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라 하면 경포대가 있고 오죽헌이 떠오르지만,
'강릉부 관아'는 아는 이도 별로 없고 찾는 사람도 드물어서일까,
넓은 관아에 딱 한 사람있는데 바로 중대청 옆마당에서 민들레를 캐고 있는 아주머니,
말을 걸었더니 방문객이 없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며 겸연쩍은 미소를 띄우며
일손을 멈추고 이곳 내력을 이야기해주시는데 바로 이곳의 문화해설사이셨습니다.
여기는 강원도 강릉시 명주동과 용강동에 걸쳐 있는 '강릉대도호부 관아'입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江陵大都護府官衙)
"고려말에 설치되어 조선말기에 폐지된 강릉 대도호부의 행정관청이 있던 곳이다.
~~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차례의 중수과정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에 의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어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만 남아있다가,
2006년 임영관 복원에 이어 2012년 관아의 아문, 동헌, 별당, 의운루 등이 복원되었다"
강릉부 관아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교구 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 있는 강릉 지역의 순교자는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명 뿐이다.
하지만 현재의 도청과 같은 곳인 감영뿐만 아니라 관아에서도
신자들이 심문을 받고 순교한 것이 여러 연구 결과 및 구전, 순교자 증언록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강릉부 관아에서도 많은 이들이 순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순교자 증언록을 보면, 강릉부 관아의 수령 집무실인 칠사당 사당에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죽어간 곳이기도 합니다.>
동헌(東軒)
"지방수령이 주재하는 관청의 본 건물로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을 행하던 곳으로
관아의 행정 업무 중심 건물인 정청(政廳)을 이르는 것이다.
동헌을 동쪽에 배치한 이유는 음양사상으로 동쪽이 양의 기운이 왕성한 것에서 연유한다."
<이 앞에서 죄인이 되고, 곤장을 맞고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했겠지요>
"지방관을 사또라고 부른 것은 사도(使道)에서 유래되었는데,
사도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왕명을 받아 지방을 통치하는 심부름꾼'으로 뜻이 바뀌면서 명칭도 사또로 변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기록조차도 남지 않았으니,
사람의 목숨이 축생의 목숨과 다름없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현재 강릉부 관아에는 당시의 동헌인 칠사당을 비롯하여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마당 한가운데에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서 -
<앞에서는 전체가 잡히지 않아 약간 비켜서 찍은 칠사당>
칠사당(七事堂)
"조선시대의 관청 건무로 호적·농사·병무·교육·세금·재판·풍속의 7가지 정사에 관한 일을 베풀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32년(인조 10)과 1726년(영조 2)에 크게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에 진위병의 영(營)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있었고 뒤에 강릉군수의 관사로 쓰이다가 1958년까지 강릉시장 관사로 사용되었다."
<왜놈들도 사용하며 개축을 했음인지, 우리나라 건축양식이 아닌듯 보입니다.>
의운루(倚雲樓)
"강릉대도호부관아 내에 위치한 정자이다.
~~한송정과 경포대를 포함한 의운루, 운금루를 강릉의 절경으로 표현하고 있어...."
임영관 삼문(臨瀛館 三門) - 국보 제51호
"고려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배흘림 기둥은 현존하는 목조문화재 중 가장 크다.
일제강점기에 헐린 객사 및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강릉부 객사의 정문이다.
~~ 현존하는 몇 안되는 고려시대의 건축기법 등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중요한 건축물이다."
<출입구에 가교를 만들어놓아 꼴이 가관입니다.
차라리 담장일부를 허물고 그곳으로 통로를 내고, 삼문은 그대로 놔두는 편이 더 나을 듯....>
<뒤에서 봐도 꼴불견입니다.>
* 배흘림기둥 : 기둥 높이의 3분의 1 지점이 제일 굵고 위는 아래보다 더 가늘게 하는 것이 보통. 구조상의 안정과 착시현상(錯視現象)을 교정하기 위한 심미적인 착상에서 나온 수법. 그리스의 신전(神殿) 건축,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에서 사용하였으나, 꾸준히 사용해 온 것은 한국 건축물임.
* 민흘림기둥 : 기둥 상부직경보다 하부직경을 크게 하여 사선으로 체감을 갖도록 한 기둥. 궁궐 및 사찰에서 사용
* 흘림없는 기둥 : 기둥의 상하 직경이 같음. 살림집이나 부속채 등 작은 건물에 사용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에도 배흘림기둥이 있은데,
그곳의 기둥들은 일부가 벽에 묻혀 있지만 이곳은 기둥전체가 노출되어 있어
그 아름다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문화해설사님의 자랑이 대단합니다.>
강릉 임영관(江陵 臨瀛館)
-. 강릉부의 객사건물(지방으로 출장온 중앙관리의 숙소로 이용하였던 곳)
-. 고려태조 19년(936년) 강릉부 객사로 임영관을 창건
-. 일제강점기에 강릉공립보통학교 세워지면서 철거됨.
-. 수목의 채굴과 구 강릉경찰서 지하구조물의 철거과정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됨
-. 건물로는 객사의 삼문만 남아있다가 2006년 중대청, 전대청, 동대헌, 서헌 등이 복원
중대청(中大廳)
-. 정청인 전대청 앞에 있는 고려건축 양식의 건물
-. 건물의 용도는 알수 없으나,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됨
전대청(展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 가운데가 중대청으로 객사의 정청이자 임영관의 중심공간.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특별한 날 의례를 행하던 장소
-. 오른쪽이 동대청으로 사신 및 중앙관료들이 숙식 및 연회, 재판, 국가 경사 및 애사 시 망곡(望哭) 등을 하던 곳
품계가 2품이상은 동대청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음
-. 왼쪽이 서헌으로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었으며 정3품 관료가 숙식하던 장소
임당동 성당
"1921년 10월, 양양본당의 보좌신부인 이 방지거(喆淵)신부가
강릉군 구정면 금광리에 본당을 개설하여 영동교회라 칭하여 임당동본당을 설립하였다."
<강릉부 관아에서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당으로 문화재로 등록됨.
이곳 성지를 관할하며 순례확인도장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백주년 성모상>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해미읍성처럼 순교기념비는 세우지 못할 지라도 작은 안내판이라도 세워둔다면,
이곳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강릉부 관아에도 그렇고 임당동 성당에도 그렇고 아무런 표식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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