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3. 근본교리

[법륜스님의 '근본교리'] 제3강 십이연기 - 네 번째

상원통사 2014. 12. 17. 22:00

(~~ 제2-2강에서 계속)

 

과거(무명, 행), 현재(식 ~ 유), 미래(생, 노사)
그러면 열두 고리가 이해가 됩니까? 이 열두 고리를 시간의 순서로 말하면,
무명, 행은 과거의 수없는 것을 축약해서 말하는 것이고,
생, 노사는 미래의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줄여서 말하는 것이고,
현재를 분석한 것은 식에서 유까지입니다.


식(識) : 과거의 결과이자 현재의 씨앗
유(有) : 현재의 결과이자 미래의 씨앗
삼세 양중 인과(三世兩重因果) :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겹쳐서 일어남

여기서 식은 과거의 결과이면서 현재의 씨앗이고, 유는 현재의 결과이면서 미래의 씨앗으로 겹쳐있으니,
삼세(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렇게 양중(서로 겹쳐있다)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재(씨앗)는 과거의 결과물이니, 씨를 보면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담배를 몇 대씩 피우고 있는 사람은 어제도 담배 피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이 현상이 과거 원인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만 봐도 여러분들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있고,
여러분들이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 수도 있고,
몇 마디 대화만 해보면 무슨 충격과 경험을 갖고 있는 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점쟁이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점쟁이도 가짜배기는 거짓말 하는 거고, 진짜배기 점쟁이는 무의식 세계에서 그 잠재의식을 읽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 나온 씨를 심으면 뭐가 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콩을 심으면 또 콩이 나올지 알 수 있고, 오늘 담배를 피우면 내일도 피울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듯이,
현재를 보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혼을 한다면 어떤 사람과 하려고 할 것이고, 저런 사람하고 결혼하면 생활이 어떻게 될 거고,
거기서 자식은 어떤 애가 낳아질 것이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까지 알 수 있습니다.
거름과 햇빛과 물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콩을 심으면 싹 트고 자라서 열매 맺는 데 며칠 걸릴지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분들이 살면서 어떤 환경에 자라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근본은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소한 구체적인 행동들은 다르지만 그 습관의 흐름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딸을 보지 않고 부모만 보고도 며느리를 삼았는 데,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요즘은 외부세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회니까 부모와 자식이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지만,
옛날에는 변화가 거의 없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랄 때는 다른 것 같지만 다 자라면 같아집니다.
나이들면 어떻게 될지 20대 처녀를 보는 것보다 그 엄마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이런 걸 보면서 인생이란 게 무슨 빠져나올 수 없는 사슬에 얽매어 있구나,
콩은 수만 번 나고죽고 해도 콩밖에 안되고, 팥도 마찬가지로 또 팥밖에 안되고,
환경이 좋아 이번에는 굵어도 다음에는 또 마찬가지고, 조금 작아도 다음에는 또 마찬가지가 되듯이,
우리들의 한 생을 관찰해보고 과거 생도 관찰해보고 여러 생을 비교해보니,
‘이건 뭔가 정해져 있구나’, ‘신이 운명을 딱 정해 놨다’, 이게 숙명론, 운명론입니다.
‘타고날 때부터 이미 사주가 정해져 있다’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일리 있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주어진 대로 살아야 되겠다’, 이게 숙명론이고 운명론입니다.


불교도 숙명론과 운명론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면 운명론과 숙명론에 빠지겠지만,
분석을 해보니 요렇게 진행이 되어 가구나 이걸 알면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즉 사주팔자를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공부하는 것은 사주팔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 사주팔자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석을 해서 어떻게 바꿀 수가 있는 지, ‘취’를 한 번 관찰해 보겠습니다.
담배를 보는 순간 피우고 싶다, 근데 모를 때는 피우고 싶으면 ‘피운다’가 되는데,
의사 얘기를 들어보니 담배가 나뿐만이 아니고 가족의 건강도 해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뭔가 스스로 체득을 해서 알았든, 남의 얘기를 듣고 알았든 아무튼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좋은 줄 알고 계속했는데, 나쁘다는 걸 알면 피우고 싶지만 행동은 안할 수가 있습니다.
즉, ‘취’에서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데 ‘담배를 안 피워야지’ 이런다고,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 내가 안 피우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에 피웠던 결과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까지, 담배에 대해 플러스 반응을 일으키는 것까지는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과보인데, 과보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한다고 없어지지 않고, 과거에 지어진 업력에 끌려가는 것인데,
여기서 자각을 하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어떻게 못하더라도 새로 짓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즉, ‘취’에서 딱 멈추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취(取)에서 멈추는 것이다
하고 싶더라도 좋은 것이 아니면 안하고, 하기 싫더라도 좋은 것이면 해야 하는 것이 ‘’입니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는 좋은 것이 아니기에 하지 말아야 되고,
방생하라, 보시하라는 좋은 것이기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율을 지키면 어떻게 될까요?
이미 지어놓은 결과물은 받지만, 다시 안 지으니까 그 만큼 결과는 안 일어납니다.
내가 지금 안한다 해도, 이미 지어놓은 것에 대한 결과물은 계속 옵니다.
물이 흐르는데 둑을 막으면 흐르던 물이 즉시 말라버리는 것이 아니고,
둑 아래 이미 흘러내려간 물이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 흐르는 것입니다.
둑을 막는 게 계율을 지키는 것인데, 이 계율을 지키는 것은 늘 압력을 받습니다.
과거의 과보로서 계속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니까,
물이 너무 많이 차면 둑이 터지듯이 안 피우겠다는 의지도 허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둑을 세게 막아버리면 멈출 수가 있기에,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습관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절대 도가 아닙니다.
계율을 지키면 과거의 것은 받지만 미래의 것에 대해선 스스로 조절하는 통제력이 있는 것입니다


