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3. 근본교리

[법륜스님의 '근본교리'] 제5강 존재의 참모습 - 두 번째

상원통사 2015. 1. 8. 20:41

(~~ 제4강에서 계속)


삼법인(三法印)
오늘은 삼법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깨달은 눈으로 봤을 때 존재의 참모습’을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의 참모습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어서 존재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에서 ‘없다’는 것은 ‘관계가 흩어졌다’는 걸 말합니다.
우리는 ‘있다 없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데, 실제의 세계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다만 관계 맺어지면 인식이 되고 관계가 흩어지면 인식이 안되는 것 뿐이지, 그 자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는 것은 ‘관계 맺어졌다’는 것이지, 관계(연관)를 떠난 ‘단독자’라고 하는 존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나에게는 나라고 할 만한 본성이 있다’ 고 생각했는데, 나(자기)라고 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업을 가지고 자기라고 자기가 삼은 것이지, 자기라고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약이란 어떤 순간의 조건 속에서 그 물질의 작용을 갖고 약이라고 한 것이지, 그 물질 자체는 약이 아닙니다.
‘저 사람 참 훌륭하다’ 할 때도 잘 살펴보면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제가 국경을 넘어온 불쌍한 북한 동포들을 도왔다고 한다면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도움을 받은 북한 난민이 볼 때는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좀 훌륭하다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 사회에서 북한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할 것이고,
중국정부가 볼 때는 남의 나라에 와서 국경지방을 소란피운 사람이 되겠지요.
북한정부가 볼 때는 민족을 배신한 놈들을 도왔으니 ‘때려죽일 놈이다’ 이렇게 됩니다.
똑같은 행동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전부 다 다릅니다.
그럼 법륜스님이란 사람은 어떠냐,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훌륭한 면과 나쁜 면 두 개가 다 있는데 이쪽과 저쪽을 보여준 게 아니라,
보기에 따라서 훌륭해 보이는 쪽도 있고 나쁘게 보이는 쪽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륜스님 단독으로는 뭐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누구와 관계 맺느냐에 따라서 훌륭하다느니 나쁘다느니 그저 그렇다느니 하는 것이 나타날 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일까요? 누구도 아닙니다.
가게에 가면 손님이 되고, 집에 가면 아내가 되고, 애 만나면 엄마가 되고,

학교 가면 학부형이 되고, 절에 오면 신도가 됩니다.
마치 물과 같아서 세모 컵에 넣으면 세모가 되고 네모 컵에 넣으면 네모가 되는 것이 원래의 모습인데,
세모 컵에 들어갔다 나온 물은 자기가 세모라고 단정을 지어서 네모 컵에 집어넣어도 세모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건이 안 맞아 일어나는 게 갈등이고, 그게 괴로움입니다.
자기가 사장이거나 장관이다, 그것은 그 조건에서 사장이고 장관입니다.
절에 와서 다른 신도들한테 사장 짓 하거나, 집에서 마누라한데 장관 짓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애들한테도 선생 역할을 하고 부인한테도 선생역할을 하면 아무도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 무아(無我)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
이것은 무아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법(존재)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법에는 실체가 없고 다만 서로 의지하고 관계 맺어져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져 있지 홀로의 단독자 이런 것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질계, 생명계, 정신세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크게 물질의 세계, 생명의 세계, 정신의 세계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은 이 세 가지가 다 겹쳐있습니다.
우리들은 물질로 되어있지만 돌맹이와는 다르고,
생물적 차원에서는 소나 돼지와 같지만, 정신적 작용이라는 게 거기 하나 더 있습니다.
돌맹이를 비행기 밖으로 던져도 떨어지고, 도를 닦은 도인도 비행기에서 발로 차면 떨어집니다.
모든 질량이 있는 물질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하는 것이니, 도인이라도 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생물(생명)입니다.
이 책상위에 풀을 놔두고 배고픈 토끼를 책상 밑에다 놓으면, 토끼는 위로 올라와 풀을 먹습니다.
토끼가 위로 올라온다는 것은 물질의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란 위에게 밑으로 떨어져야지 밑에게 위로 올라올 수는 없습니다.
토끼가 배가 고파 먹으려고 책상 위로 뛰어 올라온 것은 생명현상으로 설명해야 설명이 됩니다.
토끼와 돌맹이의 같은 점은 물질로 되어있는 것이고, 다른 점은 돌맹이에는 생명현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마리의 배고픈 토끼에게 한 마리 먹을 만큼의 풀만 준다면, 서로 먹으려고 싸우겠지만,(생명작용)
사람은 배가 고파도 싸우지 않고 서로 나눠먹을 줄도 압니다.(정신작용)
반대로 토끼는 아무리 많이 주더라도 자기 먹을만큼만 먹고, 남은 풀을 다른 토끼가 먹더라도 그냥 놔둡니다.(생명작용)
근데 사람에게 삼인분을 주면, 저쪽에서는 굶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니까 안줍니다.(정신작용)
이런 것을 일러 욕심이라 하는데, 욕심은 동물적인 속성이 아닙니다.
동물은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안먹는 것이지, 배가 부른데도 남이 못 먹게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기분 나쁘다고 해서 죽이고, 많더라도 몽땅 다 잡아와서 몇 마리만 먹고 버리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동물보다도 못한 정신작용을 삼독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숫제 없는 게 더 낫습니다.
동물에게 없는 나눠먹는 마음을 선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천상으로 가는 길이고,
동물에게 없는 혼자 갖는 마음은 아귀와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생물에게는 생명유지 작용만 있지만, 인간에게는 거기에 정신작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배고픈데도 다른 사람과 나눠먹는 그런 정신작용도 있고, 배부른데도 남 안주는 그런 정신작용도 있는 것입니다.
나쁜 정신작용만 보면서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동물이 되는 게 낫다거나,
좋은 정신작용만 보면서 동물은 무시하고 인간이 최고라고 해서는 안되겠지요.


