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에서 계속)
우리는 눈을 감고도 전에 보았던 것을 재생시킬 수가 있는데, 그것은 저장되어있던 정보가 표면의식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즉 바깥 경계와 부딪히면서도 작용이 일어나지만, 그런 부딪힘 없이 눈감고 귀 막고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제6식이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6식이 깨어나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정상적으로 가동이 됩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다 해서 우리들에게 잠재되어있는 근본 ‘식’마저도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의식이 없다가도 어떤 충격을 받으면 깨어나 다시 재생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면 의식을 잃었다가도 깨면 다시 복원되는데, 사람이 죽으면 의식도 따라서 없어져 버립니다.
제8식 : 육신이 사라져도 남아있는 것으로 윤회의 씨앗이 됨
비디오테이프는 태워버리면 거기에 저장된 정보가 다 없어져 버리지만,
제8식은 육신이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어, 이것이 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이 윤회라는 것은 다른 각도에서 조금 더 과학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습관을 손자가 닮으면 우리는 흔히 피는 못 속인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릴 때 그걸 본받아 기록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낳자마자 일본에 보내 일본사람이 키운다면 아이는 일본사람이 되지만,
여러분이 그 아기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일본식으로 생활하며 키운다면 아이는 일본사람과는 다를 것입니다.
일본에서 키워 한국말을 몰라도 한국에 대한 정서가 있다면 ‘역시 피는 못 속이구나’ 라고 느끼지만,
사실은 엄마의 정보가 아이에게 전달되어서 그런 것이지 그 정신적인 정보가 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정보를 어머니로부터 받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할머니를 못 봤을지라도, 정신세계를 분석하면 할머니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할머니에 대한 정보가 어머니에게 있고, 그것이 또 나에게 넘어오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정보의 전달은 고등교육이나 대학교육을 받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나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이나, 애기를 낳아서 세 살 때까지 키울 때의 행동양식은 거의 같습니다.
애기를 낳아 키우는 데는 대학공부가 별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대학 나왔다고 심성이 깔끔한 것도 아닙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왔어도 원래 깔끔한 사람이 있고 대학원을 나왔어도 지저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습관이 여러분들 몸에 배어 있다가,
아기를 키울 때 그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전달되지, 자기가 배운 고상한 지식이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울면 신경질부터 내는 것은 교육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보통의 범부중생들은 남편이나 친척이나 남들에게는 약간 긴장하고 예의범절도 갖추지만,
아무 의식도 없는 갓난아기한테는 자기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을 그대로 합니다.
그런 행동방식은 자기도 갓난 애기 때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고 또 아이에게 거의 그대로 전수됩니다.
물론 어릴 때 그런 습관이 있다 하더라도 좋은 교육을 받으면 조금은 변할 수도 있지만,
꼭 대학교수 집안에서 머리 좋은 사람이 태어나고 이런 것은 아닙니다.
즉 유치원 때부터 착실히 교육을 시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갓난아이 때 업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자아가 어떻게 형성이 되느냐가 그 아이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돈을 잘 번다든지 지식을 많이 쌓는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바깥 경계와 부딪혔을 때 느끼는 Feeling과 생각하는 방식은 갓난아이 때 거의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주 근원적인 종자와 같은 업식이 있고, 그걸 중심으로 외부의 정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란 후에 저장된 외부의 정보들은 새로 배운 것으로 금방 바꿀 수가 있지만,
갓난아이처럼 뇌가 백지상태일 때 새겨진 근원적인 정보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다고 해도 잘 바뀌지는 않습니다.
낳자마자 돼지우리에서 크다가 세 살되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데려온다면, 이 아이는 아무리 키워도 사람으로 돌아오지가 않고,
세 살 때까지 사람 속에서 살다가 밀림에 버려졌다면 그는 동물 비슷한 행동을 할지라도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은,
똑같은 사람도 갓난아이 때 어떤 정보가 각인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사라는 것은 마치 콩을 심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좋은 콩 종자를 택하는 것도 농사짓는데 중요하지만,
같은 종자라도 어떤 밭에서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날 때의 근본 종자가 인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아무리 종자가 좋아도 자라나는 환경이 나쁘면 훌륭한 사람이 되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종자도 중요하고 환경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종자라는 것은 자기 업식이고, 환경이란 것은 우리가 만나는 경계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종자의 변화도 필요하고 주위환경의 변화도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자기의 업식을 바꾸려는 생각은 안하고 계속 환경만 탓합니다.
수행이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업식, 자기 종자를 바꾸는 것
보살이 환경을 개선해 줌으로써 중생의 고뇌가 적어진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기 업식을 바꾸는 것,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기 종자를 개량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중생의 환경을 바꿔주어 중생의 고뇌를 적게 해주는 것입니다.
