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2강에서 계속)
대승불교도 초기에 일어날 때는 정통성을 인정 못 받고, 비불설이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어리석은 대중을 위해서는 아함경을 설하셨고 대승보살을 위해서 대승경전을 설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니 500년 후 대승보살이 출현할 때 내놔라 해서 지금 나왔다고 자기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기존의 불교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대승불교인들은 그렇게 믿고 그것을 전파했습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엔 소승불교가 정통이고 대승불교는 정통성이 없었지만,
대승과 소승이 동시에 들어온 중국에서는 대승불교가 자리를 잡았기에,
중국인들은 대승불교야 말로 역사적 근거가 있고 확실한 정통의 불교로 생각했고,
새로 일어난 선불교는 아무 정통성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눈에 보이는 가르침만 있는게 아니라, 부처님이 별도로 법을 전한 게 있다,
부처님의 정법은 삼처전심으로 마하가섭 존자에게 전래되고,
그것이 대를 이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렀다고 선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인도인들은 역사(족보)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는 나라입니다.
인도사람들은 지금도 성이 없고 이름만 있습니다.
그들은 이름 뒤에 자기가 소속된 카스트를 적는데, 그 카스트가 일종의 성이지만,
일반적으로 카스트는 부르지 않으니까 이름만 있는 것입니다.
신라시대에 박·석·김 하면 왕족이고 설·최하면 육두품인줄 알듯이,
인도에서는 카스트만 보면 신분도 알 수 있고, 직업도 알 수 있고, 결혼도 같은 카스트 안에서만 합니다.
이런 전통을 갖고 있기에 인도에는 족보개념이 없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족보개념이 확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파들은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선불교는 다른 기성의 교단에서는 갖고있지 않던, 확실한 깨달음의 족보를 내놓으며,
기성교단이 비불교, 외도라고 공격하는 데에 대해 방어하며 자기 정당성을 주장해나갔습니다.
이렇게 증거를 대도 처음에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력이 점차 늘어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자 상황이 역전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스님들도 선불교에 출가를 하고 일반 신도가 다 선불교 신도가 되니,
선불교가 정통이 되고 나머지 종파들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육조 혜능대사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봐도 신수대사가 정통이고 혜능은 홍인대사의 칠백제자 가운데 꼬래비 중의 상꼬래비였습니다.
홍인대사한테 계를 받은 것도 아니고, 8개월 동안 방아만 찧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진 애였는데,
한 20년 있다가 나타나 ‘내가 법을 계승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사까지 했던 신수의 제자들은 별볼일 없었고, 반대로 혜능에게는 기라성같은 제자들이 계속 되었기에,
결국 혜능이 정통이 된 것이고, 신수의 제자는 가다가 대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합니다.
서산대사 생전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크게 네 개의 문파로 나뉘었습니다.
서산대사가 열반할 당시 사명대사가 가장 큰 문파였고, 편양 언기대사(鞭羊 彦機)는 스물네 살밖에 안되는 막내였는데,
사명대사보다는 언기대사의 후대에 출중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기에 정통 맥이 서산에서 언기로 넘어갔고,
오늘날 한국 불교 조계종은 따지고 보면 언기대사의 법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육조 혜능까지 부처님 이후의 법맥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법맥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과거칠불 이야기입니다.
과거칠불(過去七佛)이란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이전에 출현한 여섯 분의 부처님을 말하는 것으로,
과거 장엄겁(過去莊嚴劫)에 출현한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등 3불과,
현재 현겁(現在賢劫)에 출현한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등 4불을 합쳐 7불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입멸한 부처이므로 ‘과거의 7불’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의 여섯 부처님의 법을 계승해 잇게 된 것이고,
앞으로 56억7천만 년 후에 나타나실 여덟 번째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은 미래불입니다.
선불교는 기성불교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의 대승불교는 학문화 하고 관념화 되고 형식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옹호를 받으면서 승려가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타락하게 되었기에,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니, 그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선불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 진리는 문자로서 증거할 수 없다
브라만교에서 하늘에는 범이 있고 인간에게는 아가 있어, 범·아가 하나가 되는 게 해탈의 길이라고 주장할 때,
부처님은 ‘아라고 할 게 없다’ 이래가지고 브라만교의 근본을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그 법을 계승한 소승의 각 부파들은 ‘부처님의 법이 진리다’ 라고 주장을 하니까,
대승은 공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제법개공이다, 모든 법은 다 공하다’ 이래가지고 소승을 때려 부쉈습니다.
