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깨달으셨느냐(깨달음의 내용) : 이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삼법인(三法印), 존재론(存在論)
부처님께서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는데,
무엇을 깨달으셨느냐? 이 세계의 참모습,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깨달으셨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어떻더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변화한다,
모든 것들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마디로 ‘연기되어 있다’, 또는 ‘연기법’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깨달으셨는가(깨달음의 방법) : 연기적 인식방법, 십이연기(十二緣起), 인식론(認識論)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연기적 사고(인식)를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셨다,
그러니까 ‘존재의 참모습’을 ‘연기’라고 하고,
‘그 존재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하는 방법’을 ‘연기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연기법’은 ‘법(진리)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방법’을 지칭하기도 하고, ‘법의 실상’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반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반야’라 함은 ‘바르게 인식하는 그 지혜’를 말할 때도 있고, ‘바르게 인식되어진 실제의 세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연기(緣起) : 말미암아 일어난다
연기법 : 깨달음의 내용(존재론)이자 깨달음의 과정(인식론)
연기라는 말은 한자로는 ‘말미암을 緣, 일어날 起’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말미암아 일어난다’ 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연기법은 깨달음의 내용이면서 깨달음의 과정이다,
깨달음의 내용이라는 것은 ‘깨달은 후 본 세계의 참모습’을 말하고(존재론),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바른 인식방법’을 말합니다.(인식론)
즉, 우리가 연기적 인식(연기적 사고)을 하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고,
그 깨달은 세계의 모습이 바로 연기법이라는 말입니다.
‘말미암아 일어난다(연기)’ 하는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어떤 현상은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졌거나 본래부터 있었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현상이든 그러한 현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A로 말미암아 B가 있는데, B는 어떻게 해서 B가 되느냐? A와 연관 맺어져서(A와 관계해서) B라고 하는 게 있다,
A라고 하는 것은 B와 관계해서 있고, B도 A와 관계해서 있는 것입니다.
왜 A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본래부터 있었다, 저절로 있다, 신이 창조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인식하기도 하는데,
실제의 모습은 ‘A라고 하는 것은 A단독으로 존재할 수가 없고, B와의 연관 속에 있다’,
그것을 ‘말미암아 일어난다’, ‘연기’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
이것은 저것으로 말미암아 있고, 저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다,
A와 B는 서로 의존해 있으며 서로 관계 맺어져 있다(상의상존, 相依相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의지해서 관계 맺고 존재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잘 모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게 되게 된다’,
즉, ‘사물(모든 존재)이 그와 같은 것을 보면(깨달으면) 진리를 보는 게 된다’ 는 말입니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법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즉,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든지 않든지 간에,
만유인력의 법칙은 있고, 우주는 그러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불교는 사회적·실천적 관점에서는 보통의 종교와 같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거의 과학과 같습니다.
사고방식도 과학적이고 논리도 완전히 과학적이기에, 일부에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도 말합니다.
보통 종교라고 하면 절대 신이 있고, 그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인데, 불교에는 아예 발붙일 틈도 없습니다.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세계인데(지동설),
옛날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았습니다(천동설).
이렇게 잘못 인식하더라도 농사를 짓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천동설을 기초로 우주여행을 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바른 인식 위에서 어떤 행위와 행동을 하면 예측한 결과대로 나오는 게 맞는 것이지만,
어떤 부분은 바르게 인식하든 거꾸로 인식하든 결과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어떤 사상이 바르게 되어있지 않더라도 모든 게 다 뒤죽박죽되는 게 아니라,
그것하고 상관이 없는 일들은 별 차이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자신들을 돌봐주는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신께 기원하고 감사하며 농사를 짓는데,
그 신이 돌봐주면 농사가 잘되고 돌봐주지 않으면 농사가 안 되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농사는 애초부터 그것하고 관계가 없지만, 그렇게 알고 지어도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믿음과 철학을 비교·분석해 보면, ‘이건 이일과 별 상관이 없구나’ 이걸 알 수 있지만,
하나의 사상·종교·철학에 갇혀있을 때는, 마치 그것 때문에 그 일이 잘되는 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참모습을 잘못 이해하고 하게 되면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마치 쥐가 쥐약을 먹었을 때 살려고 먹었지만 죽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다 거꾸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래가 이 세상에 오던 오지 않던,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존재의 참모습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다만 여래는 그것을 바르고 완전하게 깨닫고 나니,
이제까지 있었던 많은 괴로움 모순 얽매임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에게도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분별하고 연설하여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A가 있음으로 B가 있고, B가 있음으로 A가 있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서 서로 관계 맺고 존재한다,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지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진다.
