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수의 '명찰순례'

7. 경북 영주 부석사

상원통사 2015. 6. 21. 22:17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최순우님의 기행수필,

'명찰순례'는 수지도서관에서 찾아낸 최완수님의 사찰기행기,

오늘은 최완수님의 '명찰순례'를 들고, 최순우님으로 더욱 유명해진 경북 영주의 부석사를 찾았습니다.

 

<차는 아예 들어갈 수도 없으니 주차장에 세워두고, 은행나무 길을 따라 올라가면 ~~>

 

 

<일주문이 나옵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이렇게 밖에 찍을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7세기경) 당간 지주로 부석사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428cm이다."

 

<일주문을 지나 은행나무길을 조금 더 오르면 당간지주가 나옵니다.>

 

 

"극락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들은 그 구도자의 원력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누고

 다시 이를 셋씩으로 나누어 모두 아홉가지로 나누는데,

 상품상생에서 하품하생에까지 이르는 분류이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의 능력과 한계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천행의 단계를 제시한 것이다."

 

<천왕문을 오르는 데서부터 시작된 계단은 ~~>

 

 

 

"그래서 부석사에서는 일주문을 지나면서부터 크게 셋으로 나누어지고,

 자세히는 아홉 층으로 구분되는 축대를 질서있게 쌓아올려 각 건물을 배치하고 맨 윗단에 본당 무량수전을 세웠다.

 절에 들어서서 본당에 이를 때까지 자연스럽게 극락정토를 향해 자신을 정화시켜 가도록 배려한 가람 배치인 것이다.

 이 역시 진정한 수도인이었던 의상의 치밀한 구도 아래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이만큼씩 나누어 아홉 번이나(하품하~중품중~상품상)  계속됩니다.>

 

 

 

삼층석탑

"통일 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탑이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로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

 

 

 

<여기는 범종루 같은 데...>

 

 

<우리가 갔을 때가 초파일 하루 전날이었으니 사람도 많고 연등도 많고....>

 

 

"안양(安養)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하품하생에서부터 거쳐 올라온 구도 행각을 상품상생의 이 아래층에서 마치고 가운데로 열린 계단을 오르면,

 그곳은 바로 불단에 해당하는 깨달음의 땅 극락세계인 것이고 그래서 무량수전의 당당한 위용을 온 눈에 대하게 된다.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창건주의 가람 경영 의도가 마지막 한곳으로 모아지는 순간이다.

 순례자가 최소한 그런 의식을 가지고 마음이라도 정화시켜 본당 자리에 오른다면

 평범한 여느 사찰 순례와는 다른 색다른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부석사' 현판은 이승만의 글씨라는데, 한 짓은 미워도 글씨는 차마.....>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데 최순우님은 이렇게도 멋지게 표현하셨고,

  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고..... >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浮石)'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 윗 바위 사이에 약간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이리하여 이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아내와 딸은 하늘에 떠있는 부석을 보고있고, 아들은 땅에서 허둥대는 이교도들을 보고 있습니다. ㅎㅎ>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2개씩 배치되고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상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꽃 하대석에 조각된 8엽 복판 연꽃의 첨단부에 귀꽃의 장식문이 부착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무량수전(殿)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본전으로 보처 없이 화엄도량에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중창하였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난 아무리 봐도 최순우님이 보신 그런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으니....>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높이 278cm, 광배 높이는 380cm이다.

 무량수전 안 서쪽에 마련된 불단위에 모셔져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손의 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여느 법당과 달리 이곳에는 불상이 남쪽 정면으로 향해 앉아 있지 않고 동쪽 벽면을 향해 서쪽에 앉아 있다.

   그리고 협시보살도 전혀 없이 한 분만 홀로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앞이 아니라 옆을 보고 계신 부처님에 대한 최완수님의 설명입니다.>

 

 

<법당 안에서는 촬영금지라 이렇게 찍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무량수전 오른편으로는 삿갓기둥탑(?)이 서 있고 ~~>

 

 

<그 뒤에는 통일신라 때의 삼층석탑이 서있는데,

  "탑이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한 것처럼, 조금은 독특한 석탑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이 이쪽을 보고 계서서 그랬나??>

 

 

<그 옆으로 난 산길을 올라가면 ~~>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무량수전 우측 위쪽에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1916년 수리중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1377)이 건립 연대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창건주 의상 조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이 있습니다.

