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박 25일 유럽여행!
우리 세대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여행을 떠나는 아이들을 환송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다.
내가 처음 비행기를 타 본 것은 83년 5월 25일, 행선지는 이라크 바그다드,
흔히들 말하는 열사의 나라에 건설의 역군으로 달러 벌러 나갔었는데,
이젠 배낭 하나 짊어지고 바다건너 가는 것쯤은 가볍게 여기는 시대로 바뀌었다.
작년 10월쯤이던가, 학원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다.
“아빠, 나 시험 끝나면 유럽여행 가고 싶어요. 언니랑 같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싶어!”
수능시험이 코앞인데 시험 잘 볼 생각은 안하고 엉뚱하게 여행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애인가, 이게 재수생이 할 소리인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새로운 나에게 내가 물어보고 새로운 내가 대답했다.
아이가 속 없다는 생각은 버리고, 그 심정을 한 번 이해해보자,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수능 시험을 두 번씩이나 치루는 것은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시험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언니와 함께 여행하려는 생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돈이 많이 들고, 여자아이 둘이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운 세상 아닌가?
견문을 넓히고 자신을 성숙시키는데 여행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 돈 들어가는 것은 감수하자.
또 세상이 험하기는 하지만 큰 아이랑 같이 다닐 것이니 걱정도 줄어든다.
그래, 기회가 좋다, 이번에 애들을 위해 눈 딱 감고 투자하자.
기왕 보내는 김에 막내녀석도 같이 보내자, 삼남매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도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수능 시험이 끝난 후, 둘째와 막내 아이를 앉혀놓고 이야기 했다.
“그래, 유럽 여행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기왕 갈 바에는 동생도 데리고 가라.
너희 셋이 같이 움직이되, 모든 계획은 너희들끼리 짜야한다.
여행은 준비하면서부터 시작이고, 많이 준비할 수록 알차게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일정표를 먼저 아빠에게 보여주라, 제대로 짜면 보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
그리고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무척 바빠졌다.
도서관에 가서 책 빌리고, 인터넷 찾아보고, 큰아이와 저녁마다 통화하면서 일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비행기표 예약하고, 호텔 예약하고, 현지 시내관광도 예약하면서 결재해달라고 한다.
아직 일정표를 아직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모른 체하고 결재해주었다.
내가 해봐서 알지만 일정표 짜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몇 번 재촉 끝에 개략적인 일정표가 나왔다.
이스탄불에 중간 기착하여 반나절동안 시내 관광하고, 로마에서 며칠 머물고 바르셀로나로,
바르셀로나에서 언니를 만나 마드리드로, 리스본으로, 니스로, 파리로,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24박 25일의 배낭여행 일정표를 내게 보여준다.
어디를 가야할 지는 나보다 더 잘 챙겼으리라 믿고, 안전에 관한 사항만 꼼꼼히 점검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준비한 만큼 실수가 줄어든다.
터키,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를 여행해야 하니 말도 안통하고, 글자도 잘 모를 것이다.
비행기를 바꿔 타야 하는 데 안내방송이 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버스타고 기차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어디서 타고 어디에 내려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보나?
일행을 놓치고 지갑도 없고 혼자 떨어져 있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나?
짐도 잃어버리고 여권도 잃어버렸을 때엔 어떻게 해야 하나?
비상시를 가정하여 어떻게 하는 게 좋을 지 같이 얘기한 다음, 시간배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버스 타고 비행기 탈 때는 항상 여유있게 가야 하고,
하루의 일정도 시간을 배분하고 다녀야 허둥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적어도 30분 단위로 일정을 짜라.
<큰 아이 만나기 전까지, 둘째와 막내만 돌아다니는 9일 간의 세부일정과 예산>
한 번 고치고 두 번 고치고, 세 번째 보여준 일정표는 제법 마음에 든다.
이 정도면 현지에서 헤매고 실수하는 것 쯤은 여행의 양념으로 여겨도 좋을 듯 싶었다.
그리고 준비물을 챙기는데, 한마디 조언조차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은행에 가서 계좌 만들고, 환전하고, 여행자 보험 들고, 가방도 빌리고,
준비물 목록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하나하나 지워가며 챙겼다, 나보다 낫다.
장인 장모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고,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이다.
패키지 여행도 아니고 배낭 여행을, 아직은 어린애들이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하려고 그러느냐?
물론 예전의 나라면 어림도 없었다. 국내여행을 간다 해도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내가 달라졌고, 아내도 달라졌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믿고, 아내도 우리 아이들을 믿는다.
조금은 부족하고 실수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려 가는 것 아닌가?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특히 막내 녀석은 많이 자랐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들은 떠났고,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기도밖에 없다.
아내는 성모님께 기도하고, 난 108배 하면서 기도하고...
무사히, 건강히, 조금만 헤매다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생한 만큼 성숙해져서 귀국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고등학교 4학년(재수생), 대학 4학년, 3남매가 24박 25일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고 있다.
멀리 보냈지만 걱정은 안한다, 난 내 아이들을 믿는다!
돈? 많이 든다.
그러나 나는 부자이지 않는가? 마음이 말이다!!!
<인천공항에서 둘째와 막내 녀석이 떠나기 전에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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