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9-1강에서 계속)
불립문자(不立文子): 기존 불교의 잘못을 타파하는 분명한 입장
교외별전(敎外別傳) : 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입장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 선불교의 수행법
선의 주장은 간단히 이야기하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네 가지입니다.
불립문자는 기존의 잘못된 불교를 타파하는 아주 분명한 입장이고,
교외별전은 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입장이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바로 수행법입니다.
한량없는 세월동안 어쩌고 저쩌고, 무슨 책을 봐야만 한다는게 아니라, 마음 깨달으면 곧 부처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어지러우면 중생이고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중생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중생인 것은 마음이 어둡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일어난 선불교는 대승뿐만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보다도 우위에 서게 됩니다.
이 가르침은 대승불교 내 다른 종파의 교리와도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교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유교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라고 내세우지도 않고,
네가 예수를 믿든지 유학을 하든지 도교를 믿든지 상관 하지 않고,
네 마음 못 깨달으면 중생이고 네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네 마음 못 깨달으니 괴롭고 네 마음 깨달으면 해탈한다,
이렇게 간단해졌으니 그 파급효과가 아주 컸습니다.
선불교가 초기세력은 약했지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역사적인 변화와 이유가 있었습니다.
화엄종이나 천태종 등 교종은 엄청나게 커져서 사찰이 수만 개에, 승려도 이백만이나 되었기에,
사원유지에 재정이 많이 들어가고 또 세금을 내야할 사람들이 다 승려가 되어버리니까,
당나라 말에는 모든 승려를 속퇴시키고 절에는 불 지르고 전답을 빼앗는 큰 파불(불교탄압)이 일어납니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대승불교(교종)는 완전히 기가 꺾였지만,
선불교는 책 없어도 되니 경전이 불태워져도 상관없고,
스스로 농사짓고 일하면서 수행을 했으니 후원이 끊어져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히 백장청규를 보면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라고까지 하며 자립적인 방식으로 생활하는 것을 강조했으니,
이런 불교 탄압에 교종은 완전히 허물어졌지만 선종은 끄덕도 없어 판도가 바뀐 것입니다.
꼭 자체의 힘만 갖고 판도가 바뀌는 게 아니라 적응력이 있었기에 시대의 변화에도 대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 백장청규(百丈淸規) : 중국 선원(禪院)의 규칙을 서술한 원(元)나라 때의 불서(佛書).
* 一日不作 一日不食 :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날은 먹지 않음. 중국 당(唐)나라의 회해선사(懷海禪師)가 실천함
오늘날 선불교는 공안이 관념화됨
그러나 오늘의 선불교는 공안이 또 관념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는 것은 ‘아무리 나쁜 짓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니,
굉장히 큰 희망이 되는 것인데도 보통은 그 의미를 지식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 공안(公案) :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해결과제로 제기되는 부처나 조사의 파격적인 문답 또는 언행(言行). 화두(話頭)와 같음
이것은 선문답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없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개에게 정말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이번에는 ‘있다’라고 합니다.
방금 전에는 ‘없다’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있다’고 하니, ‘그럼 정말은 뭘까?’ 라는 의심이 생깁니다.
이렇게 의심을 가지면서 화두가 생기는 것입니다.
서암 큰스님의 말처럼 '진실한 사람이라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다 화두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이 먹다 버린 것을 쓰레기통에서 맨 날 뒤지고 있습니다.
화두는 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의문덩어리인데,
남이 갖다 버린 걸 쓰레기통에서 뒤져가지고 와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걸 자꾸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공안이 사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대중의 생활과 유리됨
그다음에, 수행자들의 생활이 대중과 너무 유리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저 밥 먹고 자기 개인 수행하다가 인생이 끝나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중생의 아픔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즉 대승불교도 소승불교의 형식과 거의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불교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있는데,
선불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그 원칙에 조금만 안 맞으면 이단이라 합니다.
선도 화두선이 아니면 이단이라 하고 인정을 안 해줍니다.
화두선도 다섯 개 문파중의 하나일 뿐인데, 화두선이 아니면 사이비라 하고, 조계종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청화스님이 염불선 이야기하니까, 그것이 아무리 청정하다 해도, ‘조사선이 아니고 염불선이잖아’ 이러면 끝입니다.
또 뭐라 그러면 ‘그것은 돈오가 아니고 점수잖아’ 이러면 끝나버립니다.
즉 하나의 새로운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는 별 볼일 없고 오직 선이어야 되고, 또 선 중에도 화두선이어야 되고,
화두선 중에도 돈오돈수라야 힘을 받지 돈오점수 하면 뭔가 좀 모자라는 것 같다,
이런 관념과 권위를 가지고 모든 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본질적인 삶에 있어서는 평범한 사람의 윤리도덕관보다도 못하면서도,
승려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현실이기에 ‘우리 불교는 어디로 나아가야 될 것인가’, 이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져진 큰 과제입니다.
