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바꾸면 ~~

9. 내 친구 꿀벌 농부

상원통사 2015. 6. 15. 21:34

두 말(36리터)쯤 들어가는 하얀 플라스틱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낑낑대고 들고 온다.

나    : 힘든데 뭐하려고 물을 길러오냐?

친구 : 벌에게 주려고...

나    : 아니, 벌도 물을 먹어?

친구 : 그럼, 살아있는 생물인데 물을 먹어야지.

         벌통 앞에 깨끗한 물이 없으면 밖에서 더러운 물을 먹고 와서 죽어버리거든...

         특히 농약을 할 때쯤이면 논물을 먹고 집 앞에서 죽어가는 벌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

 

벌은 꿀만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물도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가을에 태어난 벌은 이듬해 봄까지도 살지만, 봄에 꿀을 딸 즈음에는 길어야 보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네댓 마리씩 무리지어 꿀벌 애벌레 잡아먹으러 오는 말벌의 강한 집게에는 대적할 수 없어,

수십 마리가 말벌에 바싹 붙어 체온을 오르게 하여, 이내 죽음으로 집을 지켜내는 꿀벌들의 슬픈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얼굴을 온통 가리는 양봉용 망사 모자를 쓰고 허리가 아프지도 않은지 몇 시간씩 벌통에 붙어,

무엇인가 들었다 놨다 열심히 하고 있는 친구는 원래부터 벌을 키우는 농부는 아니었다.

낚시광이었고 골프광이었기에, 주말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을 비워 아내와 다툼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서 산책을 하는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벌통들이 보였다.

호기심은 일지만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주인인 듯한 사람의 괜찮으니 가까이 오세요라는 한 마디가 벌과의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난 저 앞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선생인데 취미삼아 하고 있소.

 벌 키우는 게 보기에는 어렵고 무섭고 힘들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참 재미있어요.

 어때, 한 번 배워보지 않겠소? 잘하면 노후 걱정은 붙들어 매놔도 괜찮을 것이오.”

그렇게 두 통을 분양 받은 친구는 퇴근하자마자 곧장 달려와 벌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호기심에 실수가 더해지자 재미로 바뀌고, 재미에 꿀맛이 더해지면서 취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붕어는 꿀벌이 되고 저수지는 산과 들이 되었고, 골프공은 벌꿀이 되고 골프장은 봉장으로 변했기에,

낚시대는 창고에 고이 모셔두고 골프채는 기껏해야 땜방용으로만 사용한다고 한다.,

15년 전 산책하다 챙겨온 호기심은 그를 꿀벌 농부로 바꿔주었다.

 

 

<무서운 꿀벌, 가까이 가면 쏩니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다.

역모를 꿈꾸고 쿠데타를 실행에 옮기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런 군인이 아니라,

묵묵히 주어진 소임을 다하며 우리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진짜 군인이었다.

그런 군인정신은 전역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살아있음이 내 눈에 보인다.

걸음걸이와 말투에서도, 술자리 파하거나 결론을 내릴 때 보면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군인이다.

 

그는 부지런한 농부의 한 사람이다.

게을러도 할 수 있는 게 양봉이니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내게도 해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벌들이 일 나가기 전에 해야 한다며 새벽 4시에 일어나 봉장으로 나가곤 한다하니,

6시가 넘어도 일어나기 싫어 망설이는 게으름뱅이는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는 자부심이 대단한 양봉인이다.

오로지 원리원칙대로 벌을 키우기에 채집한 꿀은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내놓고,

벌 이야기 꿀 이야기를 할 때면 온 몸에 생기가 넘쳐나는 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맛을 보니 그 진함과 그윽한 향은 일반 시장에서 구입한 제품과는 확실히 달랐다.

덕분에 천 원짜리 한 장도 아까워서 몇 번씩 생각하고서야 꺼내는 아내도 이내 과소비하고 말았다.

 

그는 사람됨이 무엇인지 말없이 보여주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벌을 키웠고 도심 가까이에 있기에, 물어보러 오고 구경하러 오고 놀러오는 이들이 많지만,

아무리 바빠도 싫은 내색 한 번 안하는 것은 기본, 저 멀리 논에서 일하는 동네사람도 기어이 불러 꿀 한 잔 건넨다.

책보고 강의 들으며 머리로는 공부하지만 행동은 뚝방망이이기에 어머니는 나를 무뚝쇠라 부르는데,

친구 어머니를 마치 친어머니처럼 살갑게 대하고, 젓가락도 어른 다음에 들 줄 아는 것은 꼭 배워서만이 아니리라.

인의예지는 가방끈 길이와도, 지갑 두께와도, 명함 문구와도 무관하다는 옛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그는 은퇴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평생현역이다.

현역시절에 취미로 시작한 양봉기술을 이제는 삶의 방편으로 발전시켜,

벌 키우는 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할거다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돈이 궁하거나 다른 취미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다.

매달 받는 연금만 해도 지금의 내 월급에 견줄만큼이니 먹고 살기 위해 벌지 않아도 되고,

아들 딸 모두 출가하여 자리를 잡았기에 특별히 돈 들어갈 일도 없고,

당구비보다 적은 돈으로 실컷 골프 칠 수도 있으니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보낼 수도 있지만,

가을까지는 벌을 키우고 밭을 가꾸다가, 추워지면 집근처 회사에서 일하며 시간도 보내고 돈도 번다.

아플 틈도 없고 외로울 틈도 없이 젊은이들보다 더 바쁘게 지내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친구!

 

이제는 100세 시대가 왔으니 어쩌고 저쩌고, 베이비부머가 은퇴하면 이런다 저런다 매스컴에서 떠들어 대고,

친구들 만나면 나누는 대화 중 한 자락은, '퇴직하면 무엇을 해야 할까' 입으로만 걱정들 하고 있지만,

그는 한참 전부터 가꿔온 취미를 직업으로 슬쩍 바꾸어, 이름하여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에게 배우고 싶다.

삶의 태도를 배워야 하고, 부지런함을 배워야 하고, 준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반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육바라밀도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보면서 부러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나를 바꿔보려 노력하는 게 수행인의 자세이리라.

 

 

<여기는 친구의 농장이고 ~~>

 

 

<여기는 내 와송농장과 텃밭. ㅎㅎㅎ>

    

'한 생각 바꾸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명리학 소고  (0) 2015.11.09
10. 키바 - 재미있는 기부  (0) 2015.07.05
8. 여시아문 여시아상(如是我聞 如是我想)   (0) 2015.05.31
7. 담담한 마음  (0) 2015.04.22
6. 도시농부 입문  (0) 201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