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강에서 계속)
변화의 법칙 : 인연과의 법칙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했는데, 이 변화의 법칙을 불교적인 용어로는 인연과의 법칙이라 합니다.
여기서 ‘인’은 원인을 말하고, ‘연’은 조건을 말하고, ‘과’는 드러난 현상, 그 결과를 말합니다.
불법은 늘 현재에서 출발합니다.
현재에 어떤 괴로움(과보)이 있다면 이 괴로움은 그것이 생길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인연)이 있어,
그 인연의 결과로 이러한 과보가 나타난다고 보는데, 그 원인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인(因) : 직접적 원인, 행위자의 내재적 원인
연(緣) : 행위가 일어나는 주변의 조건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 그 행위자의 내재적 원인, 이것을 ‘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그 행위가 일어나는 주변의 조건과 상황, 이것을 ‘연’이라 합니다.
모든 것은 인연, 인과 연이 만나서 결과가 나타나는데,
결과만 가지고 억울해 하고 분해 하는 것은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은 인연을 모르니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좀 극단적인 비유지만,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한 전철 간에 겨우 비집고 들어갔는데,
앞에 있던 부인이 ‘아야!’ 하고 소리를 지르기에 쳐다봤더니, 내 뺨을 탁 때립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얻어맞으니, 기분이 나쁘고 억울하고 분하여 화를 벌컥 냈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그 여자의 발을 밟아 발가락이 부러졌습니다.
내가 발을 밟은 줄 모를 때엔 억울하고 분했지만, 알고 나면 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과(果) : 결과, 드러나는 현상, 싹이 트는 것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인’은 씨앗, ‘연’은 주변 조건, ‘과’는 싹이 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싹은 그러한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튼 것이지만, 씨앗만으로는 싹이 틀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변의 조건이 맞아야 싹이 틀 수 있는데, 그게 흙, 공기, 수분, 온도 등입니다.
어떤 결과든지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것은 인연의 결합이다
어떤 결과든지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은 인연의 결합입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라 하더라도 씨앗을 심지 않으면 싹이 날 수가 없고,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 하더라도 천정에 매달아 놓으면 싹이 트지 않습니다.
싹은 씨앗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고 주위의 조건과 관계해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듯이, 같은 환경일지라도 결과가 다른 것은 그 종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똑같은 콩 씨를 심었지만 자갈밭이냐, 모래밭, 메마른 밭, 좋은 밭이냐에 따라,
죽거나 늦게 싹이 틀수도 있고, 신통치 않게 자랄 수도 있고 잘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연과법’입니다. 줄여서 ‘인과법’이라 말하지만, ‘연’이 없으면 불법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콩 씨가 콩 싹을 틔우고 팥 씨가 팥 싹을 틔우는 그 근본원인은 팥과 콩의 씨앗에 있지만,
그것이 싹을 틔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밭의 조건에 있습니다.
같은 밭(연)에 심었을 때는 씨앗(인)이 중요하지만, 같은 씨앗(인)을 심었을 때엔 밭(연)에 따라 결과가 다르니,
인과 연을 같이 봐야 되는데, 우리는 한 부분만 보고서 인이 중요하다, 연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하나의 행동을 할 때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개인이 갖고 있는 업식이 인이 되고, 그 행위가 작용되어지는 사회적 조건이 연이 되어,
그 인연의 결과로 행과 불행이라는 과보가 생겨납니다.
여자가 어떤 집으로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연'이 작용하는 것이고,
어떤 여자가 시집오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이 달라지는 것은 '인'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인)이 아니라 주변 여건(연)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주변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옛날과는 달리 사치와 향락의 문화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니 아이들이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른다고 보는 것은 연을 중요시 한 것이고,
못된 업식을 가진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나서 그렇다고 보는 것은 인을 중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시대라고해서 애들이 다 문제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아가 되는 애들도 있지만 똑같은 그런 조건에 던져놔도 그렇지 않는 애도 있습니다.
똑같은 조건 속에 똑같이 던져놔도 사람에 따라 다르니, 개인의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렇게 인을 중요시 하는 게 주로 종교입니다.