선불교도 절대화되고 관념화 된 대승을 부숴야 했는데, 거기에 나온 것이 불립문자, ‘문자를 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문자로서 증거할 수 없다’는 것은 부처님의 아주 초기의 입장입니다.
진리란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가치관 또는 경전적 근거를 갖고 그 증거로 삼지 말라고 원시경전에도 나옵니다.
‘어느 경전 어느 구절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요게 진리다’ 이것이 교학이고 기성 중국 대승불교였습니다.
그러나 선에서는 그것을 부정하고 불립문자를 주장하였습니다.
‘문자를 세워서 진리를 증거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는 바로 체험을 통해서 검증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불립문자란 ‘문자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고, ‘경전적 증거를 가지고 진리냐 아니냐’ 를 논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것이 진리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이용합니다.
하나는 과거를 끌어오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다, 성경 어느 구절에 있다, 논어 몇째 줄에 있다, 마르크스 자본론 어디에 있다, 이러면서 자기주장을 합니다.
그것이 없이 주장하면 학설의 근거가 없다고 하니, 논문을 쓸 때도 꼭 주를 달아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가 진리를 논할 때 쓰는 게 다수결입니다.
‘동네사람한테 가서 다 물어봐라’, 이렇게 나올 때는 다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옛날 근거를 대거나, 다수의 숫자를 동원해서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무지몽매한 사람이 옳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많은 과거의 전적을 끌어와도 그것은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립문자이고 선불교의 핵심입니다.
불립문자란 ‘문자를 알면 장애다’ 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는 문자를 세우거나 과거의 전적을 들춰서 검증하는 게 아니다’ 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카롭게 비판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교외별전을 이야기합니다.
교외별전, 비밀히 언어와 문자를 떠나서 따로이 전한 게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즉 한 편으로는 기성불교를 파사하면서 한 편으로는 수용했습니다. 이게 포용성입니다.
그냥 때려 부수기만 하면 싸움이 되겠지만, 한쪽으로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껴안았습니다.
대승도 그렇게 했습니다.
‘제법이 공하다’ 해서 한쪽으로는 부수면서, 다른 한 쪽은 ‘소승’이라고 포용을 해냈습니다.
그런 것처럼 선불교도 ‘불립문자’라고 해서 대승불교를 부정하면서,
‘교외별전’이라 하면서 말씀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고 말씀을 떠나서 전해지는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느그들은 다 껍데기고 필요 없다’ 라고만 주장한 게 아니고,
‘말씀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고 말씀 밖에 전해지는 것도 있다’ 고 한 것입니다.
말씀 밖으로 전해지는 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니 이걸 이심전심이라고 말합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눈을 외계로 돌리지 말고 자기 마음을 곧바로 잡을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본 마음을 깨치면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직지인심, 손가락을 갖고 지적하듯이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면,
견성성불, 그것이 성품을 보는 것이고 성불이다,
경전을 읽고 해독하고 이런 게 성불이 아니고,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게 성불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대승에서는 한량없는 세월동안 보시행과 보살행을 하고 다생겁래로 굴러서 52계율을 지나야 성불할 수 있기에,
보통 사람들은 ‘그건 뭐 하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우린 못하겠다’ 이렇게 되기 쉽지만,
선은 무슨 경을 읽으라는 말도 없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하니 너무나 간단합니다.
어느 종파 얘기도 없고 무슨 경 읽으란 얘기도 없고 신분이나 남녀 구분도 없고,
그 어려운 한문 배우고 팔만대장경 다 읽어야 부처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깨달으면 곧 부처라 했으니,
이것이 대중화가 쉽게 될 수 있는 동기가 되고, 중국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제19-2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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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생각 ***
무조건 내 종교만 최고라고 우기고 믿으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조금 떨어져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분석해주어야 더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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