똑같은 업식을 갖고 태어나더라도, 북한이나 아프리카에서 자라는 것과 한국이나 미국에서 자라는 것이 다른 것처럼,
환경이 좋으면 종자가 안 바뀌더라도 훨씬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환경을 개선하는 행동과 자기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같이 해나가야 됩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며,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변화시켜 행복해진다는 것은 타인에게는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 되고,
환경을 변화시켜 다른 사람이 이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것은 나에게 환경이 좋아지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남편에게 잘해서 남편이 기분 좋아 웃으면 애들도 웃게 되고 그걸 보는 나도 좋아지고,
그들이 인상 쓰고 찡그리고 있으면 그걸 보고 있는 나도 인상 쓰고 찡그리게 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생에게 이롭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시간까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 또 인연과법에 대해 배웠습니다.
인연과법에서 ‘인’이 직접적인 씨앗이라면 ‘연’은 주위 조건인데, 인과 연이 어떠냐에 따라 그 과보가 달라집니다.
인연과법의 ‘인’은 ‘식’이고, ‘연’은 오온에서는 ‘색’, 십이처·십팔계에서는 ‘경’이 됩니다.
이 둘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게 수·상·행이고, 그 ‘행’으로부터 열매 맺어진 게 다시 ‘식’이 됩니다.
나의 ‘인’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연’을 개선하는 것이 됩니다.
감옥 갔다 온 도둑이나 강도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도와주고 안아준다면,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도둑맞고 강도 맞을 확률이 줄어들 것입니다.
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런 것을 놔두면 내가 그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부자는 한 집뿐이고 주위에 다 가난한 사람만 있다면 그 부자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부잣집 대문간에 거지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올 것이니 내쫒아야 되고,
밤에 칼 들고 총 들고 뺏으러 올수도 있어 불안에 떨어야 하니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주위가 고루 다 잘 살아야 우리 집 문전에 거지도 없고, 내가 길거리에 다녀도 강도당할 염려도 없고,
대문을 열어놓고 다녀도 도둑맞을 위험도 작고,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북한을 돕는 것은, 우리가 처한 위험을 제거하는 방식 중의 하나입니다.
북한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거지가 구걸하는 것과 비유될 수 있지만,
상황이 더욱 더 악화되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빌 때는 결국 우리까지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도와주면 북한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손해나고 저 사람들만 좋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런 원리가 들어있는 게 인연과의 법칙이며, 십이연기의 법칙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패고 행패를 피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것도 업식으로 보면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
아내의 업이 아주 강할 때엔 남편이 계속 치이는데, 치인다는 것은 단명할 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업을 벗어나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데 이럴 땐 아내가 딱 엎드려 숙여주면 이 병은 곧 낫습니다.
이런 치료법을 얘기했다가는 여성운동하는 사람에게 혼나겠지만 실제로 우리 절에서 그런 병들을 많이 고칩니다.
이치를 모르고 한다면 억울하고 분한 것이겠지만, 이치를 알고 하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말썽이 많은 아이가 있다면, 아이를 교화시켜야 될 때도 있고 반대로 엄마를 수행시켜야 될 때도 있듯이,
남편이 포악할 때 남편을 교화시켜야 될 때도 있고, 거꾸로 착한 아내를 참회시키고 교화시켜야 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인연이 맞아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내가 좋아서 마약을 먹다가 중독되었다면 그것을 고칠 의무는 마땅히 자기한테 있지만,
강제로 납치되어 마약주사를 맞아 중독되었더라도, 고칠 의무 또한 자기한테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든 나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든 관계없이 현재는 내 습관이 되었으니,
이대로 가면 나에게 손실이고 내가 죽음으로 가는 것이니, 이것은 나의 문제이고 내가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나쁜 환경을 만들어 내가 나쁜 습관에 들었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나의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니,
자기가 개선해야 자기 인생이 행복하지, 남편 탓하고 주위 탓하고 나라 탓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수행은 세상의 법률이나 논리와 전혀 다를 수가 있다
길을 가다가 어떤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충격은 그 남자를 죽여 버린다고 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충격은 이미 나의 것이 되었으니 벗어나는 것도 자기가 해야 하는데,
그런 피해에 사로잡혀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자기가 더렵혀졌다는 의식, 죄의식, 결혼해서도 숨겨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자녀를 낳아도 그 상처가 자녀에게 옮겨가게 되니 이걸 깔끔하게 청소를 해야 됩니다.
비록 그런 있이 있었을 지라고 그것이 나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하느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어준다 해도 내가 성스러워질 수도 없고,
그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어도 내 몸은 더러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입니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空) 것이므로 현실에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며,
본래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조금도 더럽힐 수가 없는 줄을 알게 되면, 나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성폭행범)을 벌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 범죄는 한 여자의 평생을 망치는 극심한 피해를 주는 것이니,
내가 피해를 입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더 이상 그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잡아서 처벌해야 됩니다.
보살행이란 그런 사람을 처벌하는 것마저도 세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내 분풀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다면 벌을 줘야 되지만, 그를 미워해서 징벌하면 안 되고, 더 많은 피해를 막기 위해 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호랑이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호랑이가 내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 호랑이를 죽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아픔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없어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호랑이를 잡아야지,
내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 너를 죽이겠다는 것은 세속의 보복의 원리이지 수행은 아닙니다.
(제21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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