이것을 볏단으로 설명하면, 볏단이 서 있는 것은 두 볏단이 서로 의지해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때 하나를 떼버리면 다른 하나는 저절로 쓰러지게 되는데, 쓰러진 상태를 우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있다’ 할 때는 서로 의지해 있다는 것이고, ‘없다’ 할 때는 의지가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으면 있다고 인식되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없다라고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럼 실제는 어떠냐? 실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의 세계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그것을 무아 또는 공 이렇게 말합니다.
저 보살님이 집에 가면 아내가 되는데, 아내라는 것은 남편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남편이 있음으로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음으로 남편이 있습니다.
그럼 만약에 남편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는 없어집니다.
남편이 죽으면 자신은 아내가 아니고, 이혼을 해버리면 자기는 아내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남편과 연관을 맺으면 아내가 되고, 아내와 연관을 맺으면 남편이 되고,
부모와 연관을 맺으면 자식이 되고, 자식과 연관을 맺으면 부모가 되고,
전철을 탈 때는 승객이 되고, 가게에 들어가면 손님이 되고, 절에 오면 신도가 되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되고, 집에 가면 아내가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무엇이다’ 라고 정해져 있지 않으며 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연을 만나게 되면 정해지고, 무엇인가와 연관을 맺으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TV 연속극을 보고 울고 웃는 데, 눈을 딱 뜨고 실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마치 밤에 귀신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귀신보고 놀랐다하면 ‘저 바보같은 녀석’ 그러는데, TV보고 울거나 웃는 것은 그보다 더 웃기는 것입니다.
거기 안빠져든 사람이 보기에는, 울고 웃으니 이상하다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빠져든 사람에게는 그 장면을 보는 동안 그것이 현실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꿈꾸는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면 옆사람은 잠꼬대라 하지만, 꿈 속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편이 죽고나면 본인은 아내가 아닌데, 아직도 아내인 줄 착각하고 있으니까 괴로움이 생깁니다.
밥이 아니라 쥐약인데 밥이라고 착각을 하고 먹어버리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닙니다.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것도 같이 쓰러져 버리니까 영원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하면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두 개의 연관이 끊어지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렇게 됩니다.
선과 악은 서로 의존해 있습니다
악은 다 없애버리고 선만 남겨놓자 이러는데 악이 다 없어지면 선도 같이 사라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양반과 상놈은 종자와 본성을 달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놈과 양반은 서로 의존해 있기에 상놈이 폐지되니 양반도 동시에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으니,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리라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오래 살아 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잘못되어서 망하는 게 아니고, 서로 의존해 있던 것은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존재는 서로 의지해 있다 : 공간적 인식, 상의 상존성
서로 의지해있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인식하면 서로 관계 맺고 있다 이렇게 되고,
시간적으로 관측하면, 과거와 현재가 현재와 미래가 서로 관계 맺고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무아(無我) : 유무를 떠난 세계, 서로 연관 맺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유무를 떠난 세계입니다.
존재의 참모습은 서로 연관 맺어져 있기에 ‘그것은 있다고도 그것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다’,
이것을 우리는 ‘무아’라고 하는데, 무아란 ‘여기 아무것도 없다’ 이런 뜻이 아니라,
‘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홀로의 단독자는 없다’ 이런 뜻입니다.
무상(無常) : 시간의 연관성, 존재는 늘 변화한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하는 것은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본 연기인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늘 변화한다’, 이것을 우리는 무상이라 말합니다.
존재의 참모습 :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해 가는 인식론적 접근 :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이것을 사상적으로 정리한 게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고, 여기에 대승불교의 ‘열반적정’을 더하여 삼법인이라고 말하며,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해가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접근해 간 것을 교리적·사상적으로 정리한 게 십이연기법입니다.
(제2-1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근본교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십이연기,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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