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3. 근본교리

[법륜스님의 '근본교리'] 제2-1강 십이연기 - 두 번째

상원통사 2014. 12. 15. 21:14

(~~ 제1강에서 계속)

 

경전에 있는 대로 보면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무명으로 연하여 행이 있고, 을 연하여 식별이 있으며, 식별을 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으며,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연하여 부딪침이 있고,
 부딪침으로 연하여 느낌이 있으며, 느낌으로 연하여 갈애가 있고, 갈애로 연하여 취가 있고,
 취함으로 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로 연하여 남이 있으며, 을 연하여 늙음·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 있다,
 이리하여 이와 같이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현상들이 일어나며 (중간 생략~~)     
 내지 이와 같이 아주 커다란 괴로움의 현상들이 멸한다’ 고 이렇게 했습니다.


영어도 한문도 아닌 한글로 되어있는 데도 잘 모르겠지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부처님께서 가만히 앉아서 지금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해결해야 될 과제를 안고 6년간 고행을 하고 있습니다.
고행을 하면서 이걸 해야 되느니 말아야 되느니 하는 두 생각을 다 놔버리고,
아주 편안한 마음의 상태로 명상을 하고 있는데, 그 해결해야 할 과제가 괴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느냐?
괴로움이라하는 것은 분노 화 짜증 미움 슬픔 외로움 공허 등 일체를 다 말하는 겁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신에게 빌기도 하고, 부적을 부치기도 하고, 굿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떤 방법이든 다 일부는 해결이 됩니다.
부처님이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 스승께 배웠을 때,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니 처음보다는 괴로움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보통 사람이란 일부가 없어지면 그게 완전한 길인 줄 알고 매달릴 위험이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는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가 없다,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이렇게 인식했기에 계속하여 괴로움과 속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길을 찾았습니다.
어떤 절대자를 믿고 거기에 맡기거나 거기에 의지해도 괴로움은 많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만 갖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욕구를 충족하는 쪽으로 갔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출가 후에는 욕구를 무조건 억압하고 없애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길도 아니기에 그것을 버린 지금은 욕구 자체를 관찰합니다.
일어난 욕구를 억누르거나 이러한 욕구를 따라가는 게 아니고 그것을 관찰한다 이겁니다.
왜 일어나는지, 그 정체가 뭔지, 옳다 그르다, 있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잘했다 잘못했다 이런 관점에 서지 않고,
그냥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놔놓고 그것을 가만히 관찰한다 이겁니다.


노사(老死) : 늙고 병들고 죽음(괴로움)
‘노사’란 ‘늙고 죽는다’로 해석하는데, 철학적인 용어로 그냥 ‘괴로움’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늙고 병들어 죽으며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한다(老病死憂悲苦惱), 이걸 통 털어서 괴로움이라 말합니다.
‘이 괴로움(노사)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를 붙들고 있었는데, 중도를 자각한 이후에 사고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노사라는 것은 어떠한 조건에서 형성되어진 것, 즉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것 자체만 갖고 계속 시비를 했는데, 이것 단독으로 있거나 없거나 이런 문제가 아니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과거의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일어난 결과물이고,
공간적으로는 무언가 다른 것과 연관 맺어서 이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말미암아 일어나니까, 그럼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는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괴롭다고 할 때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 괴로움이 있는가?


