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강에서 계속)
반야 :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
여섯 번째, ‘반야(般若) 바라밀’
반야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치를 아는 게 반야입니다.
어리석어 이치를 모르고 그냥 쥐가 쥐약을 먹듯이 살아가는 게 범부중생,
인과의 이치와 도리를 알아서 살아가는 게 현인,
법이 본래 공한 줄을 알아서 걸림없이 세상을 사는 것을 보살 또는 성인 이렇게 말합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모두다 바라밀이 되는 게 아니고, 법이 공한 줄 알아야 반야바라밀이 됩니다.
* 반야(般若, 지혜) : 나쁜 소견과 삿되게 아는 것을 버리고 밝고 바른 지혜(반야)를 얻는 것
제법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믿고 실천함
주되 받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보시 바라밀입니다.
주고 받는 것은 네 것과 내 것이 있을 때의 개념입니다.
본래는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냥 한 물건일 뿐이다, 이것이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는 적게 갖거나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니 줄래야 줄 수도 없고 받을래야 받을 수도 없고,
줘도 복이 안 되고 받아도 빚이 안 되고 다만 인연에 따라 쓰일 뿐입니다.
계를 지킬게 없으면 지계 바라밀이 됩니다.
술을 먹지 말아야 되는데,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술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술 안 먹어야 된다는 계율을 지킬 것도 없고 지키더라도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해탈의 세계는 먹어야 된다는 생각도 안 먹어야 된다는 생각도 다 놔버린 것이니,
술이라고 하는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는 게 아니라, 술 먹고 싶다는 욕구에서 놓여진 세계인 것입니다.
참을 게 없어지면 인욕 바라밀이 됩니다.
나는 잘하고 남편이 잘못했지만 내가 참았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잘못했더라’ 이것은 완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내가 잘하고 남편이 잘못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옳고 그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게 없는 가운데 늘 옳고 그른 게 나타납니다.
서울 가는 길은 정할 수가 없어, 인천에서는 동이 되고 수원에서는 북이 되듯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되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이 공하기 때문에 또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진도 똑 같습니다.
좋아해서 이루어지는 차원을 넘어서, 좋고 싫고를 떠나버려야 합니다.
좋고 싫고를 떠나버리면 얻고자 하는 생각이 끝났으니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인연을 따라 무엇이나 해도 됩니다
절에서 행자교육 시킬 때 기도문으로 "무엇이든지 ’예‘하고 합니다" 이렇게 줍니다.
행자는 기도문을 받으면서 ‘예’라고 대답했어도, 30초만 지나면 ‘예’가 안 됩니다.
겉으로는 ‘예’ 해도 속으로는 ‘아니야’ 이렇게 되는데, 이게 어느 순간 ‘예’가 되면 공부가 확 달라집니다.
‘예’ 하고 무엇이든지 인연을 따라서 그냥 하고, 필요에 의해서 쓰여야 합니다.
‘필요에 의해서 쓰인다’ 하면 ‘내가 어디 필요할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쓰는 사람한테 맡겨야 하고 스스로는 늘 쓰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걸레’는 늘 빨아진 상태로 있다가, 방을 닦을 때는 때를 묻혀야 되고, 물에 빨 때는 때를 내놓아야 됩니다.
인연에 따라서 묻혀야 될 때는 묻히고 내 놔야 될 때는 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놀러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허우적대는 게 범부중생이고,
풍랑이 무서워 방파제를 쌓아놓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노는 게 현인이고, 소승의 길입니다.
방파제를 쌓으면 파도에 빠져 허우적대는 범부중생에 비하면 좋은 세계이기는 하지만,
범부중생은 파도와 파도 사이에 갇혀있는 것이고, 현인은 방파제 안에 가려져 있는 것이니,
범부중생이 3초 간격으로 허우적댄다면, 현인은 30년쯤 지나 방파제가 무너지면 도로아미타불이 됩니다.
이처럼 현인은 계율로 방파제를 삼고 있지만 그건 늘 무너질 위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배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듭니다, 이게 원력입니다.
그러니 파도가 아무리 쳐도 배가 꿈쩍도 안합니다, 원력을 크게 내는 것입니다.
또는 윈드서핑 타듯이 바람부는 대로, 물결 따라 노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은 안 빠져야 되는데 빠지고, 현인은 안 빠지기 위해서 울타리를 치고,
보살은 원력을 크게 내든지 아니면 그 이치를 깨우쳐 물결을 타고 재미있게 놉니다.
이 세 가지는 다 물에 안 빠져야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에 빠지면 잘못하는 것이고 물에 안 빠지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법계인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안 빠져야한다는 생각도 버려버립니다.
배타고 나가거나 윈드서핑 타며 즐기다가, 물에 빠지면 물속에 들어가 조개 주워오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실수를 안해야 되겠다 할 필요도 없고, 실수가 곧 성공이 되고 번뇌가 보리가 되어버립니다.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그 상황이 벌어지면 거기에 맞춰 좋게 써버리는 것입니다.
해녀는 일부러 물에 들어가 조개를 줍지만, 보살은 일부러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물에 빠지는 인연이 닿으면 조개를 줍고, 안 빠지는 인연이 닿으면 장구치고 노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불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범부를 넘어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인에 머무름도 넘어서서,
인과의 법칙을 따르되 거기 매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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