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3. 근본교리

[법륜스님의 '근본교리'] 제18강 오온, 십이처 - 세 번째

상원통사 2015. 4. 7. 22:37

(~~ 제17강에서 계속)


여러분들이 여기서 법회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는데 대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분명히 문을 잠그고 나왔으니 집에는 아무도 없을텐데 대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 활짝 열린 대문(色)을 눈(眼)으로 보면, 즉 색과 안이 만나면 인식작용이 일어납니다.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인식작용은 가슴이 쿵덕하는 나쁜 느낌(Feeling)일 것입니다.
도둑놈이 들어왔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想, 빨리 들어가 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行,
도둑이 들면 안 되는데 이것은 識입니다.
대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는 순간 이런 작용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봤더니 현관에 신발이 꽉 차 있습니다.
이때는 신발이 色이고 그걸 보는 것은 눈(眼)입니다.
신발들을 보자 도둑이 들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안도의 느낌(受)이 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안에서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聲) 느낌(Feeling)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일까 하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방안으로 뛰어 들어 가려는데,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엄마, 아빠 돌아가셨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는 눈에 보이는 것과 소리로 들리는 것이 한꺼번에 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까 한쪽에 남편이 누워있고 이미 천으로 덮어놨습니다.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둘이서 대판 싸웠습니다.
그래서 사니 못사니 하고, 속으로 ‘팍 죽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생각하며 나왔습니다.
그랬는데 진짜로 죽어버렸으니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다 날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사나’, ‘참았어야지 왜 싸웠나’, ‘살아만 난다면 다시는 안 싸워야지’,
이렇게 느낌도 일어나고 생각도 일어나고 의지작용도 일어나고 분별작용도 일어날 것입니다.
‘여보, 살아나기만 하면 다 용서해주고, 당신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할께요!’
이렇게 울면서 넋두리하고 있는데, 저 뒤에서 남편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립니다.
그 순간 기분이 나빠지면서 ‘이거 속은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남편이 “여보, 지금 말한 것 진짜지?” 이러면서 딱 일어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만 난다면 내가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살아나니 ‘이제 이게 사람까지 놀리네!’ 라며 도리어 버럭버럭 화를 낼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한 번 쭉 돌이켜 보십시오.
대문이 열려 있어 도둑이 들어왔나 해도 도둑도 아니고,

남편이 천으로 덮여 있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작용은 진실과는 관계없이, 경계(육경)와 눈(육근)의 작용에서 그냥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경계에 팔려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 인생이란 순간순간 일어나는 경계에 팔려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의 존재, 자기의 삶이 굉장한 것 같지만, 이렇게 분석해 보면 별 것 아닙니다.
우리는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같고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나무토막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군림을 당하는 존재, 이걸 중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굴리고 사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돈의 굴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경계를 구경하고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게 아니고, 경계 속에 늘 굴림을 당합니다.
여러분들의 행과 불행은 다 경계에 따라 일어납니다.
누가 잘 해주면 기분이 좋고, 잘 못해주면 기분이 나쁜 것은 다 경계 따라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계를 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잘 아니까,
달콤한 말 해주고 그런 것 보여주고 그런 서비스 해주면 좋아 어쩔 줄 모르는데, 경계따라 속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근을 여섯 개의 창문이라 하고, 육경을 육적(여섯 도둑)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여섯 도둑이 창문을 넘어 방안으로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고 살고 있으니,
자기를 찾으려면 창문단속을 잘해야 한다, 즉 경계에 팔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색법(色法) : 바깥 경계가 우리 삶에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있음
오온설(五蘊說) : 마음에 더 중심이 있음

십이처설은 바깥 경계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에 색법이라 하고,
오온설은 마음에 더 중심이 있기에 심법이라 하지만, 둘 다 우리들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십이처설은 바깥의 정보가 우리 내부로 입력되면서 그 경계따라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표현한 것이고,
오온설은 바깥경계가 우리 내부에 저장되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작용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한 것인데,
이 두 가지를 겹쳐서 다시 설명을 한 것이 십팔계설입니다.


