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으신 법이 연기법인데, 연기법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연기법이란 깨달음을 얻는 방법을 말하며,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면 연기적 방법으로 해야 하고(12연기),
이런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봤을 때, 그 사물의 본질(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또한 연기법이라고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서로 다 연관되어져 있다,
또 어떤 것은 영원불멸한 것 같은데 사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즉 ‘연관되어져서 변하고 있는 것이 존재의 참모습이다’, 이것을 우리는 연기법이라고 말합니다.
근데 우리는 범위를 좁게(부분적으로) 관찰하고, 시간을 아주 짧게(순간적으로) 관찰을 하다가 보니까,
그 변화와 관계를 보지 못하고,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 같고 또 영원한 것이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그렇게 인식되어질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아야 사물을 올바르게 알 수가 있음
우리가 지구 안에서 관찰하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인식되어지는데,
지구 밖에서 태양과 지구를 동시에 내려다보면 태양은 가만히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당에서 제자리를 빙빙 돌다 서면 땅이 도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고,
타고 있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옆의 기차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는 정지상태로 두기 때문에 바깥이 움직이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착각하고 싶어서 착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찰에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관찰을 사실인양 절대화 시켜버리면 거기서부터 갖가지 모순이 발생하게 되니,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아야 사물을 올바르게 알 수가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두 부부가 서로 자기가 옳다고 티격태격 싸우고 있습니다.
부인 입장에서 볼 때는 남편이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짓을 하고,
남편이 볼 때는 아내가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짓을 하니, 서로 상대를 고치려고 합니다.
잔소리를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잘못된 상대를 고치려고 하면서 생긴 일들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분명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싸웁니다.
그러나 담장 밖에서 이웃 사람이 볼 때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싸우면 깨져도 자기들 그릇이 깨지고, 할퀴어도 자기 남편 얼굴을 할퀴고,
맞아도 자기 부인이 두들겨 맞고, 나빠져도 자기 아이 교육이 나빠지니 모든 게 다 손해입니다.
아내가 이기면 자기 남편이 진 것이고, 남편이 이기면 자기 부인이 졌으니, 그 집안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밖에서 보면 이런 것이 훤하게 보이는데 싸우는 당사자들은 그게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은 내가 지면 집안에 막대한 손실이고, 이기면 큰 이익이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식을 할 때 자기를 내려놓고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에 사로잡혀서 보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보거나 순간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만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리가 있겠지만, 전체 코끼리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지구에서 보면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해야 맞는 것이고,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당신의 그러한 행동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야 정확한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볼 때 너의 이러이러한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는 벽 색깔이 빨간 것 같은데 남편이 노랗다고 하면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그래도 계속 다르게 보인다면, 벽이 아니라 내 눈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나에게 그렇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가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확연하게는 못 깨달았어도 깨달음의 길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이고,
깨닫기 전에 벌써 두 사람은 갈등이 없어지며 화해가 가능하고, 같이 진실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근데 옳다고 고집을 해버리면 이것은 찾아가는 게 아니고 상대를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세계를 이해한 것 : 아집(我執), 아상(我相), 편견(偏見)
‘빛이 생겨라!’ 해서 빛이 생기고, ‘마른 땅이 드러나라!’ 해서 뭍이 생겼다는 것은,
자기 중심성, 자기가 서있는 땅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집이며 아상이며 편견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존재의 참모습이 아니고 자기 눈에 비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수천 년 전 그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해야지, ‘실제로 그렇다’고 할 때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그렇게 보였다’고 하면 진실이 나타났을 때 ‘알고 봤더니 잘못 인식한 것’이라고 바꾸면 되지만,
‘그게 진실이다’ 라고 단정해 버릴 때엔, 진실이 나타나면 그것을 외면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 왔다가, 진실을 두려워하고 거부해야 되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거부하다 보면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큰 과제는 젖혀두고,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부차적인 것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세계가 연관된 것이 인식이 안 되고, 또 세계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인식이 되느냐?
그것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관찰하고, 순간적으로 보고, 자기중심에서 바라본 것을,
마치 세계의 참모습인양 단정해버리는데서 발생하는 모순 때문에 그렇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근본무지가 거기서부터 발생하게 됩니다.
차에서 내려서 보고, 밖에서 자기 집을 보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본다는 것은,
‘아상을 깨트렸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났다, 안경을 벗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게 사실이 아니고 착각이었구나, 무지·무명·전도몽상이었구나,
그러니 우리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 이렇게 서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 해야하는 데,
‘너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휴전하고 협상하고 대화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하는 데 엄청나게 힘이 들고 또 근원적으로 해결도 안됩니다.
그러나 담장밖에 나가서 보고, 안경을 벗고 보면 문제 자체가 없어지고, 문제가 없으면 해결할 것도 없습니다.
협상을 하자든지 화해를 하자든지 휴전을 하자든지 이럴 필요가 없어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통해서 일체의 고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태도 : 12연기법(十二緣起法)
사물의 실제 존재하는 모습 : 삼법인(三法印)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태도’가 12연기법이고, ‘실제 사물의 존재하는 모습’이 법인입니다.
삼법인이란 세 가지 법의 도장, ‘이게 진리다’ 하는 세 가지 도장입니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십이연기)이란 그런 지식이 아니고 그런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라고 말한다면, 이때 ‘모르겠다’ 는 무지입니다.
무지하니까 화가 나고, 무지로부터 고가 생기는 겁니다.