수(受 : 마음, feeling)를 잘 관찰하여 놓아 버려야 한다
담배를 피우면 괴로우니 끊었지만, 피우고 싶은 것을 안 피우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화를 내면 상대와 싸우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화가 나는 걸 참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참는 것이란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고, 또 참아도 자꾸 터집니다.
그러니 ‘취’를 하기 전에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수’에서 놔버리면 훨씬 더 쉽습니다.
'취'는 이미 다 커서 꽃피고 열매 맺은 것이니 하나 뽑는데도 힘이 들지만,

'수'는 싹과 같으니 아무리 많더라도 호미로 긁어버리면 됩니다.
‘수’를 관찰해서 거기서 탁 놔버리는 게 남방불교에서의 수행법인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일체의 자기 속의 Feeling을 관찰합니다.
발끝에 스치는 작은 감각, 손으로 만져지는 부드러움, 입안에서 느끼는 미각, 귀에 들리는 작은 소리 등,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Feeling을, 리히터 지진계처럼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 비파사나입니다.
그렇게 관찰해서 (+) 반응이 일어날 때 탁 놔버려야 합니다.
화가 일어날 때 놔버려야지, 화낸 후에 알아차리는 것은 이미 일어나고 새끼까지 친 후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관찰하여 수(느낌, Feeling)에서 탁 놔버려야 됩니다.


자꾸 잡초가 일어나면 호미로 계속 긁어야 되는데, 이것은 땅속에 잡초 씨가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땅속에 있는 잡초 씨, 밑에 있는 근본이 내 업식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내 꼬라지를 자각할 수 있지만,
더 깊이 관찰하면 반응이 되기 전에 벌써 내 꼬라지를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을 만난 후 내게 일어나는 화·짜증·미움·싫음 같은 것을 관찰하면서 내 꼬라지가 어떤지 알수 있지만,
내 꼬라지를 더 관찰하면 ‘저런 성격의 사람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내겐 독이다’ 하는 걸 미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와 만나면 상극이 된다, 반드시 불꽃이 튄다는 것을 아는 게 ‘자기 업식을 아는 것’입니다.
즉 수를 관찰하고 싹트는 것을 보면, 그 밑의 종자가 무엇이기에 이런 싹이 트는지 알 수 있는 겁니다.


남들은 우리 밭이 온통 잡초투성이인줄 알지만, 정작 나만 모르고 있다가(내가 화를 내고 있음),
잡초라는 말을 듣고서야 잡초를 뽑습니다(옆에서 화내지 마라고 해서야 참음).
그러나 어릴 때 잡초 싹을 매버리면 남이 볼 때는 잡초가 없는 것 같습니다.(화 안내는 것 같지만 자기는 속으로 알 수 있음)
근데 공부를 더해 ‘수’를 읽게 되면, 남은 나를 보고 화 안낸다고 하지만, 본인은 화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압니다.
더 가면, 안일어나고 고요해도 상황에 부딪히면 무슨 증상이 일어날지 자기가 미리 아니까,
상황에 부딪히기 전에 미리 경계하니까 부딪쳐서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조율이 빠릅니다.
이렇게 자기를 아는 것이 ‘식’을 아는 것입니다.
식이란 습관의 덩어리인데, 이 업식을 알아채고 맑혀버리면 습관이 없어집니다.
담배피우는 습관이 없어지면, 피우고 싶은 Feeling이 안 일어나니, 담배 안피우겠다고 굳이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식을 맑히는 것을 정이라 하는데, 정(선정)에 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육바라밀의 선정, 팔정도의 정정, 주력(呪力), 참선, 염불, 참회, 비파사나 선 등등 많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면 보통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끝난 게 아닙니다.
본래는 없었는데 한 생각 어리석어 담배 피우는 습관이 생긴 것처럼,
지금은 습관이 없어졌다 해도 다시 어리석은 행동을 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 전도망상이 없어져야 되는데, 무명이 타파되는 것을 ‘혜’라고 합니다.
무명이 타파되면 습관의 흐름을 조율할 수 있고, 중독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에,
습관에 따라 가는 게 아니라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즉, 종에서 주인으로 전환이 되는데, 그러려면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을 닦아야 됩니다.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를 떠나 사람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을 끊기를 원하고,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항상 불·법·승 삼보에 대해 듣기를 원하고,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항상 계·정·혜 삼학을 열심히 닦기를 원하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근본교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십이연기를 알고 계정혜 삼학을 닦으면,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이 세상을 살수 있다 하니 좋은 줄은 알지만,

막상 실천하려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