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4. 반야심경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제7강 대승불교에서의 보살

상원통사 2015. 6. 1. 22:17

(~~ 6강에서 계속)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계시는데,
대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관세음보살님은 자비를 상징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고에서 구하고 환란에서 구하려는 분이기에 '구고고난 관자재보살'이라고 말합니다.
그 모습은 한 손에는 연꽃을, 다른 손에는 물병을 들고 이렇게 있습니다.
물병의 물은 감로수인데, 마시거나 이마에 떨어뜨리게 되면 모든 병고와 심신의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또 중생은 사바세계에서 육도윤회를 거듭하지만 그 근본이 부처의 씨앗인 불성이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자라도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망념에서 벗어나면 바로 부처가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살(보디 사트바)의 보디는 깨달음(부처)을, 사트바는 어리석음(중생)을 의미함
보살(菩薩)의 원어는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 보디 사트바)인데,
보디는 깨달음(부처)이란 뜻이고 사트바는 어리석음, 중생(무명 중생)이란 뜻입니다.
여기 이 그림을 보세요,
왼쪽의 원이 보디(부처)이고 오른쪽의 원이 사트바(중생)입니다.
부처는 완전히 밝은 상태이고, 중생은 완전히 깜깜한 상태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원은 중생의 어두움이 비쳐서 절반은 어둡고, 부처의 밝음이 비쳐서 절반은 밝은,
한쪽은 보디이고 다른 쪽은 사트바인 이런 존재로, 보디사트바(보리살타, 보살)라 합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겠다고(깨달음을 얻겠다고) 한마음을 일으키면 보살이 됩니다.
그 보살은 부처가 되는 게 원이므로, 부처의 세계로 점점 다가갑니다.
그러면 ‘밝음’의 부분은 점점 많아지고 ‘어둠’의 부분은 점점 작아지지만,
아무리 부처의 세계로 가까이 가도 어둠이 0.0001%라도 남아있게 되니,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처에 비견되는 데까지는 갈 수가 있지만 부처는 될 수가 없는 것은,
중생의 세계가 있어 그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비추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살이 부처가 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살이 부처가 되는 비결은 반대로 중생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중생의 세계로 가서 어둠을 없애버리면, 보살에게 비칠 어둠이 없어지니 바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는 게 부처되는 길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도 자기 해탈을 위해서라고 할수도 있으며,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입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중생구제를 이런 관점에서 보고, 깨달음과 부처도 이런 관점에서 봅니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부처되는 길이며 이는 둘이 아니다.
깨달음의 길과 중생 구제의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깨달음 먼저 중생 구제는 나중에, 또는 중생 구제 먼저 깨달음은 나중에가 아니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곧 부처되는 길이며 부처되는 길이 곧 중생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온전히 중생의 아픔으로 들어가서 중생을 구제하면 곧 성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중생의 세계에서 수행을 해야하며, 중생구제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사상에 입각하여 여러분들이 지장보살을 믿는다면, 지옥 가더라도 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은 업에 따라 지옥에 가기는 가겠지만, 지옥에 떨어진 나보다 더 나를 건지려는 원을 가진 분이 지장보살입니다.
‘나는 괜찮지만 네가 아프니까 구제해준다’가 아니라, ‘너 구제 안하면 나도 구제 못 된다’ 하는,
바로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다’ 이렇게 일치가 되어있습니다.

어떤 신도님은 고3인 딸을 위해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딸이 교회에 다니니 관세음보살님께서 안 들어줄 것 같아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관세음보살이 당신 심보 같은 줄 아느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흔히 ‘잘못을 하면 부처님이(관세음보살이) 벌 준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맞지가 않습니다.
부처나 보살은 벌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옥에 가는 것은 벌을 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불법의 이치를 알고 수행하면 스스로 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니 스스로 좋은 세계로 가는 것이고,
인과의 법을 믿지 않고 어리석게 살면 그 지은 업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지 누가 보내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은 업의 과보로 지옥에 갔을지라도, 불·보살은 그것마저도 건져 내주려고 합니다.
불·보살은 절에 다닌 사람은 구제해주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빼놓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 똑같이 아파하고 다 똑같이 어여삐 하고 다 똑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니 누가 교회에 가자고 하면 가서 설교를 들어도 괜찮고 예배를 해도 괜찮습니다.
교회가면 교회 예의를 갖추고, 무슬림에 가면 무슬림의 예의를 갖추고, 무당집에 가면 무당집의 예의를 갖추십시오,
어머니가 산신칠성기도를 하면 어머니 뜻을 존중해주되,
그걸 통해서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며 교화를 해야 합니다.


