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소와 수소가 관계 맺어서 존재한다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면 물 분자 하나가 생깁니다.
물 분자는 얼음도 되고 물도 되고 수증기도 되지만, 분자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을 전기분해하면 물 분자는 없어지고 대신 산소와 수소가 생기는데,
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물 분자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지만,
원자의 관점에서 볼 때엔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두 개, 그냥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소와 수소가 관계 맺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수소 원자는 단독자가 아니고 양성자와 전자로 관계 맺어 있다
원자도 원자자체만 보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수소 원자는 가운데 핵(양성자)이 있고 그 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빙빙 돌고 있습니다.
전자가 핵과 관계 맺어 돌고 있으면 수소 원자이지만, 떨어져버리면 수소 원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소립자 차원에서 보면 돌고 있으나 떨어져있으나 그냥 소립자일 뿐입니다.
즉, 수소 원자도 단독자가 아니고 양성자와 전자가 관계 맺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질 세계는 모두 다 관계 맺고 있다 (무아, 공)
이처럼 단독자처럼 보이는 것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시 관계 맺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관계 맺고 있으며, 관계 맺고 있지 않은 단독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입니다.
‘단독자(홀로의 존재)는 없다’, 이것을 ‘무아’라 말하고, 대승사상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존재가 관계 맺어져 있기 때문에 공간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단독자로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관계 맺어져 있는 그 범위를 가지고 우리가 공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관계 맺음이 없다면 공간 개념이 잡히지 않습니다.
생명세계 : 나뭇잎과 공기는 연관이 없는 듯 인식되지만 연결되어 있다
물질과 물질이 관계 맺어져 있듯이, 생명과 생명도 관계 맺어져 있습니다.
이 관계라는 것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질 때는 그 연결고리를 알 수 있지만,
나뭇잎과 공기와의 관계처럼 눈에 보이지 않거나 손에 만져지지 않으면 연결이 안된 것처럼 인식됩니다.
그러나 뿌리는 대지와 액체로 연결되어 있듯이, 잎은 허공과 기체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또한 생명체입니다.
생명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세포는 수많은 물질들의 연관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와 세포는 핏줄과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어, 발끝에 가시가 박히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빼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소보에 난민이 생겨 다 죽어도 전화가 불통이고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으면 모르듯이,
신경줄이 끊어지면 누가 발목을 자르더라도 우리는 알아챌 수 없습니다.
또 핏줄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하는데, 그걸 차단시키면 세포는 다 굶어 죽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은 다 연결이 되어 있고, 그 연결된 전체가 한 몸인 것입니다.
정신세계 : 인류라고 하는 전체도 하나의 생명이다
여러분들 개개인도 하나의 생명이지만, 크게 보면 인류 전체가 하나의 큰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류 전체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냅니다.
자기 발인 줄 모를 때엔 씻기 귀찮으면 잘라버릴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자기 발인 줄 알기에 가시가 박히면 손이 가서 빼주는 것처럼,
인류가 하나인 줄을 알면 저 아프리카 끝에서 누가 굶어 죽는 것도 나의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나라는 존재가 혼자 독립되었다고 생각하면, 우주에서 볼 때 생각할 수도 없이 작은 존재이지만,
내가 우주와 연결되어있는 줄 깨달으면, 내가 우주의 일부이며 또한 우주가 곧 나인 것입니다.
이 손가락만 갖고 자기라고 생각할 때는 보잘 것 없지만,
손가락은 손에 연결이 되고 몸에 연결되어 있기에, 손의 부분이며 몸의 일부인 것입니다.
손가락이 몸에서 떨어져 있을 때 몸은 자기 몸이 아니지만, 몸에 붙어 있기에 이 몸이 자기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손가락만 갖고 나를 삼는다는 것은, 나와 몸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몸과 나(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연결을 끊는 것이란 물질적으로는 없어지는 것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죽는 것이고, 정신적으로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물질로 연결된 것은 가위로 끊지만, 정신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은 생각으로 끊습니다.
‘보기 싫어’ 이게 끊는 것이고 칼로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당신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것이 무지이고, 무지는 가려지는 것이고, 가려지는 것은 끊는다는 것입니다.
끊어지니 화가 나고 괴로운 것이지, 그걸 탁 트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알면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연결된 전체가 자기인데 무지해서 연결을 자르고 요것만으로 자기를 삼으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생물은 연결된 전체가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 세포가 전체를 무시하고 자기만으로 자기를 삼아,
사라져야 할 때 안 사라지고, 역할을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계속 자기만 번성을 하게 되면,
그 세포 하나로 볼 때는 무한번식이니 영광이겠지만, 몸 전체로 보면 암세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집안에서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생각 안하고 자기만 챙기면,
자기한테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가정 전체로 볼 때는 암적인 존재가 되어,
못된 며느리, 못된 남편, 못된 자식, 패륜아가 되고, 그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이 됩니다.
