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은,
‘큰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주체는 비구, 비구니이지만,
대승불교에서 수행의 주체, 교단의 주체, 상가의 구성원은 보살입니다.
‘보살’이란 ‘깨달은 중생’이란 뜻으로, 비록 스님이라 할지라도 깨달음의 지혜가 열리지 않으면 보살이 되지 못합니다.
반야심경은 보살이 어떻게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도달하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승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의 고통을 다 보고 다 구원하리라 하는 원을 세우신 분이고,
지장보살은 지옥에 한 중생이라도 남아있다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 하는 원을 세우셨고,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내 병도 낫는다고 하셨고,
법장비구는 48 대원(大願)을 세우고 극락세계를 완성하니 성불하여 아미타불이 되었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란 먼저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중생을 구한다거나,
한쪽으로는 수행을 하고 다른 쪽으로는 중생을 구한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중생의 아픔을 온전하게 껴안음으로 해서 나의 괴로움과 번뇌가 사라지는 대승보살의 수행법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인데,
‘관세음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닦으실 때에’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반야바라밀다 수행법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바라밀다 수행법(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전체를 말할 수도 있고,
그 여섯 가지 가운데 마지막인 ‘반야 바라밀다’일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대승보살이 닦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 수행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바라밀다’란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 즉 ‘열반에 이르고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데는 여섯 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육바라밀’이라 말합니다.
범부중생 : 인연법을 모르고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고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
현인 : 인과의 이치를 알아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
성인 : 인과의 도리를 한 단계 넘어서서 무위의 행으로 나아가는 사람
마음씨 쓰는 것을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을 분류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연법을 알지 못하고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고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범부중생이라 하고,
눈을 뜨고 주위 사람까지 다 살펴보면서 인과의 이치를 알아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현인이라 하고,
인과의 도리를 한 단계 넘어서서 무위의 행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성인이라 합니다.
범부중생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방향은 ‘얻는 것’에 있기에, 범부중생은 뭘 얻어야 기뻐합니다.
재물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고, 도움받아야 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귀여움을 받아야 기쁜데,
사랑을 못 받아서 외롭고, 보호받지 못해서 쓸쓸하고, 도움받지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기분이 좋고, 바라는 게 자기 뜻대로 안되면 기분이 나쁩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 기분이 좋을 때 행복하다 하고, 뜻대로 안 되어 기분이 나쁠 때 불행하다 합니다.
오래 살고자 하는데 일찍 죽어서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데 헤어져서 괴롭고,
미운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는데 같이 있어서 괴롭고, 자기 뜻대로 얻고자 하는데 얻어지지 않아서 괴롭고,
좋은 것은 항상하고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쉽게 변해버려서 괴롭습니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쁘다’, 우리는 이런 인생관과 행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려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원인을 지어야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그런 원인은 짓지 않고 어떤 결과만 바랄 때가 있습니다.
공부는 안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하고, 일은 안하면서 돈은 많이 벌려고 하는데,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나쁘면 좋은 대학 가고 싶은 욕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을 하기 싫은 욕구가 이루어지면, 돈을 많이 벌려는 욕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소의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필히 내려가는데, 우리는 양쪽 다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쥐가 쥐약을 먹을 때는 살고자 먹는 것이지만, 먹으면 죽게 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먹으면 죽는다’고 말리지만, 쥐는 쥐약인 줄 모르기 때문에 먹습니다.
그러니까 쥐약을 먹으면 ‘먹는 바람’은 이루어지지만, ‘사는 바람’은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을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바라며 살아갑니다.
농사짓기 싫지만 추수는 많이 하고 싶고, 일은 하기 싫지만 월급은 많이 받고 싶고,
능력은 없는데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고, 자기 성격은 못되었지만 성격 좋은 사람 만나고 싶고,
남을 사랑 안 하면서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고, 남은 안도와주면서 도움을 받고 싶고,
자기만 생각하며 이웃에 눈도 안 돌리면서 어려울 때 이웃이 자기를 도와주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하느님을 찾고 굿을 합니다.
범부중생은 자기만 쳐다보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웃 사람까지 같이 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같이 보면 어떤 게 어리석은 것인지 어떤 게 지혜로운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하는 행동이 옳은 지 그른 지는 며느리가 아들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아내에게 하는 행동이 옳은 지 그른 지는 사위가 딸에게 하는 것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위가 술 먹고 늦게 오고 오입하고 돌아다니면 우리 딸이 어떨지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니, 내가 하는 것이 어리석은 줄 깨달아야 합니다.
