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온 가족이 차에 올랐다.
다섯 식구가 타고 큰 트렁크 두 개에 작은 짐 몇 개까지 더하니 9인승 트라제에 한가득이다.
2시간 반을 달려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은 캠퍼스의 한편에 자리 잡은 생활관(기숙사)에 도착했다.
둘째 아이가 앞으로 1년간 머무를 방에 짐을 옮겨놓고 창문 밖을 바라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둘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아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챙기고, 학교 선생님 챙기고, 친구들 챙기는 것을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데,
공부만은 나 몰라라 하니 채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에는 속만 끓일 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 하는 말이 ‘난 학교 문 닫고(거의 꼴찌수준으로) 졸업했다’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좀 먼 곳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대학에야 갈 수도 있었고, 원하지 않은 학과에는 합격도 했지만,
차라리 안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권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가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입시가 다 끝나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둘째 아이를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공부하기 싫으면 대학 안가도 된다. 꼭 대학을 나와야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일찍 사회에 나와서 세상을 배우고, 대학 다니며 쓸 돈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너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비치고 자식을 고등학교만 졸업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심으론 조금만 동의하면 재수 종합반을 보내려 준비하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마찬가지로 공부를 안 할 것이니 기숙학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월 어느 날, 딸아이가 재수를 해야 되겠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날마다 먹고 자는 줄만 알았더니 그 사이에 여기저기 알아보고선 그 중 두 군데 학원을 얘기했다.
우선 단과반을 운영하는 수학학원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기숙학원에서 강의해 봐서 아는 데 실력이 부족한 애들은 기숙학원이 더 불리할 수가 있어요.
학원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수익을 위한 사업이지 교육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대학에 많이 들어가야 선전효과가 높고, 좋은 대학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들어가는 것이니,
학원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위주로 수업을 하고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는 한 하위권 학생들은 그냥 돈 보태주러 다닌다고 보면 됩니다.
만약 친구라도 잘못 만나게 되면,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다음은 자기주도형 학습을 지도하는 학원 원장을 만났다.
“우리 학원은 수업을 하고 공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하고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줍니다.
매 주마다 1주일분 학습 계획표를 스스로 짜게 하고,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검토합니다.
계획표가 무리한지, 너무 느슨하게 짰는지, 부족한 것은 없는 지, 과목별로 조화로운지 점검해주고,
주중에는 그 계획대로 잘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지도하고, 위반하면 벌칙을 가합니다.
지각하거나 졸거나 떠들었을 때, 또 목표한 공부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벌금을 내게 하고,
몇 번 더 반복하여 위반하면 가차없이 퇴출시킵니다.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이지요.
공부는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고, 그 효과는 스스로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스스로 하는 공부이기에 인터넷 강의를 겸하는 게 좋고, 필요하다면 단과반 수업을 들어도 됩니다.
아버님 세대에는 없었겠지만, 요즘은 인터넷 강의가 있는데 강의의 질이 상당히 높습니다.
현직 최고의 강사들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는 것이기에, 어설픈 학원 강의나 과외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저는 원래 과외교사를 했었는데, 재수생들에겐 이런 학습법이 적절할 것 같아 작년 여름에 이 학원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3명으로 시작했는데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았어도 입소문 타고 50명까지 늘어났고,
금년에는 공부방을 더 늘렸는데도 빈자리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공부는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라는 평상시 내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하기에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반,
공부는 먼 나라 얘기였던 딸아이가 학습법까지 바꾸어 공부하면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반,
기대와 걱정을 저울질하고 고민하다가, 믿고 지켜보기로 결론을 내고 딸아이를 다독였다.
“그래, 적응하는 데 힘들겠지만 이 방법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부라는 게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고, 해보지 않았던 이런 학습법은 더군다나 힘이 들 것이다.
아마 6~7월정도 되면 지쳐서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 시기만 무사히 넘기자.
예상대로 된다면 틀림없이 좋은 성과가 날 것이다. 한 번 해보자!”
아내는 날마다 도시락이라도 두 개씩 싸주는 수고를 했지만, 내가 한 것이라곤 지켜보는 것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벌금도 내고, 시행착오도 거치고, 실수도 하더니만 그런대로 잘 적응해나갔고,
걱정했던 6~7월도 큰 탈 없이 넘기고 수능시험도 무사히 치뤘다.
시험결과는 전체적으로 평균 1.5 등급정도 상승, 이젠 응시할 수 있는 학교도 많아졌다.
딸아이는 예전부터 간호대에 가고 싶어 했다.
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예쁘니 갓난애들이 많은 신생아실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했다.
그리고 10년쯤 일한 후엔, 중남미쪽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거기서의 경험으로 봉사활동을 하려는 딸아이가 갸륵하기는 했지만,
시간대를 바꿔가며 근무해야 하고, 아픈 사람들과 씨름해야 하는 병원 근무가 힘든 것이기에,
몇 번이나 말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어 결국은 딸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과는 이미 정해졌고 대학만 선택하면 되는데, 집 가까운 대학에 응시하기는 부담이 있었다.
하여, ‘딸은 무조건 집에서 등·하교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어렵게 포기하고,
안전한 곳 하나, 적당한 곳 하나, 조금 어려운 곳 하나를 선택하여 원서를 접수했다.
발표일이 하루나 남았는데 둘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나 합격했어요!!!”
항상처럼 그냥 무뚝뚝한 음성으로 “잘했다, 고생했다!” 라고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하고....
또 뭐라고 더 좋은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좋은 수식어가 없다.
합격! 추가합격이 아니라 정시 합격! 그것도 사립대가 아니라 국립 대학교!
딸아이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비싼 학원에 다닌 것도 아니고, 족집게 과외 한 것도 아니고, 다른 부모들처럼 제대로 신경 써준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계획을 짜고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인터넷 강의도 찾고 스스로 단과반 수업도 듣고....
부모가 한 것이라고는 벌금 낸 이야기, 공부하다 졸았던 이야기, 공부가 잘 안되어 화난 이야기,
친구와 마음이 안 맞은 이야기, 공부 분위기 흐리다 퇴출당한 친구 이야기를 들어준 것뿐이었다.
혼자서 다 해내고 혼자서 많이 크고 혼자서 큰 자산도 일구었다.
난 그 나이 때 그렇게 할 생각도 못했는데, 믿어주었더니 혼자서 다 챙겼다.
이젠 내가 해야 할 일만 남았다.
딸아이가 둥지를 떠날 때 서운해 하지도 불안해 하지도 않는 연습,
아직은 부족한 막내아들에게 화내지 않고 믿어주고 지켜보는 훈련,
그리고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훌륭히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 감사의 기도!
딸아!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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