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靑龍寺)
"서울은 백악(북악산)이 북주(北主)가 되고 인왕산이 내백호, 길마재가 외백호, 낙산이 내청룡, 안암산이 외청룡이 되는바
청룡등(낙산, 124m)이 백호등(인왕산, 340m)보다 낮아서 장자(長子)에게 이롭지 않고
동쪽으로부터 화를 입을 지세라는 것이 지리가(地理家)에서 일찍부터 지적해 온 결점이었다.
~~ 조선 태조 3년(1394)부터 동쪽의 지세를 보강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니
동대문의 현판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여 '갈 之'자 한 자를 더 보태 써서 건다든지,
지금 청계천 6가 부근에 가산(假山)을 쌓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었다.
~~ 청룡사는 이렇듯 허약한 청룡등을 보강하기 위해 세워진 절이다.
그래서 청룡의 콧마루에 해당하는 산마루 바위 벼랑 위에 작은 규모로 절을 짓고 여승들만 거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음양의 조화로 청룡을 활기차게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종로구 숭인동, 지금은 도심 한가운데 서게된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청룡사,
절 앞 가파른 도로도 원래 개천이었는데 복개하여 현재의 찻길이 되었답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절이어서 그런지 일주문이 따로 없고, 대문이 곧 일주문입니다.>
정업원 옛터
"이곳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1521)가 궁에서 물러난 뒤 평생을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이곳에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년(영조 47)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정업원 옛터)' 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원래 정업원이란 양반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청룡사 왼편에 정업원 옛터 비석이 있습니다.>
정업원(淨業院)의 역사
-. 조선 초기부터 왕실지친인 내명부(內命婦)의 여인들이 출가하면 거처하던 절로서 창덕궁 서편에 위치함
-. 왕실숭불의 온상이었으므로 태종 때부터 사간원에서 끊임없이 혁파를 요구함
-. 집현전 학사들의 요구로 세종 30년(1448) 혁파, 비구니는 귀가시키고 모든 재산은 예조에서 처리하도록 함
철거 당시 정업원 소속 서울거주 노비는 489명, 지방의 노비는 3,215명이었음
-. 세조 3년(1457) 요절한 세자의 추복(追福)을 위해 정업원을 다시 세우도록 함
-. 연산군 10년(1504) 도성내의 정업원은 훼철되고 청룡사로 이전
-. 명종 원년(1546) 정업원은 다시 도성안으로 되돌아 감
-. 도성안의 정업원은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다가 선조 40년(1607)에 복구됨
-. 현종 2년(1661) 도성내의 정업원이 혁파되면서 다시 청룡사로 이전
-. 영조 47년(1771) 현재의 청룡사에 정업원구기(정업원 옛터)비를 세움
<600여 년동안 수난도 많았던 정업원, 지금은 청룡사 옆에 이름으로만 남았습니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1454년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됨
-. 1455년 남편(단종)은 삼촌(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남
-. 1457년 6월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남편(단종, 17살)과 동대문 밖에서 이별(18살, 결혼 3년차)
-. 1457년 10월 삼촌(세조)이 내린 사약을 받고 남편(단종, 17살)은 저세상으로 감(실록에는 목을 맨 것으로 기록됨),
-. 남편(단종)이 죄인이므로 본인도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으나, 세조는 특명으로 청룡사에서 살 수 있게 했고,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남편의 혼백이 떠도는 영월 쪽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냄
-. 세종 22년(1440) 태어나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을 거쳐 중종 16년(1521)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영조대왕도 이 슬픈 이야기에 가슴이 아프셨던지, 78세 되던 해에 '정업원옛터' 비를 세우셨는데,
비각현판에는 '前峰後巖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라 적고,
비석에는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다)' 라 적고,
정순왕후가 단종이 계신 영월 쪽을 바라보기 위해 올라갔었다는 절 앞의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 이름짓고 친히 써서 그곳 바위에 새기게 하였답니다.>
* 동망봉 글씨는 일제 때 비행장을 닦으며 깨트려서 없애버렸음.
<사연은 많지만 절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1973년 윤호스님이 극락전 자리에 확장하여 지은 대웅전>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심검당(尋劒堂)
안에는 금동 관세음보살이 모셔져있다 하는데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웅전 뒷편의 산령각(山靈閣)>
<명부전(冥府殿)
사진찍기도 옹색하여 이렇게 밖에는 찍을 수 없습니다.>
<명부전 오른편에는 우물로 보이는 터가 남아 있습니다.>
<대웅전 건너편의 우화루(雨花樓)>
<우화루 밑으로 난 통로로 나가면 큰길이 나오는데, 원래 청룡사 입구는 여기였답니다.>
<우린 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즈음에 절을 나섰는데,
도심의 절이어서인지 비구니 스님들만 사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문이 이내 닫혔습니다.>
<절도 절이려니와 근처에는 정순왕후와 얽힌 이야기들이 곳곳에 남아있기에,
그중 한 곳 '자주동샘'을 찾으려 창신역 앞에 세워진 '정순왕후 유적지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동네 주민 한분이 가까이 오시더니 지나가는 친구까지 불러서 그 위치를 친절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날은 저물어오고, 길은 복잡하고, 명확한 이정표도 없기에 찾아가는 것은 포기,
대신 전해 내려오는 슬프고 아름답고 화나는 이야기들을 옮겨봅니다.
"송씨(정순왕후)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 신숙주는 그녀(정순왕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자주우물(자주동샘)
"자주우물이란 상왕비 송씨(정순왕후)가 적몰된 죄인 신세이었으므로 생활이 간구하여
함께 출가한 시녀들과 함께 옷감에 자주 물감을 들여 팔았으므로 그 물감 들이던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였고
서울 여인들은 이를 팔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는 것이다."
여인시장
"동관왕묘 앞 근처에는 여인들만 나와 채소를 파는 채소장이 일제 때까지 서고 있었다는데
이는 여인들이 채소를 청룡사에 모아 보내 정순 왕후를 굶주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굳어진 것이었다 한다.
남자들만 장에 다니던 조선시대 풍습에서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진 장으로 알려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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