네가 문제이니 수행해라, 수행이 부족해서 그렇다, 또는 믿어라 안 믿어서 그렇다,
이렇게 개개인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주로 강조합니다.
반대로 사회운동이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보다 사회의 문제를 더 중요시합니다.
개인의 문제인 것도 사회의 법과 제도와 문화가 잘못된 것으로 보고 연을 고치려고 합니다.
개인의 믿음이나 수행을 중요시 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하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고 세뇌시키는 종교를 반동세력이라 합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연이나 인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인연의 화합으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사회의 여러 제약들이 없어져야 세상은 나아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기준 : 아내가 인(因), 남편은 연(緣)
남편을 기준 : 남편이 인(因), 이내가 연(緣)
부부를 보면, 아내는 자신의 행복이 남편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기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니,
남편이 조금만 더 잘해주면 내가 행복할텐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남편은 자신의 행복이 아내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이지만 아내를 기준으로해서 볼 때는 아내가 인이고, 남편은 연입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남편이 좀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환경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바뀌면 내가 좋아질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아내는 거기에 미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가 인이고 아내가 연입니다.
아내가 바뀌면 자기가 좋아지니 아내가 좀 바뀌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자기도 연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자기는 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볼 때 자기는 인이고 이 세상이 다 연이지만, 저 쪽에서 볼 때는 나 또한 연인 것입니다.
내 욕망을 낮추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연을 바꾸면 당연히 좋아지겠지만 인을 바꿔도 좋아집니다.
우리 남편이 이랬으면 좋겠고 저랬으면 좋겠고, 이렇게 내가 바라는 게 100인데,
남편은 내가 바라는 것의 70밖에 못해주니, 30이 부족하여 그만큼 불만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을 50으로 낮추면, 남편은 20만큼 더 해주는 것이 되니 늘 고마움이 생깁니다.
내 욕망(바램) 낮추면 똑같은 남편을 두고도 즐거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면 우선 내가 좋고, 남편이 볼 때는 연이 개선되는 것이기에 부부가 같이 좋아집니다.
내가 내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짜증을 버리면 내 자신을 좋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연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남편을 바꾸고 타인을 바꾸고 세상을 바꿔야 되지만,
자기를 바꿔도 자기가 좋아지니 먼저 자기를 바꿔야 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이 쉽겠어요, 남을 바꾸는 것이 쉽겠어요?
대답은 잘하시는데, 자기는 요만한 것 하나 안 바꾸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바꾸려고 합니다.
자기는 늦게 일어나 밥 대신 빵 먹는 습관도 못 바꾸면서, 남편이 술 마시고 담배 태우는 것은 바꾸려 합니다.
자기 습관 고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면서, 남편의 술 담배 끊는 것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는데,
내 습관이 바뀌어지지 않는 걸 보고 타인이 바꾸기 어려운 걸 이해를 해야 됩니다.
내가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서 타인이 못 바꾸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 ‘도’가 되고,
타인이 바꾸지 않아 본인에게 해가 되는 것을 보면서 내 것을 바꾸면 이것 또한 ‘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못 바꾸는 것을 보면서 타인이 못 바꾸는 것을 이해하고,
내 악한 마음이 있는 것을 보면서 타인의 악함을 이해하고,
내 욕심을 보면서 타인의 욕심을 이해하면 이것 또한 큰 공부입니다.
타인이 욕심내는 것을 보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 하거든 내 욕심을 버려야 되고,
타인이 작은 일에 화를 내는 것을 보며 ‘왜 저럴까’ 하거든 나 또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인연은 분리시킬 수가 없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둘이 아니다
인연을 나눠서 말하지만 원리적으로 인연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을 좋게 하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좋고, 다른 사람에게는 연이 개선되었기에 좋으며,
연을 개선하면 우선 다른 사람에게 좋지만 나의 연이 개선된 것이므로 내게도 좋습니다.
바깥 세계에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우선 자기가 바라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을 개선하는 것이고, 인을 개선하면 연을 그냥 놔두고도 결과가 좋아집니다.
또 내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 바라는 대로 내가 헌신해도 자신이 좋아집니다.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게 되고, 자기를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세상에 이익이 됩니다.
세상은 인연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둘이 아닙니다.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니 화가 납니다.