근(根)과 경(境)이 부딪칠 때 식(識)이 작용함
십팔계설에서는 육근은 다만 창문에 불과하고, 우리 내부에 식이 있다고 봅니다.
즉, 근과 경이 부딪혀 반응이 일어날 때 그 인식작용의 주체는 식이 하는 것입니다.
담배연기(境)가 코끝을 스칠 때(根) 기분 나쁘거나 기분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안에 식(識)이라고 하는 인식주체가 있어 Feeling이 이렇게도 일어나고 저렇게도 일어난다,
이렇게 육경과 육근과 육식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육식(六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육식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보는 작용을 일으킬 때는 안식, 듣는 작용을 일으킬 때는 이식,
냄새 맡는 작용은 비식, 맛보는 작용은 설식, 감촉의 작용은 신식, 법을 인식할 때는 의식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오온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의 쌓임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 곧 오온입니다.
다섯 가지의 쌓임이란 물질세계와 느낌, 생각, 의지, 분별의 쌓임이고,
이것이 계속 어떤 작용을 하는 게 바로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생각·의지·분별은, 내면에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는 들어와 단지 저장되고 분류되고 재생되지만,
이미 저장된 정보가 있을 때(識) 외부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느낌(수, Feeling)이 일어납니다.
또 새로 들어온 정보는 그 전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와 관계 맺으면서
어떤 연상(생각)을 일으키고, 의지작용이 일어나고, 재분류작업이 일어나게 되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이 생기고, 어떻게 할지 말아야 될지 하는 의지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작용은 수·상·행, 즉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바깥에는 경계가 있고 자기 내면에는 이미 쌓인 업식이 있어,
경계가 바뀌면 다른 반응이 일어나고, 자기 업식이 달라도 다른 반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늘 경계에 부딪히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업식을 쌓고, 새로운 업식이 새로운 경계에 부딪히면 또 새로운 업식을 쌓게 됩니다.
인생이 이렇게 굴러가는 줄 알게되면, 우리는 좋지 않은 과보에 대해 막을 위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느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행동은 멈출 수 있는 것입니다.
행동을 멈추거나 행동을 바꾼다는 것은, 업을 바꾸는 것이고 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식을 바꾼다는 것은 업장이 소멸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느낌을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생각도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만,
의지를 갖고 행동을 바꾸면 업식도 바뀌니까 나중에는 느낌도 바뀌게 됩니다.

식(識)은 아주 깊이 저장된 식으로부터 바깥에서 분별을 일으키는 식까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반응하는 작용을 중심으로 볼 때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있고,
심층에서부터 저장되어있는 상관관계로 볼 때는 ‘제8 아뢰야식, 제7 말라식, 제6 의식’이 있습니다.
현상계는 우리 내면에 있는 깊은 심식작용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은 최근까지 심식의 밑바닥에 깊은 작용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프로이드에 와서야 잠재의식이 있느니 무의식이 있느니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서양의 철학은 경계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경계에 따라 팔리는 것을 논하고 그것이 인생인줄 알았지만,
불법은 우리의 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았기 때문에 서양 철학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철학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끝내지만,
불법은 설명할 뿐만 아니라 분석하고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에,
불교는 철학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을 바꾸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는 분석(논리와 철학)은 없고, 느낌(수)만을 중요시하고 느낌에 의해 움직이니까,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있는데 그게 왜 바뀌는 지 그런 원리는 잘 설명하지 않습니다.
즉 계율을 정하고 행을 통해서 바꾸고, 느낌에 따라가며 바뀌지만 왜 바뀌는지를 모르니까
자기가 의지를 갖고 하는 것은 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자신이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느낌이 바뀌는 것은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신의 섭리라고만 설명하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공부하고,
어떻게 해야 우리의 과제를 풀 수 있는 지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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