가을에 추수를 하려면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름을 줘야 되겠다,
내가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면 지금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 되겠다,
좋은 말을 들으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해줘야 되겠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남편을 사랑해야 되겠다,
내 아들이 효자가 되려면 나도 내 부모에게 효자가 되어야 되겠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이런 행동을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면 두 가지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남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은, 내가 남을 돌보지 않은 결과이니 그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든지,
그런 과보를 받기 싫으면 앞으로는 이런 원인을 짓지 말고 남을 도와주는 인연을 지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현인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든 절에 다니든 아무데도 안다니든 관계가 없습니다.
범부중생은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려 하거나 조금 줘놓고 많이 받으려고 하고,
현인은 주고 받으려 하는 것이 범부중생과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받는다는 것입니다.
범부중생과 현인의 행복은 받는데 있습니다.
근데 받지 못했을 때 가끔은 현인이 범부중생보다 더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범부중생은 원하는 게 안 되면 괴롭기는 하지만, 안 될 확률도 있다는 걸 아니 충격이 적은데,
현인은 지으면 반드시 받는다는 인과의 도리에 철두철미하므로 결과가 틀어지면 크게 후회합니다.
갑자기 가뭄이 들어 곡물이 다 말라 죽거나, 홍수가 나서 논밭이 다 떠내려가 버리면,
농사 안 지은 사람보다 농사 열심히 지은 사람이 더 후회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놀기나 할 걸 이렇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수행이 안 되면 여러분들보다 스님들이 더 후회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재미있게나 살 걸 괜히 머리 깎고 들어왔다고 후회합니다.
범부중생은 자기가 바라는 게 이루어질 확률이 낮으니 맨 날 괴로움 속에서 살지만,
현인은 그 확률이 높으니 전체적으로 괴로움은 적지만 원리대로 안 되면 엄청나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또 범부중생은 자기도 그러니 남이 좀 엉뚱한 짓을 하더라도 대충 넘어가는데,
현인은 자기가 안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보면 화가 나서 못 견딥니다.
그러니 현인도 괴로움의 정도에 있어서는 범부중생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얻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얻으려는 생각을 버려버리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범부중생은 농사도 안 짓고 추수를 바라거나 남이 추수해 놓은 것까지도 가지려고 하고,
현인은 열심히 농사지어 자기 것은 확실히 자기가 챙기려고 하지만,
보살은 밭 갈고 씨 뿌리고 거름 주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추수했어도, 자기가 갖는게 아니라 남을 줘버립니다.
어차피 남 줄 거니까 많이 나와도 좋고 안 나와도 그만, 그 결과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포자기하고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짓되 잘되고 못되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봄날에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밭에 나가 씨 뿌리고 싹트는 것 보는 게 더 재미있고,
풀 뽑아주고 퇴비주어 자라는 걸 보면서 즐거워하고, 가을에 벼를 베면 더욱더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결과란 인생을 산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은 과정을 중요시하고, 순간순간 그 자체가 그대로 자신의 삶입니다.
그 결과물은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줘버립니다.
범부중생은 주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하고, 현인은 주고받으려 하고,
성인은 주기만 하고 받으려 하지 않으니, 범부가 성인을 보면 바보같이 보입니다.
자기 가족이나 남편이 이런다면 바보라고 생난리가 나겠지만,
그래도 얻어먹을 게 있으니 범부중생은 성인을 좋아합니다
즉 범부중생은 성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지만 성인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성인이 하는 것이 무주상보시라 하는데,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아이를 막 낳았을 때 여러분들도 이렇게 했습니다.
갓난아기한테는 무엇이든지 다 주고 어떤 행동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애기가 크면서부터 바라는 게 생기기 시작하고, 그것이 점점 커지면 부모자식 간에도 원수가 되는 겁니다.
주고받는 것은 바라밀이 될 수 없습니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내가 상대에게 속박을 받고 내가 그 사람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니 늘 눈치보고 삽니다.
그것은 얽매임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얽매임은 마치 소의 코를 뚫어 끄는 대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바라는 마음을 놔버리면 고삐를 풀어버리는 것과 같고 멍에를 풀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행과 불행을 좌우하지 않게 됩니다.
거기에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 열반의 길, 해탈의 길이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에게 베풀어 주려하고 중생을 사랑하고 중생을 보호하려 하니 괴로울 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중생은 뭐든지 받으려하고 기대고 얻으려하니까 늘 괴롭고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9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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