한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구제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한중생도 구제를 얻은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닙니다.
정토삼부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 우주에 있는 온갖 세계를 법장비구에게 보여주는데,
어떤 세계는 중생이 나쁜 마음을 갖고 나쁜 행동을 하고 나쁜 과보를 받아 지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겪고 있고,
어떤 세계는 바른 마음을 가지고 수행정진을 하는 그런 세계도 있고,
어떤 세계는 차별 받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세계는 차별이 없는 그런 세계도 있습니다.
이것을 본 법장비구는 부처님께 ‘일체 중생이 괴로움이 없는 세계를 만드셔서 우리 모두 거기 태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부처님께서는 ‘네가 그런 세계를 만들어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법장비구는 그 수많은 세계에서 좋은 점들을 뽑아 48가지 원을 세웁니다.
거기에는 신체장애가 없는 세계, 여자가 없는 세계 등이 나오는데,
여자가 없다는 말은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신체장애가 없다는 것은 신체장애가 있더라도 차별받지 않는 것을 뜻하고,
종이 없다는 것은, 종일지라도 종이라고 차별받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다생겁래로 한량없는 세월동안 중생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해서 이룬 세계가 극락정토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자 법장비구는 부처님이 되셨는데, 그 부처가 아미타불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자 부처가 되는 대승은 수행법자체가 소승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오거나 바람을 피울 때 우리 남편 좀 고쳐주라고 돈을 내고 비는 것은 대승수행법이 아닙니다.
그런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그렇게 술 먹을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헤아리고,
그렇게 집 밖으로 돌고 방황하며 늦게 들어오는 그 아픔을 생각하고 껴안아야 합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이 술을 적게 먹고 온 날은 부족한 만큼 집에서 보충하여 술상 차려주고,
많이 먹고 온 날은 속 쓰릴 걸 생각해서 해장국 끓여주고,
자식이 여자친구 만나러 나가면 용돈 주듯이, 남편이 바람피우면 용돈 주며 잘 갔다 오라고 해주고,
만약에 이렇게 마음을 낸다면, 내 속의 미움과 불안초조가 다 없어져 내 고통이 없어집니다.


대승보살의 길은 남편을 내 남편이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남편이다 하는 생각을 던져버리면 능히 할 수가 있습니다.
‘내 괴로움 좀 가져가세요’ 하고 맨날 괴로움을 가지고오는 중생은 죽을 때까지 괴로운데,
그 모든 괴로움을 다 짊어진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은 괴롭다는 소리 안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내면 바로 자기가 해탈의 길로 가는 겁니다.


속을 썩이는 남편에게는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게 현명한 현인의 길입니다.
그런 남자하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술 좋아하면 술 실컷 드시고, 딴 여자 좋거든 같이 사시고, 당신 뜻대로 하세요,
저는 저대로 살테니 안녕히 계십시오 하면 되는데 우리는 이런 현명한 길도 가지 못하고,
내 맘에 맞도록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돈도 잘 벌어다 주고, 몸도 건강하고, 딴 여자들이 다 쳐다볼 만큼 얼굴도 잘생겼는데,
그런 남편에게 딴 여자 쳐다보지도 말고 돈도 많이 벌어 나한테만 갖다 주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하나가 생기면 다른 길도 따라서 생기는 건데, 욕심으로 하니까 인생이 괴로운 것입니다


