문자라고 하실 것입니다.
화엄경하시는 스님은 일체가 유심소조라 극락도 천당도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하시고,
정토경 하시는 분은 극락은 마음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분명히 있다고 하실 것이지만,
저 스님은 선에 집착하신 스님이구나, 저 스님은 아함경에 집착한 스님이구나,
저 스님은 이 동네 사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스님이 틀렸다가 아니고, 안 그래도 그 동네 얘기 듣고 싶었는데 잘됐구나 이렇게 되고,
누구 얘기를 들어도 헷갈리지 않고 더 풍부해지고, 그 부분을 전공한 스님을 존경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저 스님은 저렇게 말하니 헷갈리고 복잡해서 불교 못믿겠다 이러면 안됩니다.
반야심경은 대승경전 중에도 초기 대승경전입니다.
반야심경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반야부의 역할은 소승경전에서 법집을 때려 부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의 교리를 자꾸 비판하지만, 어느 정도 부수고 난 중기 대승으로 가면 소승까지도 포용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성문승 연각승은 틀렸고 보살승만 성불한다고 하다가,
법화경에 가면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다 성불의 길이다,
삼승은 다 부처되는 길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고 중생의 근기따라 설했을 뿐이다,
혼자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가용을 주었고, 같이 가기 즐기는 사람은 버스를 준 것이라고 포용한 것입니다.
감기가 들었다고 해서 감기약을 주었더니 너무 많이 먹고 중독이 되었다면 해독제를 줘야 될 것입니다.
즉 근기따라 병 따라 처방을 낸 것입니다.
이렇게 딱 잡히면 어디를 가서 어떤 설법을 들어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반야심경강좌'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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