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의 고찰 법화사(古刹 法華寺),
조선 태종 8년 제주목사의 장계에 의하면 노비 수만 280명이었다 하니 엄청나게 큰 절이었는데,
숙종 28년(1702) 목사로 부임한 청백리(淸白吏)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내의 타락하고 속화된 절들을 모두 불지르고 그 잔해를 쓸어버린 후,
관련된 기록마저도 없어져버려 법화사도 어느 때 속화되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1914년 도월(道月)선사가 법화사의 사액(寺額)을 내걸고 복구하고자 했었고,
1980년에 법화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제주도민의 성원으로 1982년에 대웅전지 등을 발굴,
1987년에 시몽(是夢) 선사가 대웅전 복원 불사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조용하기만 합니다.>
<입구의 주차장 옆에는 오래된 비석(?)들도 있고 ~~>
<새로 세운 멋진 기념비석들도 있고 ~~>
<해신 장보고(海神 張保皐)의 상과 기념비도 있는데,
그 연유는 17년에 걸친 법화사 발굴과정에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와당들이 발견되었고,
장보고 선단이 닻을 내렸던 곳마다 법화사를 창건하여 해상무역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바이기에,
이곳도 장보고 청해진대사가 세운 것으로 보고 기념하기 위해 상과 비를 세운 것입니다.
근데 海上王 像이 그 이름과 잘 안어울리게 생겨서 조금..... ㅎㅎㅎ>
백팔송과 염원석(百八松과 念願石)
"서홍마을 눌왓동산 백팔여년 낙락송과
동광마을 지켜오던 수수만년 염원석이
고찰에서 서로만나 좋은인연 이루었네 ~~"
<여기가 4,000여평의 구품연지(九品蓮池) 같은 데 설명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까만 것은 목판이고 하얀 것은 글씨라....
나 본래는 한문을 참 잘하는 사람이지만, 노안이 와서 무슨 글자인지 잘 안보입니다. ㅎㅎㅎㅎ>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6년(1406) 4월 19일 명나라 사신들이 와서 법화사 동불상(銅佛像) 3좌를 요구하는데,
당시 명나라 황제이던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그 부모인 명태조 부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새로 절을 짓고,
거기에 이곳의 아미타삼존불을 모시기 위함이었는데, 이 불상은 원래 원나라 양공(良工)이 조성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억불정책을 폈었기에 이를 거부하거나 아까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명나라 사신들이 제주도에 오게되면 원나라처럼 명의 직할 목마장으로 달라고 할 것이 두려워서,
태종은 선차(宣差) 김도생(金道生)과 사직(司直) 박모(朴謨)에게 불상을 나주로 옮겨 오도록 하고,
이들은 서울을 떠난 지 불과 17일 만에 법화사 아미타삼존불을 나주로 모셔 내옵니다.
그리하여 명나라 사신들은 7월 22일 법화사 아미타 삼존불을 모시고 명나라로 떠났고,
지금은 북경의 자복사(資福寺)에 모셔져있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 최완수님 말씀 -
<그 아미타 삼존불을 모셨던 곳>
"관음, 지장 양대 보살을 협시로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극락전으로 전호를 붙였어야 하고
또 그 옛날 황엄이 모셔내 간 부처님도 아미타삼존상이라 하였으니
그때도 극락전이었을 터이라 장차 현판을 극락전으로 바꿔 걸어야 하겠다."
<전임 삼존불은 북경 자복사에 계시고, 1988년 초파일에 모신 후임 아미타삼존불,
최완수님이 감조(監造)를 하였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데, 외지인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안내판도 없고 설명도 없으니 무슨 연유인지 알수도 없고,
스님에게 팜프렛을 말했더니 없다고만 하시고....>
<절 안에 있는 귤나무도 남의 것이라고 퉁명하게 내지르니,
나무에 달린 귤 좀 사려던 아내는 무안해 어쩔줄 모르고....>
<법화사를 나와 들른 곳은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추사관(秋史館),
법화사에서 그리 멀지않고 최완수님의 책에 나와있어 오게되었습니다.
추사관은 1984년 지을 당시 지상2층이었는데, 2007년 지하2층 지상1층으로 다시 지었습니다.
뒤에 있는 강도순의 집을 가로막은 것이 거슬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들어가는 입구가 지하로 내려가는 것도 독특하고,
가운데에 장애자용 경사로를 만들고 양쪽에 계단을 배치한 것도 독특합니다.
여기도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플래시 터트리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사진도 못 찍게 하는 지...
물리공부 다시 해야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겨우 한 컷 찍은 것은 1층 전시실에 있는 추사흉상>
추사유배지(秋史 流配址)
"추사 김정희는 시서화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현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억울한 누명을 쓸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까지 약 9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유배 초기에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이곳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겨왔다.
~~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하고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비롯하여 많은 서화를 남겼다.
이곳은 집터만 남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에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되었다."
<추사관 뒷편에는 추사선생께서 유배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셨던 강도순(姜道淳)의 집터가 있습니다.>
밖거리
"밖거리(바깥채)는 김정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안거리
"안거리(안채)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부자인 강도순의 생활공간이 곁다리로 사는 김정희의 거처보다 작다니,
그렇게 땅 많은 부자였는데 이렇게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다니,
뭔가 고증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사는 집은 따로 있고 여기에 올 때만 머무르던 곳이던지...>
정지
"부엌을 제주도에서는 정지라고 부른다.
겨울이 춥지 않은 제주도는 육지의 온돌 구조와는 달리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분리되어 있다.
바닥에 솥덕이라고 하는 4~5개의 도로 만든 화덕을 두고 사용했다"
<나 어렸을 때는 부엌을 정개라고 불렀는 데....>
모거리
"모거리(별채)는 김정희가 기거하던 곳이다.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은 김정희는 이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심화시켰다.
그의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닮아 없어지게 했다고 할 정도로
고독한 정진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모거리에서 살고, 밖거리에서 가르쳤다면 집 두 채를 사용했으니,
집주인보다 넓은 공간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다는 것인데....>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추사와 초의
"1815년 처음 만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와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1840년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는 차를 마시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다.
1843년 추의는 제주도로 내려와 6개월간 추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돗통시
"제주의 가정마다 하나씩 있던 돗통시는 돼지를 기르는 우리와 화장실을 합쳐놓은 공간이다.
돼지를 돗통시에 키워 인분을 처리하고, 그곳에서 나온 퇴비를 다시 밭에 뿌려 이용하였다."
<똥돼지가 부드럽고 맛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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