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3. 근본교리

[법륜스님의 '근본교리'] 제12강 인연법 - 세 번째

상원통사 2015. 3. 1. 20:44

(~~ 제11강에서 계속)

 

범부중생 : 어리석음.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고 함
이제 인연의 법칙을 개인 수행생활로 좁혀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줄 마음은 별로 내지 않고 늘 얻고자 합니다.
주는 것은 조금 주고, 받는 것은 많이 받아야 ‘행복하다, 재수 좋다, 복 받았다’ 고 합니다.
내가 뭘 할까는 생각을 안 하고 당신들이 나를 위해서 뭘 해주나 이렇게 바라는데,
농사를 짓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듯이, 베푼 것이 없으면 돌아올 것도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요행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범부중생이라 합니다.
일은 안하고 금덩어리 떨어지기를 바라고, 공부는 안하고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데,
여러분들이 절에 가서 비는 내용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농사도 안 짓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과 같고, 콩은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 사람(현인) : 주고 받으려 함
지악수선(止惡修善) : 악은 멈추고 선은 닦아야 한다
공짜를 바라지 않고 일한 만큼만 받아야 하고, 주는 게 있어야 받을 게 있다,
우리가 다 같이 살려면 적어도 이런 이치 정도는 알아야 하고, 이게 보통 사람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것이 악은 멈추고 선은 닦는 지악수선의 생활이고, 사람다운 사람이 걷어야 할 길입니다.
이건 특별히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고,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봄에 모내고 거름주고 김을 매야 가을에 추수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이 원리입니다.


근원적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부중생은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고 하지만, 보통사람(현인)은 주고 받으려고 합니다.
차이점은 하나는 안주고 하나는 준다는 것이지만, 공통점은 둘 다 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은 내내 놀기만 하고 다른 사람은 봄부터 부지런히 일을 했는데,
여름에 가뭄이 들어 농사를 망쳐 둘 다 수확을 못한다면 누가 더 억울해 할까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억울해 할 것입니다. 더 억울하다는 것은 더 괴롭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보통은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어리석게 사는 사람보다 괴로움이 적고 더 행복하게 지내지만,
얻겠다는 생각, 얻는 것을 행복으로 삼고 있기에 괴로움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어,
돌발사태가 벌어지면 더 억울해하고 더 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인(聖人) : 받으려는 생각은 놓고 주려고만 한다. 종교생활
이고득락(離苦得樂) : 고를 여의고 낙을 얻으려는 것
이런 억울하고 분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종교생활(성인의 길)입니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하려는 사람을 범부중생,
주고 받으려는 사람을 보통사람(지혜로운 사람, 현명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이라 한다면,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주려고만 하는 사람을 성인이라 하고 이것이 종교생활입니다.
지악수선이 현인의 길이라면, 이고득락(고를 여의고 낙을 얻으려는 것)이 성인의 길입니다.


범부중생이 범부중생과 같이 있으면 언제 내 것을 빼앗길 줄 모르니 불안합니다.
범부중생이 현인(보통사람)과 같이 있으면 손해 볼 일도 없고 이익 볼 일도 별로 없으니,
존경은 하지만 얻을 게 없어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범부중생이 성인을 볼 때는 이해도 안 되고 바보같이 보이지만, 얻을 게 있으니 좋아합니다.
우리는 얻으려고 일을 하는 건데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으니,
자기 아들이나 자기 남편이 성인의 길을 간다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성인의 길은 내 것, 네 것이 있다는 생각이므로 해탈의 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인의 길도 해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인은 받지는 않고 주기만 하지만, 아직도 내 것과 네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내 것도 네 것도 없다는 것, 이게 실제의 세계라는 것을 깨쳐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전미개오(轉迷開悟) : 어리석음을 돌이켜 깨달음을 얻는다
이것이 전미개오(어리석음을 돌이켜 깨달음을 얻는 것), 바로 수행생활입니다.
성인의 수준까지는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에도 다 있는 것이지만,

전미개오의 수행생활은 붓다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수행생활을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도 다 지악수선의 보통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의 생활을 하면 세상을 정의롭게 사는 것만이 아니고 자기를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봄부터 열심히 일했는데 가을에 수확을 못 걷으면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헛살았다고 생각하거나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남 주려고 농사지은 사람은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눠주면 되니
성인의 길을 걷는 사람은 희생당했다거나 손해봤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범부중생은 아무것도 안하고 가을에 수확을 얻으려 하고,
현인(보통사람)은 힘들고 괴로워도 수확하기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참고 일하지만,
성인은 수확을 탐하지 않으니까 일하는 자체가 재미있고 그 성과에 별로 구애받지 않습니다.
설령 잘되어서 사람들이 존경을 해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명예가 있어도 남에게 줘버리고,
또 농사 잘못 지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나무라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성인은 결과보다 과정을, 미래보다 지금의 하나하나를 더 중요시 합니다