고가 사라지려면 무지가 없어져야 되고, 무지가 없어지려면 왜 술을 먹는지 알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집에 와서 마누라한테 얘기해 봐야 도움도 안되고 답답하니,
술을 먹고 풀려고 했고 또 친구까지 만났으니 한 잔 더 하다 늦게 오게 되었구나,
이런 사정을 잘 알면 그걸 이해하고, 알게 되면 화가 안 납니다.,
나의 무지가 사라지면 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나, 물질의 법칙에 대해서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사고방식입니다.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고방식을 연기적으로 한다는 것
불교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고방식을 연기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냥 괴롭다, 죽겠다 이런 게 아니라,
왜 괴로울까? 이것 때문에? 그럼 그 문제는 왜 생겼을까?
이런 탐구적 자세니까 불교공부를 하면 인생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해도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우리 사회에서 보면 기독교 다닌 사람은 똘똘하지만, 절에 다닌 사람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습니다.
그 나사 빠진 게 아상이 꺾였다는 의미라면 좋지만, 무지하고 뭘 몰라서 그런 것이라면 그건 불법(佛法)과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불법을 공부하면 주리반특처럼 깜깜한 사람도 지혜의 눈이 열리고, 눈이 흐리멍텅하던 사람이 눈이 반짝반짝 해집니다.
잘난 척하고, 어깨에 힘주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큰소리치고, 부자라고 뽐내는 사람도,
불교공부를 하면 어깨에 힘이 빠지고 숨죽여놓은 배추처럼 보들보들해질 수 있고,
돈이 없다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지위가 낮다고, 늙었다고 기를 못펴고 있던 사람은,
눈이 반짝반짝 살아나고, 비굴하지 않고, 부러워하는 눈빛도 없고,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억눌렸던 사람은 기가 살아나고, 공중에 붕 떠있던 사람은 착 가라앉게 되니, 이게 인생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불교공부하면 어리버리한 것은 똘똘해지고 뻣뻣한 것은 보들보들해지는 것입니다.
* 주리반특 : 부처의 제자 중 가장 머리가 나쁜 제자
‘불법을 안다는 것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고 연기법을 아는 게 곧 불법을 아는 거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면 불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기법을 알고 연기적으로 사고를 해야 합니다.
괴로움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유(인연)가 있어서 형성되어진 것이니, 그 원인을 하나하나 추적해가면 그 출발점은 없다, 즉 텅 비어있습니다.
본래부터 씨앗이 있었던 게 아니고, 없는 데서부터 한 생각 잘못 일으켜서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 즉 수행하는 출발점의 핵심은 참회이다
우리의 괴로움은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을 하여 그 업에 끌려가서 생긴 것인데,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계속 하는 것 같이, 잘못을 반복하는 게 우리들의 중생살이입니다.
내가 아니라 업(육근 경계)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거기 끌려서 목을 매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더 이상 업은 짓지를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이면 행하지를 말고, 기쁨을 가져오고 복이 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하고 싶더라도 손해나는 것은 하지 말고, 하기 싫더라도 이익되는 것은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를 청정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중독되면 피우고 싶은 욕망이 끊임없이 일어나듯이, 과거에 지은 업식으로 인한 과보는 계속 일어납니다.
그걸 따라가거나 끌려가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는 순간순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무너진 둑을 다시 쌓고 튼튼히 하는 것이 참회, 뉘우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게 계를 지키는 것이고, 계를 지키는 수행을 하는 핵심은 참회입니다.
자기에게로 돌이키고 일어나는 근본자리, 즉 수(受)를 관찰한다.
일어나는 마음을 억제하거나, 또는 일어나지도 않는 것을 하려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니 한쪽으로는 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당처를 관찰해 가야 합니다.
화가 났을 때, 화를 따라가지 말고 화가 나온 당처(생각) 쪽으로 관찰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 후가 아니라, 일어날 때 알아차리고 놔버리면 훨씬 쉽습니다.
마음에 일어날 때, 마음에 싹이 틀 때 자각해서 놔버리는 것이 ‘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마음을 자기가 관찰한다’, ‘민마음을 관찰한다’ 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지 그 뿌리를 더 관찰해보면,
‘나는 경계에 부딪치면 어떤 마음이 일어난다’ 는 것을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
물건만 보면 욕심을 내니, 안하겠다고 해도 물건을 보면 또 욕심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걸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 자기 업식(業識)이다.
업식을 깊이 관찰해서 그것 자체를 녹이는 것 : ‘식을 맑힌다’
자기라는 것이 있을 때, 자기 꼬라지라는 것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 자기 업식(業識)입니다.
그 업식을 깊이 관찰해서 그것 자체를 녹이는 것을 ‘식을 맑힌다’고 말합니다.
그 식을 맑히는 방법이 바로 선정이며, 선정을 닦는다는 것은 업식을 맑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력하면 업장이 소멸된다, 참회하면 업장이 소멸된다, 선정을 닦으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무지를 깨트려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근본 무지, 한 생각 잘못 일으킨 데서 모든 것이 발생한 줄을 알아,
한 생각 잘못 일으키는 것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면 나의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십이연기는 열두 가지 그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고, 철학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여러분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문제를 보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 그 원인의 원인, 또 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찾아서,
즉 본질을 꿰뚫어서 그것을 해결해 내면 현상의 괴로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제5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근본교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말이 쉽지 한 생각 바꾸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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