‘조금만 일찍 들어오면 내가 화를 안 낼텐데’, 이것은 연을 개선하려는 것입니다.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찍 들어오라고 화내고 싸워왔습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얘기해도 안 고쳐지는 것이, 한두 번 더 한다고 고쳐질까요?
‘당신은 20년 동안이나 말했는데 그것 하나 못 고쳐요?’ 이렇게 말하는데,
20년 동안이나 말해도 안 고쳐지는 줄 알면서, 또 잔소리하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짓입니다, 한두 번 해서 안 되면 안 되는 줄을 빨리 알아야 되는데,
조금만 더 잔소리하면 되겠지, 또는 내가 잔소리를 했으니 이만큼이라도 되었지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됩니다.
10시로 정했다면 2시로 미루고, 2시로 정했거든 이튿날 두 시로 기준을 후퇴시키세요.
10시니 2시니 하는 그 기준은 내가 만든 것이니 내가 바꾸면 됩니다.
그렇게 바꾸면 늦게 들어온다고 시비를 안 해도 되고, 내가 짜증날 일이 없어집니다.
옳고 그른 건 본래 없는데 내가 기준을 정해놓고 그 잣대로 길다 짧다 하는 것입니다.
본래 잣대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정한 것입니다.
그 잣대를 놔버리는 게 무아이고 그게 해탈의 경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잣대를 놓지는 못하더라도, 잣대를 조금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귀가시간을 조금만 뒤로 늦춰도,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드니 속상하지 않아서 좋고,
남편은 집에서 잔소리 안 들어서 좋고, 친구들 사이에 공처가 소리 안 들어서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완전히 퍼져버리지 않을까 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에서는 인정을 못 받아도 자기 부인한테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바깥에 가서는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집에 와서는 큰소리치고 싶어 합니다.
믿어주면 처음에는 긴가민가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지 죽는다고 해도 열심히 할 겁니다.
부처님 믿고 하느님 믿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선 자기 남편부터 믿는 게 중요합니다.
두세 시간 갖고 못 믿어서 시비하지 말고, 적어도 하루쯤 연기를 해놓고 믿어줘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고 남편에게도 스트레스를 주지 않게 됩니다.
그런다고 남편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마누라가 정토법당 다니더니 사람됐다’ 는 생각은 들 것입니다.
수행이란 각자의 몫이므로 상대에게 요구하면 이미 수행이 아니고,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적용하면 이미 법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남편도 절에 올 인연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게 됩니다.
남편이 절에 다니며 수행을 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요구하면 안됩니다.
수행은 각자의 몫입니다, 상대에게 요구하면 그것은 이미 수행이 아닙니다.
근데도 여러분들은 ‘자기를 버려라, 자기 욕심을 낮춰라, 자기만 고집하지 마라’ 이러면,
‘우리 남편이 저 얘기를 들어야 되는데’ 하고 집에 가서 멱살 잡고 데려 오려고 합니다.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 적용하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적용하면 이것은 이미 법이 아니고 욕망이요, 요구입니다.
내가 수행하며 바뀌는 것을 남편이 보고 느끼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절에 오게 되고,
법문을 듣다가 스스로 우러나면 자기 수행을 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수행은 자기 몫입니다.
자신(因)이 개선되면 다른 사람에게는 연(緣)이 개선되어 이익이 되고,
세상(緣)을 위해서 보시, 봉사하는 것은 나에게 이롭다
나의 인을 개선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연이 개선되는 것이니,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도 좋아집니다.
청소년 문제아들에게 가서 상담해주고 인연을 맺어서 한 사람씩 보호자가 되어주고,
이 세상의 어둡고 그늘지고 문제가 있는 곳에 내가 시간을 내서 찾아가 주게 되면,
문제아이들 숫자가 줄어들게 되어 우리 아이가 거기에 물들어 잘못될 확률이 작아집니다.
연을 개선하면 그들에게만 이로움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보시하고 봉사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이로운 것입니다.
보시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내면 우선 내가 행복하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고,
그 개선이라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환경을 좋게 하는 것이니 나에게도 이로운 것입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 :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을 함께 한다
이것을 우리 정토회에서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을 함께 한다, 둘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제12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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