범부중생이나 보통사람들은 복은 받으려고 짓는 것이지 안그러면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테레사 수녀님 같은 분은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평생 사랑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세상의 성인들은 다 그렇게 살았는데, 여기서 끝이라면 특별히 불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올라가 전미개오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면,
성인의 삶까지도 다 꿈속의 이야기 같은 것이고, 불법은 바로 그 꿈에서 깨는 것입니다.
그 세계에 도달하면 본래 내 것도 없고 네 것도 없는 줄 알게 됩니다.
복을 지어놓고 안 받는 게 아니라, 내 것이 없는 세계이니 복을 지을래야 지을 것도 없습니다.
태양이 복 지으려고 햇빛을 주는 것도 아니고, 식물이 복 받으려고 산소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식물은 햇빛을 받아 산소를 만들고, 우리는 그걸로 숨쉬고, 이렇게 그냥 필요에 의해서 쓰일 뿐입니다.
누가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받는 것도 아니고, 복 되는 것도 아니고 죄 되는 것도 아닌 세계입니다.
그 길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범부중생이 현인을 바라보는 인연법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입니다.
네가 전생에 남을 많이 해쳤으니 그런 과보를 받고, 네가 남에게 빚을 많이 지었으니 이 생에 갚을 것이 많다,
이 인연법은 인과응보법, 잘못하면 벌을 받는 법입니다.
이것은 좋은 일 한 사람은 상을 주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은 벌을 주는 보복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선악에 따른 보복의 원리는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인연의 사슬에 묶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짓 하면 벌 받아서 지옥가고 좋은 일 하면 복 받아서 천상가는 것은,
윤회의 씨앗을 심어서 사는 것과 같고, 이러한 길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부를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하나는 인연법, 모든 게 다 인연의 과보로 나타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것도,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이런 괴로움이 있는 것도,
다 인연의 소치이니 지은 바 인연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나고 짜증나고 밉고 원망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지은 인연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이니, 기도를 할 때 ‘부처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지은 인연의 과보를 몰라 원망하고 미운 마음을 냈는데, 앞으로는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같은 일이라도 거부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고 겁이 덜 나고 도망 가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부딪치는 것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공부의 출발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감사합니다, 뭐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 됩니다.


두 번째, 지은 인연이니까 받기는 하지만 그 과보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것 짓지 않겠다’ 라는 결심이 필요한데, 이것이 지악수선의 길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모든 인연의 과보라는 게 바깥세상의 법칙만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생기는 거다,
내가 기대하니 원망의 마음이 생기고 내가 바라니 미움이 생기는 것이니,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 즉시 편안해지고 고마운 일들만 생겨나게 됩니다.
불편하다는 것은 뭔가를 잡고 있다는 것이니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즉시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참회를 하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잘하고 남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화를 냈는데,
알고 봤더니 남편이 잘하고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잘못한 행위에 대한 참회’가 있고,
둘째는, 내가 잘하고 남편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남편을 원망했는데,
잘하고 잘못한 것이란 본래 없는 것인데 있는 줄 알았으니, ‘어리석은 마음을 낸 것에 대한 참회’가 있습니다.
즉 잘하고 잘못한 것이 있는 줄로 망념을 일으켜서 시비분별한 것을 남편에게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다 내가 잘했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데,
본래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을 알면 저절로 업장이 녹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공부해 들어가면 참회하는 것이 곧 해탈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회는 수행의 기초이고, 참회한 뒤에 염불을 하고 그다음에 주력을 하는 게 아니라,
참회를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업장이 소멸되고 지혜가 열리는 도리를 가게 됩니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을 깨우쳐 버리면 그게 바로 지혜의 길인 것입니다.


참회는 시간이나 장소를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시간을 정해놓고 108배를 하는 것은 이미 일으킨 것에 대한 뉘우침이고,
참회라는 것은 늘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속에서 그냥 해야 됩니다.
'또 내가 어리석은 생각 냈구나, 또 분별심을 냈구나',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할 뿐인데, 내 생각으로 옳으니 그르니 잘했니 잘못했니 했구나',
이렇게 해서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자기 쪽으로 돌이켜서 놔버려야 됩니다.


다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니 우리는 수행을 통해서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꿈을 헛꾸어서 잠꼬대 하고 있는 중이니, 꿈에서 깨 나가야 합니다.
그 깨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각자에게 맞는 방식을 택하면 되지만,
먼저 참회를 통해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공부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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