한 나라 안에서 한 지역이나 한 단체가 권력과 돈을 독점하면 사회전체가 흔들리고,
한 나라가 세계를 장악하면 주위의 국가가 난리가 나고, 결국은 자기도 망합니다.
이것은 인류 모두가 한 생명이고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 부처님의 아픔은 바로 한 몸으로서 아픈 것이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산하대지와 모든 중생이 다 한 몸이고 모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동체)
그 모든 생명의 아픔이 내 발끝에 박힌 가시의 아픔처럼 느껴지는 것을 대비(크게 아프다)라 합니다.
우리의 아픔이 부처의 아픔이 되는 것은 바로 한 몸으로서의 아픔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이 나니 나도 병이 나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내 병도 낫는다’고 했고,
지장보살은 ‘지옥에 한 중생이라도 남아있는 한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아프다면, 자기는 완전히 건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일체관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체 중생과 삼라만상까지 다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한 집에 사는 남편과 자식과 부모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만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되는데, 옛날에는 다 그 정도는 알았는데,
지금은 머리가 더 좋아졌는지 더 어리석어졌는지 부모자식 간에도 부부간에도 남남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 간에, 지역 간에, 또 남북 간에 한 민족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한쪽은 몇 백만이 죽고 있는데 반대쪽에서는 흥청망청 쓰고 있는 이 꼬라지를 보면,
독립운동 했던 우리 선조들이, 김구 선생이나 김좌진 장군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한 아들은 못나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아들은 부자로 살면서도 쳐다만 보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부모라면 그 못된 놈만 미울까요, 제 목구멍만 챙기는 놈도 같이 미울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인데, 무슨 이유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못 주는 것 미안하게 생각해야지, 남이 주는 것까지 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만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유는, 돈에 미쳤는지 뭐에 미쳤는지, 미쳐 날뛰어서 그런 것입니다.
무아(無我), 공(空)을 알면 대비심(大悲心)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무아, 공을 알면 대비심은 저절로 나오는 것인데, 여러분들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출가해서 제행이 무상인 줄 알고 제법이 공한 줄 아는 것까지는 좋은데,
부모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모든 것은 다 공’이라 합니다.
이건 공이 아니라 패륜이고, 인간이 아니고 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또 죽었다고 그것 붙들고 징징 울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전 재산 팔아서라도 살리려 노력해야 하지만 죽었으면 이제 그만 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저쪽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되는데, 제 부모 죽었다고 그거만 붙들고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원래 존재(삼라만상)란 나면 다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공이란 그런 것이니, 이미 지나간 건 놔버려야 합니다.
외면하고 잘 죽었다가 아니라, 그런 변화는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두 번째,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것은 존재의 생멸에 대한 상의상관성인데 시간적인 관점에서 관찰한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관찰하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관계 맺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관찰하면 시간의 전과 후가 관계 맺어져 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끊임없이 나고 죽는 변화를 하고 있지만, 몸 전체로 보면 별 변화가 없습니다.
부속은 계속 바뀌지만 그 기본형을 유지시키면서 교체되고 있으니까,
우리 눈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고, 이 몸이 영원하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조금 더 길게 관찰하면,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변화를 하지만,
저 바위는 사람이 수만 번을 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도 내내 그냥 있으니,
바위는 영원하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바위도 닳아지고 깨지며 변화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찰나에 일어나는 것도 있고, 길게 일어나는 것도 있고, 더 긴 세월을 두고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큰 범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우주적 변화라 하는데, 이 세계의 생성소멸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크게 변하는 것은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려 우리 눈에 관찰이 안되니 안변하는 것 같고,
또 세포는 빠르게 변하지만 너무 작아 우리 눈에 관찰이 안 될 뿐입니다.
우리는 변화한다 안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존재 자체가 변화하거나 안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인식을 하면 변화한다고 말하고 인식을 못하면 변화 안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단지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상견(常見) : 항상하는 것, 영원히 계속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단견(斷見) : 없어져 버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존재란 생겨나서 유지되다가 흩어져서 사라지게 되는데,
유지되고 있을 때 관찰하면 항상하고 영원히 계속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상견이라 합니다.
반대로 흩어져서 사라질 때를 관찰하면 없어지는 것 같은데, 이것을 단견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견이나 빠지거나 단견에 빠지는데,
존재는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라, 다만 변화할 뿐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다, 이것 또한 공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무상(항상함이 없다)이라 합니다.
제행(모든 것)은 무상하다, 이것 또한 공인 것입니다.
(제8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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