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강에서 계속)
베풀되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 : 보시 바라밀, 무주상 보시, 성인의 길, 보살의 길
육바라밀의 첫 번째는 ‘보시(布施) 바라밀’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얻으려고만 하고, 공짜로 먹겠다는 심보를 갖고 있으니 늘 괴롭습니다.
그리고 베푸는 것도 받을 것을 전제로 베푸니 거기에도 괴로움이 따라 붙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식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유도 다 바라기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너 낳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너한테 쏟은 만큼 남한테 했으면 얼마나 대우를 받겠나, 이렇게 생각하니 괴롭습니다.
뭔가 바라기 때문에 자식이 불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잘해서 부모 마음에 드는 것이 자식이 효자가 되는 길이지만,
부모가 자식한테 바라는 마음을 없애버리는 것도 자식이 효자가 되는 또다른 길입니다.
부모가 자식으로 인해 아무런 괴로움도 안 생기니 그보다 더한 효자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불효자가 되는 것은 자식이 잘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바라기 때문에도 그런 것입니다.
뭔가 바라면서 베풀었을때 바라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선 자기한테 손해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속박받고, 그로 인해 화나고 짜증나고, 그로 인해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사람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아야 됩니까?
그러니 바라는 마음을 갖지 말고 버리십시오.
베풀되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을 무주상보시라 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화나고 짜증나는 일도 없고 괴로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인의 길이고 보살의 길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보시 바라밀’입니다.
보시와 보시 바라밀은 다릅니다.
보시는 그냥 주는 것이고, 보시 바라밀은 그 준 결과에 대한 괴로움의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 보시(布施)
-. 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널리 사랑하는 것. 자신의 선근(善根)을 중생에게 베푸는 것
-. 재시(財施, 재물로서 도와줌), 법시(法施, 법을 설하여 줌), 무외시(無畏施, 마음의 안정을 얻게 해 줌) 등이 있음
-. 유상보시(有相,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있음)와 무상보시(無相, 도와주었다는 관념과 상이 없음)가 있음
지계 : 하고 싶더라도 하지 말아야 될 조건에서는 안해야 하고, 하기 싫더라도 해야 될 조건에선 해야 함
두 번째, ‘지계(持戒) 바라밀’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때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것은 우리들의 업식에서 나오는 것이니,
좋다고 하는 쪽으로 가고 싫다고 안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업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고 싶을 때 하는 조건이 되거나, 하기 싫을 때 안하는 조건과 맞으면 기분이 좋은데,
하고 싶을 때 못할 조건이 되거나,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할 조건이 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렇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괴롭게 됩니다.
하고 싶더라도 하지 말아야 될 조건에서는 안해야 하고,
하기 싫더라도 해야 될 조건에선 해야 하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계율을 지키려 하면 괴롭습니다.
담배 피우고 싶은데 못 피우게 하면 괴롭고, 법문 듣기 싫은 데 여기 앉혀놓으면 괴로운 것입니다.
지계란 계율을 지키는 것인데,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지계 바라밀’이 되지 않습니다.
지계 바라밀을 하려면, ‘좋다 싫다’는 것을 놔버려야 합니다.
‘좋다 싫다’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의지로 그것을 참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인데,
이렇게 계를 지키려면 힘들고 괴로운 것이니, 좋다 싫다를 탁 놔버려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아 졸린다, 그냥 자버리자’, 이게 범부중생이고
‘졸리지만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아침 예불해야지’ 이게 현인입니다.
‘일어나기 싫다’ 하는데 사로잡혀있으니 일어나려고 애쓰는 노력이 필요한데,
‘일어나기 싫다’ 하는 생각을 탁 놔버리면 그냥 싹 일어나게 됩니다.
‘고기가 먹고 싶으니 먹는다’ 이게 범부중생이고, ‘먹고 싶지만 참는다’ 이게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 먹으면 내 건강에 해롭다’ 고 생각을 바꾸면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생각을 놔버리면 이 사람은 계를 지키지만 지킨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지키는 것이지만, 본인은 지키는 게 아니라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채식이 좋아서 하고, 아침 예불이 재미있어서 하고, 참선이 재미있어서 한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청정하다고 하겠지만, 정작 본인은 청정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계 바라밀입니다. 계를 지켜도 전혀 괴롭지가 않습니다.
계를 지킬게 있으면 언젠가는 무너질 가능성이 있지만, 지킬게 없으면 무너질 일이 없습니다.
* 지계(持戒) : 모든 계율을 굳게 지켜 악업을 끊고 선업을 쌓아가는 것. 계율을 지킴에 의해 번뇌를 멸함.
세 번째, ‘인욕(忍辱)바라밀’
인욕은 참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은 자기 성질대로 하려하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합니다.
내가 화내면 다른 사람도 내게 화를 낼 것이고 내가 또 거기에 대해 화를 내게 되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또 화를 되받게 되니 화가 확대재생산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화내봐야 나만 손해다, 화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 참자’ 이렇게 됩니다.
참음으로 해서 재앙을 자초하지 않고, 화를 확대재생산하지 않습니다.
인욕을 하면 못 참는 것보다는 낫지만, 참는다고 해서 반드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착한 사람이 잘 참는데 저는 착한 사람이 더 겁이 납니다.
착한 사람은 꾸욱 참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따리 싸가지고 가버립니다.
자기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인 사람을 나쁘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최고로 착한 여자입니다.
착한 여자이기 때문에 참고 참으며 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랬을 것입니다.
서로 멱살잡고 싸우는 사람은 절대 칼로 찌르는 일이 없습니다.
이렇듯 참는다고 꼭 좋은 게 아니고, 참아서 병 되는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지 않는 게 낫다’는 말이 아니고, 참으면 안 참는 것 보다는 낫지만, 참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는 것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해탈의 길은 참을 게 없어야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마음을 내는 게 인욕바라밀이다
‘내가 잘했다’ 하는 생각이 없으면 용서할 게 없어집니다.
‘용서해준다’ 이 말은 자기가 잘났다는 말입니다.
불교에는 ‘용서해준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이건 현인 수준에서 하는 말입니다.
‘용서해준다’ 이것은 내가 잘나고 네가 못났는데 내가 너를 봐주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잘했다’ 하는 대신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는 게 인욕바라밀입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큰소리 칠 게 없습니다.
보살님이 컵을 여기에 놓으려 하는데, 떨어질 것 같아 제가 반대쪽에 놓으라고 합니다.
몇 번이나 얘기해도 보살님은 고집부리고 이 자리에 놓는데, 놓자마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거 봐요, 거기 놓지 마라니까!” 하면서 제가 화를 냅니다.
왜 화를 낼까요? 내가 잘했고 보살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근데 보살님이 저쪽에 놓으려 하는데 제가 자꾸 이쪽에 놓으라고 우기다가 컵이 떨어졌을 때엔,
똑같이 컵이 떨어졌는데도 화를 안내고 오히려 “아이쿠, 미안합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생기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잘했다 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이것은 화가 나는데 참는 게 아니라, 화가 안나는 것입니다.
참회를 한다는 것은 바로 인욕바라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 같이 사는데 시어머니가 맨 날 잔소리하고 간섭합니다.
옆집 사람이 볼 때는 “아이구, 저 잔소리 듣고 어떻게 사나, 그 며느리 참 대단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또 하나 가르쳐주시는구나,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러면 며느리는 참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욕바라밀이란 참는 게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 인욕(忍辱)
-. 박해나 고통을 참고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며, 제법(諸法)을 밝게 관찰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 자비를 우선하여 중생에 해를 끼치지 않음.
(제10강에 계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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