  밖에서 안을 찍어보았는데 유리에 반사되어 너무 좋지않아 차마 올리지 않겠습니다.>

 

 

 

선비화(禪扉花)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가 중생을 위하여 깊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骨擔草)라고 부른다."

 

<선비화 보호를 잘 하려 하는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물망이 워낙 촘촘해 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최대한 재주껏 찍어보았습니다.

  찬찬히 보니 골담초 줄기가 워낙 가늘어서 지팡이로 쓰기에는 좀....>

 

 

<조사당을 둘러본 후 이제 또 보지 않은 곳이 없나 책을 찾아보다가 ~~>

 

 

<이제는 다 둘러 보았구나 싶었는데 책에는 나오지 않은 곳들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언제 또 이곳에 오려나 싶어 조금 더 걸었습니다.

  우선 단하각(丹霞閣, 붉은 노을 집)은 집도 작지만 ~~>

 

 

<흙으로 구운 듯한 부처님도 정말 작고 ~~>

 

 

<응진전에도 ~~>

 

 

<역시 흙으로 구운듯한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모셔져 있고 ~~>

 

 

<자인당에는 ~~>

 

 

<근처 다른 절에서 모셔온 돌로 만든 불상이 모셔졌습니다.

  부석사의 또다른 특징은 돌이나 흙으로 만든 부처님과 보살들 아닌가 싶습니다.>

 

 

<올라오면서 들르지 않았던 곳 선묘각(善妙閣),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상과 원효는 중국으로 불법을 배우러 길을 떠났는데 가던 도중 원효는 흙무덤에서 깨우쳐 귀국하고,

  의상 홀로 가던 길을 계속하여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그곳 유지의 집에 머무는 동안,

  그의 인물과 인품에 반한 주인집 딸 선묘가 계속 추파를 던졌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에 감명받은 선묘는 마음을 돌이켜 의상의 지원자가 되어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서원을 냈다.

 한편 10년의 공부를 마친 의상은 신라로 돌아가는 길에 산동반도에 와서

 예의 그 신도집에 들러  그간 후원에 감사를 전하고 배편을 구한다.

 실제 뒷바라지를 했던 선묘는 돌아가는 의상을 위해 옷가지를 전하고자 했는데,

 그가 배에 탄 뒤에야 선창가에 도착하여 서운함만 가득했다. ~~>

 

 

<그 서운함도 잠시, 선묘는 수천리 험한 뱃길이 위험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자신이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고자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런 지극한 마음에 바다도 감동하여 그녀의 뜻대로 용이 되게 하여

  의상이 탄 배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 땅까지 인도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진정한 도심을 구현시킨 선묘룡이 마지막 몸을 날려

  다시 의상의 대업을 도운 것이 앞서 소개한 부석(浮石)의 조화라 한다.

  그리고 자신은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상 밑에서부터 앞마당의 석등까지 몸을 묻었다.

  '명찰순례'에 적은 최완수님의 이야기를 요약했습니다.>

 

 

<선묘각을 나와서, 아내가 문화해설사에게 들은대로 지장전 앞에 와서 바라보니

  과연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처마선이 하나로 되어 한 지붕으로 보입니다.>

 

 

<해설사님이 알려준 또하나의 비밀!

 삼층석탑 앞에서 안양루를 찬찬히 바라보면 공포들 사이로 부처님이 보입니다.

 어때요, 다섯 부처님 형상이 보이십니까?>

 

 

<이제 가는 길에 박물관에 잠시 들러서 ~~>

 

 

<배흘림 기둥을 세워보고 무량수전도 지어보고 ~~>

 

 

<다음에도 또 아이들과 같이 이런 여행을 할 소원을 무지개에 담아보지만 ~~>

 

 

그것이 언제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들과 자꾸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 내가 나이 먹기는 먹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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