우리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생물이기도 하고 또 정신작용이 있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니 높은데서 떨어지면 돌도, 깨달은 사람도, 못깨달은 사람도 다 박살이 납니다.
떨어지다가 보면 부러진 놈도 있고 안 부러지는 놈도 있는 것이지, 선행해서 안 부러지고 악행해서 부러지는 게 아닙니다.


옥상에서 뛰었을 때 땅에 떨어지는 것은 도의 공부가 안된 게 아니라 물질작용일 뿐이고,
배고프다고 먹는 것도 도의 공부가 덜된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생명작용일 뿐입니다.
거기다가 우리에게는 정신작용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배고파도 안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작용 중에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버리고,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더욱더 성장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육체를 단련하거나 학대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고, 육체의 욕구를 따라가거나 무조건 억제하는 것도 수행이 아닙니다.


첫째, 물질계
그럼 물질, 생물, 정신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물이 한 컵 있습니다.
한 컵의 물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수많은 작은 물방울의 결합으로 되어있습니다.
더 확대해서 보면 물 한 방울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수많은 물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물 분자 하나는 산소 한 개와 수소가 두 개가 결합해서, 서로 관계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 분자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물분자는 단독자가 아니고 산소와 수소 원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돌턴은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는 가운데 핵이 있고 그 바깥으로 전자가 도는데, 그 속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이 책상을 원자핵이라고 하면 야구공만한 전자가 수원쯤 떨어져서 돌고 있고, 그 사이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습니다.
물질의 근본 알갱이라는 단단한 원자의 속은 사실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 원자 : 1만분의 1mm, 원자핵 : 1조분의 1mm, 전자 : 원자핵의 1만분의 1 크기


원자는 단독자가 아니라 핵과 전자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원자라고 하는 것도 단독자가 아니고 핵과 전자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핵은 또 양성자와 중성자로 되어있습니다.
즉, 원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중간자 등 소립자의 결합입니다.
소립자가 관계 맺으면 원자가 되고, 원자가 손을 잡으면 분자가 되고, 분자가 손을 잡은 게 물질인 것입니다.
이 소립자도 단독자가 아닙니다.
소립자는 쿼크라는 게 있어서, 쿼크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 소립자가 되고 관계가 끊어지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물분자로 돌아와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산소가 가운데에 서고 양팔에 수소를 잡고 있으면 물이 됩니다.
그런데 손을 놔버리면 이건 물이 아닙니다. 물은 없어져 버립니다.
물 분자의 관점에서 보면 산소와 수소가 손을 잡으면 물이 있다, 놓으면 물이 없다 이지만,
원자의 관점에서 보면 산소와 수소원자는 손을 잡았다 놓았을 뿐 그냥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편과 손을 잡으면 아내가 되고, 손을 놓으면 아내라는 게 없어집니다.
아이와 손을 잡으면 엄마가 되는데 아이하고 손을 놓으면 엄마는 더 이상 아닌 것입니다.


관계를 맺으면 인식이 되고 끊어지면 인식이 안된다 : 생멸(生滅)
이렇게 세상 만물은 서로 관계되어 있는 것이지 단독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물방울 하나만 보면 단독자인 것 같지만, 그 물방울은 분자들로 관계 맺어져 있고,
분자만 보면 단독자 같은데 그 속에는 원자들로 관계 맺어져 있습니다.
관계를 맺으면 있고 관계가 끊어지면 없어져 버린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관계가 끊어졌다고 해서 없어진 것도 아니고, 관계가 맺어진다고 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물분자라고 하는 존재는 관계를 맺으면 인식이 되고 끊어지면 안되니까 생겨나고 없어졌다고 말할 뿐입니다.


다만 관계가 맺어지고 바뀐 것이지 생기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생이 있고 멸이 있다는 것은 다만 관계가 맺어지고 끊어진 것이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변한다는 것은 손을 어떻게 잡느냐 입니다.
산소 하나에 수소 둘이 손잡으면 물이 되고, 산소끼리 손잡으면 산소분자가 되고,
수소끼리 손잡으면 수소분자가 되고, 산소 두개와 수소 두개가 손잡으면 과산화수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이와 손잡으면 부모자식이 되고, 남편과 손잡으면 부부가 되듯이, 존재가 바뀌는 것입니다.


(제6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근본교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가 남아있는 것이지,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