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옛날에도 사람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천주교 제주교구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그 슬픈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황사평(黃蛇坪)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辛丑敎案) 때 희생된 무명의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당시 조선 왕실의 재정 확보를 위해 파견되어 온 봉세관이 과다한 조세 징수로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여기에 조세 중간 징수 관리자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로 인해 교회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미신 행위 등 신앙에 위배되는 지역 풍습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무리한 전교활동과 왕실 조세 정책에 저항한 민회(民會)가 모슬포에서 열리면서 민란이 일어나,
700여 명의 신자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는데, 이를 '신축교안'이라 한다.
이때 희생된 교우들의 시신은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옮겨 가매장 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 교회는 무연고 시신 31기를 이곳 황사평에 이장했으며 ~~"
<가운데가 무명순교자 합장묘이고 ~~>
<왼편에는 김기량 펠리스 베드로 순교비가 있고 ~~>
황사평 순교자 묘역
"1901년 신축교안(申丑敎案) 당시, ~~ 많은 천주교인들은 관덕정에서 피살되어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불란서 군함 함장들은 제주 목사에게 이들을 매장 할 공동 안장지를 제공하여 주도록 요청,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 1903년 1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홍종수와 구마실 신부와의 접촉을 시발점으로,
동년(광무7년) 4월 황사평을 그 매장지로 양도받게 되었다.
~~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 황사평에 이장하였는데, 그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하여 26기의 분묘에 28구였다.
황사평은 약 18,000평으로 신축교안시의 순교자들 뿐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공동 안장지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순교자 묘역의 내력이 적혀있습니다.>
<여기 황사평에는 무명순교자들의 묘 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 전교회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공덕비, 현 하롤드 대주교의 묘,
나 토마스 신부, 김병준(요한) 사제, 임승필(요셉) 신부의 묘가 있고 ~~>
<그 앞은 일반 신도들의 공동묘지입니다.>
<나오면서 보니 새로 납골묘역도 만들어져 있고 ~~>
<장례식 때만 빼고 항상 문닫혀 있는 정문 옆에는,
애국지사 이운강(李雲岡), 최정숙(崔貞淑) 베아드릭스, 김중현(金仲鉉)님이 묻혀있다는 안내판도 있습니다.>
성지로 승격하여 무명 순교자 합장묘를 잘 가꾸는 것도 좋지만,
당시 천주교인들과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라도 옆에 세운다면,
진정 화합하는 종교로서 거듭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좀 길기는 하지만,
고진석 신부님('분도'편집장,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 글의 일부를 전재합니다.
* * * * * * * * * * * * * *
먼 옛날의 이야기도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 백 년 동안 내 고향 제주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두 가지 사건,
'신축교안'과 '4·3 사건' 역시 그리스도교 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았으며 어머니, 아버지가 들은 일이다.
'이재수의 난'이라고 알려진 '신축교안'을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편견과 반감을 가진 도민들이 자행한 천주교인 학살이다.
1901년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이 주동하여 일어난 민란에 317명의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다.
교회 입장에서는 제주 선교 초기에 뿌려진 고귀한 순교자의 피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한다.
사실 민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천주교인들이었다고...
당시 천주교는 백여 년의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1886년 6월 한불통상우호조약으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신부들에게 호조(護照, 여권)가 발급되고
‘여아대’(如我待―나처럼 대하라)라는 어명까지 내려졌으니,
천주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임금을 등에 업고 섬에 들어온 천주교에 신앙심과 무관하게 입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서울에서 내려온 봉세관 강봉헌이 왈짜패 같은 천주교인들을 세금 걷는 마름으로 두면서 사단이 났다.
성당을 지으면서 마을 신목(神木)을 마구 잘라버려 가뜩이나 인심을 잃은 터에,
천주교인들이 세금 징수를 빙자하여 온갖 비행을 저질렀고 신부는 그를 두둔했으니
천주교를 향한 도민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온 섬에 통문이 돌았고 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성난 민중들이 행한 분풀이는 결국 무고한 천주교인들에게까지 미쳤다.
이는 교회가 받은 수난(敎難)이기고 했지만 동시에 교회가 야기한 난리(敎亂)이기도 했다.
도민들은 아직도 민란을 주도한 세 사람을 의사(義士)라고 기억한다.
민란의 시발점인 대정(大靜) 고을에 세워진 ‘삼의사비’(三義士碑)'에 적힌 글귀는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따끔한 경고가 된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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