새로운 불교가 기성불교와만 논쟁을 하여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쉬운 일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옛날에는 생각도 못했던 서양의 종교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바로 옆에 등장해 있습니다.
새로운 불교는 기성불교의 한계뿐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의 모순과 한계도 뛰어넘어야 새로운 희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 있어도 쉬운데, 오늘날은 모든 종교를 다 합해도 사회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과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나 지난 백년동안 종교전체를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이정도만 돼도 괜찮은데, 우리들에게 더 크게 진리의 기준으로 다가온 게 자연과학입니다.
자연과학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인문 학문들도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큰 종교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볼 때, 우리는 불교의 발전뿐만이 아니고 인류의 미래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 역사 공부하고 있는 것’ 입니다.
과거에 누가 어쨌다는 걸 글자 그대로 공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쭉 둘러보면서 새로운 것이 일어날 때 어떤 입장이었으며 무슨 문제를 제기했는지,
왜 그들은 공을 주장했고, 교외별전 같은 걸 주장을 했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기성관념에 사로잡혀 인정을 안하고 핍박을 했으면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이런 것들을 공부하며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는 데 응용해야 하는 것’ 입니다.
여기까지 선불교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우리나라 불교를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가야에는 AD48년에 소승불교가 들어왔고, 초전법륜성지는 가야정사입니다.
AD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 순도화상을 보냈고, 2년 후엔 아도화상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국내성에 초문사하고 이불란사가 지어졌는데 여기가 고구려의 초전법륜성지입니다.
백제는 AD384년에 동진으로부터 인도승 마라난타 대사가 위례성에 들어왔습니다.
마라난타 대사가 초막을 짓고 약숫물을 먹으며 병치료를 했던 우면산 대성사를 백제의 초전법륜성지로 삼고 있습니다.
신라불교는 경북 구미 선산 도개면 모례장자 집터를 초전법륜성지로 잡고 있는데,
AD418년 전후에 고구려에 와있던 아도화상이 전한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삼국에 불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신라는 527년 법흥왕 14년 때 젊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이 되고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하고 신라가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쪽는 발해가 건국되면서 우리나라는 남북조 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서쪽의 당나라와 교류를 하게 되면서 불교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고구려 승려 보덕이 일으킨 열반종(涅槃宗), 자장이 중국의 율종을 가져와 일으킨 남산종(南山宗),
원효의 법성종(法性宗), 의상의 화엄종(華嚴宗), 진표의 법상종(法相宗)을 신라5교라고 말합니다.
또 출중한 스님들도 출현나는데 중국 선종의 6조 혜능대사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 원효대사, 의상대사 입니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 가면 구산선문(九山禪門), 즉 선종이 벌어지는데,
중국 남종선의 거봉인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와 그 제자들에게 배워 일으킨게 구산선문입니다.
이렇게 신라 말에는 5교와 9산이 벌어졌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창시한 천태종이 완전히 판을 쳤고 그다음은 화엄종이었고,
그러다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쌍수를 내걸고 선교일체를 주장하면서 선종의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고려 말엽 중국에 건너간 태고 보우(太古 普愚)대사는 56대 석옥 청공(石屋 淸珙)대사로부터 법을 계승해 돌아와서,
선불교의 57대 조사가 되었고, 그 이후 선불교의 법맥은 우리나라로 넘어와 오늘날 조계종이 계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불교가 엄청나게 탄압을 받습니다.
태종대에 오면 아홉 개의 종파를 일곱 개로 통폐합하고, 수천 개의 사찰도 242개만 두고 다 없애버립니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오면 종파는 두 개만 두고, 사찰은 전국에 36개만 두고 다 없애버립니다.
그것마저도 연산군 대에 오면 절을 다 기생집으로 만들고 승려 다 쫒아내 버렸기에,
한때는 스님이 한 사람도 없을 만큼, 스님들이 다 머리 기르고 숨어살 만큼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승려는 8대 천민(노비·백정·재인·기생·공장·승려·무당·상여꾼) 중의 하나로 취급했는데,
아마 인류역사상 조선조 때 불교를 탄압한 것만큼 종교를 탄압한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탄압을 해서 불교의 씨를 말리려고 했지만, 워낙 사상적으로 강하다보니까
산속에 숨어 지내며 맥을 이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탄압을 받으면 민중화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주술이나 기복과 결합하여 속화되어 고고한 사상성이 없어져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즉 서민대중에게 접근하는 보통 종교가 되어버리지, 사회를 이끌 사상적 비전은 없어져 버립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이렇게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는데 응용하기 위함이다.'
과연 법륜스님다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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