내 성질대로 하면 우선 내가 괴롭고, 그다음에 남편도 괴롭고 자식도 괴롭지만,
현명하게 하면 나만이라도 괴롭지 않습니다.
보살의 마음을 내면 나도 안 괴롭고 남편도 안 괴롭고 자식에게도 좋고 세상에도 좋다,
내가 이렇게 실천을 하고 못하고는 우선 놔두더라도, 적어도 이것은 맞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불법이란 내가 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해결이 되는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해결될 수 있는 길을 안가고 해결될 수 없는 길을 붙들고 있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으니,
지금처럼 살려면 괴로운 걸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또 현명한 길을 가려면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돈을 벌고 애를 키워야 하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선택에 따른 과보입니다.
그러나 보살의 길을 선택하면 아무런 괴로움의 과보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길이 여러 개 있으니 각자 가고 싶은 대로 선택해 가시면 됩니다.
불법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얘기는 원래 안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고,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일러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도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알고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가시면 됩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보살이란 칭호를 받을 만 합니다.
여러분들도 자식을 갓 낳았을 때는 이런 마음을 내었으니, 보살이라 부를만 합니다.
비록 자기 자식한테만, 그것도 갓난아이일 때만 그렇게 냈지만, 그래도 보살은 보살입니다.
1% 밝고 99% 깜깜해도 보살은 보살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보살의 칭호를 얻었으니 진짜 보살의 길로 가도록 해보십시오.
이 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미 갓난아이한테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새벽 두 시에 똥 눠도 아무 소리 않고 치우고, 밥상에 얹은 국그릇을 엎어도 나무라지 않고 치웁니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것은 아이한테 기대하는 게 눈꼽만큼도 없기에 그런 것입니다.
아이한테 이미 해 본 경험이 있으니, 남편한테는 그 천 분의 일만 해도 됩니다.
실직당해 있으면 돈도 못 벌고 집구석에서 잔소리만 하고 술만 먹는다고 구박하는데,
실직을 당해있는 남편 입장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건강도 안 좋으시니 한 오년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편안히 계십시오,
이렇게 탁 풀어놓고 출발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좋은 일이 조금씩 저절로 생깁니다.
여러분들 아등바등한다고 해결될게 뭐 있습니까?
자기만 괴롭고, 부부간에 갈등만 생기고, 아이들만 상처입고, 오던 돈도 도망가고 오는 일자리도 도망갑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도 구제해야 된다고 하면서, 남편 보살피는 마음도 하나 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수행입니까?
생각을 근본적으로 딱 뜯어고쳐야 됩니다


여러분들 얘기를 하고 주장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그 과보로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 안 가려면 뜯어고쳐야 되고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생각만 바꾸면 공연히 무릎 아프게 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생각을 뜯어 고치는 과정에는 무릎이 아프도록 참회의 절을 해야 됩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내가 어리석게 살았구나, 쥐가 쥐약을 먹듯이 살았구나,
세상을 원망했는데 다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거구나,
이렇게 엎드려서 절을 하고 반성을 하고 법문을 듣고 하면 금방 얼굴이 폅니다


보리살타, 보살이라는 것은 깨달은 중생을 뜻하는데,
‘깨달은’을 강조하면 ‘부처’란 뜻이 되고, ‘중생’을 강조하면 깨닫기는 깨달아도 중생이란 뜻이니,
보살로 인해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한 생각 바꿔 마음을 돌이키면 부처님 같은 행동이 나옵니다.
반대로 약간만 생각을 바꿔 꽁 해지면 살인범보다 더한 독한 마음이 나옵니다.
그러니 성인과 범부도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범부의 길을 가고 싶으면 가셔도 되고 성인의 길을 가고 싶으면 가시면 됩니다.
사람을 백 명을 죽였어도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면 성인의 길을 갈수가 있고,
지금 성인같은 사람도 한 생각 잘못하면 살인자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나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지옥 갈 자유도, 천상 갈 자유도, 부처될 자유도, 범부중생이 될 자유도 나에게 있습니다.
결혼 잘못했다, 자식 잘못 낳았다, 남편 잘못 만났다 시집 잘못 왔다고 한탄하며 살지말고,

지금이라도 한 생각 바꿔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경에서 주인공은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어떤 분인지만 알아도 반야심경 내용이 뭔지를 좀 짐작이 될 것입니다.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했다가 타인이 아픔을 생각하니까 그 순간에 원망이 없어져버렸으니,
악하니 선하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게 다 공하다 하는 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공하니까 품었던 악심이 일순간에 없어지지, 선하고 악한 게 따로 있으면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새어머니를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고 숨이 끊어졌으면 세세생생 돌고 돌아 지금쯤 사탄이 되었을 것인데,
한 생각 바꾸어 자기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니까 바로 보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불법이고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극한 불행의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마음 한 번 돌리면 바로 최고의 행복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심을 내고 있을 때는 인과의 법이 따르고 그건 절대 피할 수가 없지만,
한 생각을 놔버리면 일체가 다 끊어져 버리고, 여기에 해탈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역사 속에서 선지식들이 이것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집에 가시면 우선 큰마음 내시고, 남편을 무조건 이해해 보십시오.
남편이 늦게 들어오든지 어떻게 하고 들어오든지 '아이고, 참 잘했소' 이런 마음을 내보면,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이 늦게 들어와도, 내가 좋아지고 집이 좋아지고 세계가 좋아집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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