생(生, 태어남)으로 노사(老死)가 있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괴롭다’ 하는 것은, 괴로움이 어떤 조건하에서 발생해서, 지금 유지되고 있는 것이고,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발생하는 것을 철학적 용어로 이라 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것을 노사라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기준으로 하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있다’고 말하고,
철학적·사상적으로 말하면, 지금 괴롭다는 것은 그것이 생겨나서 지금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화가 나서 ‘그 새끼 죽여버릴거야’ 이렇게 하고 있는 게 괴로움인데,
이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어느 시점에 발생한 것입니다.
멀쩡한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이게 발생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게 되었느냐?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다.
이때 생은 육체적인 출생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싹이 터서(발생해서)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식물에 비유하자면, ‘발생했다’는 싹이 튼 것이고, ‘노사(늙고 죽는다)’는 지금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게 노사입니다.
‘있다’는 말은 지금 유지되고 앞으로 죽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有) : 습관이 남아있는 것(씨앗)
그럼 왜 이 나무가 있게 되었느냐? 싹이 터서 싹으로부터 점점 자라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럼 왜 땅속에서 갑자기 싹이 텄느냐? 그것은 씨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싹이 틀 수 밖에 없는 씨앗이 있었던 것입니다.
겨울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지만, 봄이 되어 날이 풀리고 비가 오면 땅속에서 갖가지 새싹들이 올라오는데,
해가 나고 땅이 녹고 물기만 있으면 싹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싹 하나하나마다 그게 그렇게 올라올 수밖에 없는 씨앗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유(有)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근원의 존재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화를 벌컥 낼 때는, 내면에 화를 낼만한 그런 연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유'라 하는데, 그런 업식이 있었다, 그렇게 싹이 탁 틀 수 밖에 없는 종자가 있었다는말입니다.
종자가 있더라도 이런 조건을 못 만나면 싹이 안 트고, 이런 조건을 만나도 그 종자가 없으면 싹이 안 틉니다


그럼 무엇으로 말미암아 '유'가 있게 되었느냐, 왜 이런 종자가 있게 되었느냐?
이렇게 하나하나 계속 따져 올라가서 마지막 도달한 게 '무명'입니다.
알지 못함, 무지, 지혜롭지 못함, 전도몽상,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게 아니라, 현재로부터 출발해서 올라갑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무엇이든지 다 알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이든지 바라면 그분은 다 해줄 수가 있다,
이렇게 위로부터 밑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고, 누구나 다 지금 겪고 있는 현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엄격하게는 관념론이 아닌데, 오늘날의 불교는 관념론이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출발을 할 때 현재로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현재로부터 출발해서 원인을 밝힌 것을 책을 통해 교리적으로 배우다 보니까,
위로부터 밑으로 이렇게 지식으로 배우니까 관념론이 된 것입니다.


불교는 철저하게 자기에게 현재 부딪치고 있는 문제(노사)로부터 출발합니다.
노사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가?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구나.
생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이 있는가? 유로 말미암아 생이 있구나.
유는 취로 말미암아, 취는 애로 말미암아, 애는 수로 말미암아, 수는 촉으로 말미암아,
촉은 육입으로 말미암아, 육입은 명색으로 말미암아, 명색은 식으로 말미암아,
식은 행으로 말미암아, 행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구나,
이렇게 해서 무명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정리를 해봅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입이 있고,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이 있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가 있구나.


빈틈없이 다 맞으니 또 사고를 합니다.
노사가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무엇이 없으면 노사가 없는가? 생이 없으면 노사가 없구나.
무엇이 없으면 생이 없는가? 유가 없으면 생이 없구나.
이렇게 해서 사라지는 쪽의 관을 쭉 해나가니 무명이 없으면 행이 없구나 이렇게 갑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무명을 탁 부셔봤습니다.
무명이 사라지니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니 식이 사라지고,
식이 사라지니 명색이 사라지고, 명색이 사라지니 육입이 사라지고,
육입이 사라지니 촉이 사라지고, 촉이 사라지니 수가 가라지고,
수가 사라지니 애가 사라지고, 애가 사라지니 취가 사라지고,
취가 사라지니 유가 사라지고, 유가 사라지니 생이 사라지고,
생이 사라지니 즉 태어나지 않으니 노사우비고뇌가 없다, 사라졌다 이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명이 타파되는 순간 일체 노사우비고뇌가 싹 사라져버렸다,
눈앞에 안개가 걷혀버리고 어둠이 싹 사라지니,
세상이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전연 다른 실제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전개됩니다.
이것이 십이연기법입니다.

 

(제2-2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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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생각 ***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