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근본사상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에는 연기적 인식론인 십이연기법과 연기적 실상론인 삼법인이 있다,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데는 네 가지 성스러운 길이 있고(사성제),
그 실천수행법이 중도인데, 중도에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가 있다,
근본교설은 이렇게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이고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세월이 흘러가면서 불교의 사상은 더욱더 풍부해져 갔는데,
오늘 강의할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은 근본불교에 넣을 수도 있고 소승불교 교리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유위법(有爲法, 함이 있다) :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무엇인가 찌꺼기가 남음
무위법(無爲法, 함이 없다) :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결과에 아무런 흔적이 없음
법에는 유위법과 무위법이 있습니다
유위법이라는 것은 함이 있는 법이고, 무위법은 함이 없는 법입니다.
함이 있다는 말은 그 법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면 무엇인가 찌꺼기가 남는다,
즉 습이 남고 업이 지어지는 법이기에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유위법은 생멸(生滅)이 있는 법으로, 인연이 있어서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는 법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상계의 제법이 바로 유위법입니다.
반면에 무위법은 함이 없는 법입니다.
허공에다 막대기로 점을 찍으면 흔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결과에 아무런 흔적이 없는 법을 무위법이라 합니다.
무위법은 어떤 행위의 결과로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 법이니 생멸(生滅)이 없는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근본은 무위법(無爲法)이다
제현상계는 유위법에 속하고, 그 현상계의 근본은 무위법에 속합니다.
바다에서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생겨났다 사라지니 생멸이 있는 유위법이고,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란 단지 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일 뿐,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무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제(苦諦)와 집제(集諦) : 유위법
사제로 설명을 한다면 고제와 집제는 유위법에 속합니다.
지금 내게 괴로움이 있다면, 이 괴로움은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어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중생계)에 살면서 어떤 원인을 짓게 되고 또 그 결과가 나타나는데,
지은 업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고, 지은 업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받는 갖가지 괴로움은 그것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 때문에 나타나는 것인데,
그 지어진 원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지금 괴롭다고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타나게 되고, 인연을 짓기 때문에 그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 차별현상계가 움직이는 법입니다.
이 차별현상계를 잘 살펴보면, 제행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소멸합니다.
‘인연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본래(인연이 형성되기 전)는 없었다’는 것이니,
근본으로 돌아가 출발하는 점에서 그 씨앗을 없애버리면 지금의 결과도 사라져버립니다.
멸제(滅諦)와 도제(道諦) : 무위법
멸제와 도제는 무위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옆집 사람이 밥을 좀 달라고 해서 자기 집에 있는 밥을 한 그릇 퍼서 주고 나면,
내 것을 주었으니 ‘고맙다’거나 ‘나중에 갚겠다’라는 인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그 과보를 생각하는 것이 차별현상계의 제법입니다.
원인이 있고 그 뒤에 과보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인연법(유위법)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기대심리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 방이 답답하니 숨 좀 쉬어도 되냐고 묻거나, 길가던 사람이 동네의 우물물 좀 먹어도 되냐고 물을 때,
‘그러세요’ 라든지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엔 아무런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때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어 숨을 쉬거나 물을 먹더라도 분별심이 생기지 않는 것을 무위법이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남편에게 뭔가를 해줄 때 보상심리를 갖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것도 말로는 아무런 기대함이 없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자식을 키워서 나중에 호강하려는 보상심리가 밑바닥에 깔려있으니,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더 안 좋으면 ‘저럴 줄 알았으면 숫제 낳지를 말걸’, 이렇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돈 벌려고 주식투자를 했다가 돈을 잃어버리고 본전 생각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엔 자식이 여러분들에게 큰 고통이 되는데, 이런 것이 함이 있는 법(유위법)입니다.
기쁜 일이 생기는 것은 좋은 인연을 지어서 좋은 과보를 받는 것이고,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은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유위법입니다.
그러나 함이 없는 행위(무위법)를 했다면 그런 행불행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됩니다.
그 무위의 행에서 오는 기쁨이 바로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이런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인 줄 알고 제법이 무아인 줄 알면 우리는 아무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허공에 지팡이로 점을 찍어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것처럼,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내 생각이 옳다고 할 것도 없다면,
행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아무런 집착이 없어 그 과보가 남지 않게 되며,
거기에는 지옥도 없고 천당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 이것이 무위법입니다.
오온(五蘊) : 다섯 가지(色·受·想·行·識)의 쌓임
색(色) : 이 세상에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수(受) : 인식 작용, 느낌
상(想) : 정보를 수집, 저장, 재생시키는 작용
행(行) : 의지적 행위
식(識) : 인식의 주체
다음은 오온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온의 온(쌓을 蘊)은 쌓는다는 뜻이니 오온이란 ‘다섯 가지의 쌓임’이란 뜻입니다.
‘나’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인가 변하지 않고 분해될 수 없는 나만의 나, 영원한 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구분이 되는 나만의 나, 변하지 않는 나, 이런 것들을 아트만(ātman)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나가 있고, 그런 ‘나’가 잘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못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
즉 업을 짓는 주체이고 과보를 받는 주체로서의 ‘나’가 있어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간다,
너와는 별개인 ‘나’가 태어났고, 어릴 때도 그것은 ‘나’였고, 지금도 그것은 ‘나’이며, 늙어도 그것은 ‘나’이다,
내가 죄를 지어 감옥에 가도 ‘나’는 그대로 있고, 개과천선하여 성인이 되어도 ‘나’는 그대로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나’는 이런 것이며, 그걸 중심으로 우리의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나’란 다섯 가지 쌓임이고, ‘일체(우주 삼라만상)’도 다섯 가지 쌓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온의 다섯 가지는 색·수·상·행·식인데,
색(色)이란 우리들의 육체까지도 포함한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물질세계를 말합니다.
빛깔과 모양도 색이고, 소리도 색이고, 향기도 색이고 맛도 색이고 감촉도 색입니다.
이렇게 인식하는 대상을 색이라고 한다면 인식하는 주체의 근본은 식(識)입니다.
인식의 주체인 식과 인식의 대상인 색이 만나면 거기에 인식작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인식작용이 느낌(Feeling)이며 이를 수(受)라 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그것을 저장하고 재생시키는 작용을 상(想)이라 하고,
뭘 해야 되겠다고 하는 의지적인 행위를 행(行)이라 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런 다섯 가지의 쌓임입니다.
(제17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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