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4. 반야심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제20강 색불이공 공불이색-2

상원통사 2015. 10. 1. 23:04

(~~ 제18/19강에서 계속)

 

여기 이렇게 물을 담을 수 있는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컵을 물을 담는 물잔이라고만 하는 것은 고정관념입니다.

여기에 물 담으면 물잔이고, 밥 담으면 밥그릇이고, 술 담으면 술잔이고,

커피 담으면 커피잔이고, 주스 담으면 주스잔이고, 똥 담으면 똥그릇이 됩니다.

이 컵 자체는 공한 것입니다.

이 컵은 그냥 한 물건인데 단지 우리가 물잔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잔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꼭 물질만 색이 아니라 어떤 고정된 것, 변하지 않는 것도 색이라 합니다.

그 색이 공한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대상인 '색'이라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명색이라 해야 합니다.

어떤 모양과 형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색', 그것의 용도를 '명'이라 합니다.

물질은 색으로만 되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명색(名色)입니다

이것이 물잔이다 할 때는 을 고정적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물잔도 아니고 국그릇도 아니고 밥그릇도 아니라면 이때 은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물잔이 공하다 할 때는 이 공하다는 뜻으로, 물 컵 자체는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물잔이라고도 국그릇이라고도 다른 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한 물건이라 부르는데 사실은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가 않는 것이고,

뭐라고 명(이름)을 붙일 수가 없을 때 그걸 공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물컵 자체는 실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도 속을 들여다보면 공합니다.

긴 시간이 지나면서 보면 이것도 변하고, 또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니 색(물컵)도 항상하는 것이 아니고 늘 이렇게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색'도 공하고 '명'도 공하고 '유'도 공하고 '법'도 공합니다.

이때의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할 때도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라는 뜻도 있고,

존재 중에 물질만을 뜻할 때도 있고 우리들의 정신적인 존재까지 포함할 때도 있습니다.

이 법이 불변하고 법은 실체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법집이 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인식의 대상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고 단지 방편일 뿐입니다.

서울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춘천사람에게는 서쪽으로, 인천사람에게는 동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서울가는 길이 꼭 동쪽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가는 길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동이다 하면 '유'에 떨어진 것이고 길이 없다 하면 '무'에 떨어진 것입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이 정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정해져 있는 길은 없다는 말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길은 있다는 말입니다.

있지만 정해진 길이 아니므로 인 것입니다.

 

기를 먹어야 한다, 술을 먹어야 한다, 세속사람이 갖는 이런 생각을 라 합니다.

반대로 먹으면 안된다, 안 먹어야 한다 이것은 또 에 떨어진 것입니다.

산에 불이 나서 토끼도 불에 익어있고 도토리도 불에 익어있다면,

굶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도토리나 토끼고기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배고프니까 다만 먹는 것이지 살생이나 살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으면 안된다 하는 것도 정해져 버리면 그것은 어긋나는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 중도라는 것은 먹어야 된다, 먹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다 떠나야 됩니다.

그것이 중도의 길이고, 거기에 자유가 있고, 거기에 완전한 해탈이 있습니다.

 

산이 하나 있는 데 종로에 사는 사람들은 남산이라 부르고, 신촌에 사는 사람들은 동산이라 부르고,

왕십리에 있는 사람들은 서산이라 부르고 반포에 사는 사람들은 북산이라 부릅니다.

똑같은 산을 놔두고, 이 고을에 사는 사람은 분명히 그 산에서 해가 떴으니 동산이라 하고,

저 고을에 사는 사람은 분명히 그 산으로 해가 졌으니 서산이라 합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봤지만 늘 그랬고, 동네 사람한테 다 물어봐도 동산이라 하고,

과거의 선조들의 기록을 봐도 동산이라 적어졌으니 이 산은 틀림없이 동산입니다.

근데 저 고을에 사는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동산이다 서산이다 서로 우깁니다.

이것이 우리 범부중생입니다.

동산에 동산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동산을 서산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나오면 그건 동산도 서산도 아니라는 걸 설명 안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양반 상놈도 여자 남자도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동네 밖으로 나오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안에서 스님이냐 면장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오는 것이 바로 아상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면 또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가 정답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산이다 서산이다 하는 것이 아집(아상)이라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가 공()입니다.

그러나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가 정답이라고 주장하면 이것은 또 법집이 됩니다.

이건 공이라는 상을 또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동산이다’, ‘서산이다하니까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고 한 것이지,

그 산이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가 아닌 것입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는 것은 그것마저도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실체를 인정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거짓말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산이냐? 한 마디로 말하면 무슨 산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산도 아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무 산도 아닌 산이라는 정답을 또 하나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무슨 산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이라고 합니다.

무슨 산이라고 이름 할 수가 없으니 동산이라 해도 맞다’, 서산이라 해도 맞다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는 말하는 사람이 어디 사는지 알고 그가 무슨 산을 이야기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투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런 것입니다.

 

그 산은 그 어떤 산도 아니기에 그것은 어떤 산이라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기에 그 어떤 이름이라도 붙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컵은 그 어떤 그릇도 아니기에 어떤 그릇이라도 될 수가 있습니다.

선악이 있다 하는데, 선악은 인연따라 생기는 것이지 선악의 실체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선악이 있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없다하면 이해가 안 되고,

없다하면 이 세상이 완전히 뒤죽박죽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운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없다는 말은 없는 게 아니라 그건 정할 수가 없고 뭐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 있다 없다를 떠난 것으로, 한마디로 이라 합니다.

 

공은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와 비슷하게 쓰이기도 하고,

또 있다 없다를 떠나서 제3의 길로서 이 쓰여질 때도 있고,

또 진리를 표현하는 긍정적인 언어로 쓰여질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공은 앞뒤 문맥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내포하는 바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에 어떻게 의미가 부여되든지 관계없이 공 자체는 가변적인 것이지만,

공은 공이라고 하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면 그건 공이 아닙니다.

이렇게 알면 천하의 모든 의문이 다 풀리고 다 회통이 될텐데,

아직도 공에 집착하거나 색에 집착하니까 그게 긴가민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21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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