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1강에서 계속)
태국의 불교
태국은 대표적인 불교국가로, 일반 국민들도 어릴 때 한 번씩 출가해 승려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전통도 잘 보존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를 한번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의식도 아주 강합니다.
태국의 왼쪽으로 버마와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오른쪽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아래로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지배를 받았지만, 태국은 식민지 지배를 한 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국제 역학관계에서 완충지대의 역할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노력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이 아주 강한 편입니다.
태국은 이미 국제 자본주의 사회에 문호가 개방된 나라이고,
시골에 가보면 아직 가난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문명생활도 유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태국불교는 국제적인 경쟁력은 별로 없습니다.
또 승려들의 부패가 심한데, 돈 문제와 여자 문제가 늘 말썽이 됩니다.
인도의 보드가야에는 전 세계 불교가 다 들어와 있기에, 거기서 보면 각국의 불교를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성지에서도 미얀마 스님들이 제일 성실한 편이며, 그들은 인도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정도입니다.
경제적인 면으로만 보면 인도가 미얀마를 무시하겠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교화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굉장히 부유하여 사찰도 거대하게 짓지만 인도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편입니다.
인도사람들과의 접촉을 보면 일본은 주로 관리들이나 상류층과 관계를 맺는 편이고,
미얀마 사람들은 아랫사람들하고 관계를 맺는 편이고, 태국은 중간쯤 됩니다.
태국은 경제적으로는 중간쯤 되는 나라이지만 국가적으로 지원을 하니까 사찰의 규모도 굉장합니다.
각국 불교 중에 여기에서 제일 초라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게 한국불교입니다.
한국불교는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종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원력있는 스님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놀러왔던 젊은 스님이 동냥얻어 시작을 했기 때문에,
생활하는 태도도 그렇고 절의 규모는 부탄이나 네팔에서 지은 절보다도 못합니다.
어쨌든 거기서 보면 각국 승려들의 특성도 알 수 있는데, 태국의 승려들은 부유한 편입니다
한국스님들하고 태국스님들이 조금 뻣뻣하고, 돈도 잘 쓰는 편에 속합니다
티벳사람과 미얀마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약간 촌스럽지만 순수한 기가 흐르는 비해,
태국사람은 한국사람보다는 좀 덜할지 몰라도 약간 기름때가 묻었고 빤질빤질한 편입니다.
민족주의와 결합되어있는 태국불교는 자국내에서 영향력은 크지만 서양사회나 국제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언어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스리랑카와 버마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스님들이 영어를 잘 하는 편입니다.
국제 종교회의 가면 서양사람 빼고는 인도사람들이 판을 칩니다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것은 역사의 후퇴를 가져온 불행이었지만, 오늘날 세계화 추세에선 장점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버마와 스리랑카에서는 영어가 통하기에 서양인들이 와서 적응하기도 쉽고, 서양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태국이나 한국, 일본, 대만의 불교인들은 자기나라에서는 잘나갈지 몰라도,
국제 사회에 가면 입도 뻥긋 못하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태국에서도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납니다
자본주의적인 문물과 불교의 부패상에 대해서 반대하고, 철저하게 청정계율을 지키며,
보시를 받지 않고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스스로 노동하는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붓다다사(Buddhadasa)라는 스님에 의해서 시작된 산치 아쇼카라고 하는 단체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태국의 잠롱 방콕시장이 그 단체 소속 멤버인데,
하루 한 끼만 먹고, 선거운동 때 돈도 안 쓰고, 집도 없이 월급도 다 보시해버리고, 아침마다 청소부들과 같이 청소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기는 재가자까지도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붓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살려는 이런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또 전번에 우리가 초청했던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라는 사람은 태국 사회에서 지식인 그룹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영희 교수 같은 분인데,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여 박사도 땄지만, 서양식 소비주의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이 그룹도 독립된 단체이긴 하지만, 붓다다사 스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태국 안에서만 보면 어마어마한 사찰도 많고 스님들도 많고 높은 사람들도 있지만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이 그룹들이 주목받을만한 그룹입니다.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에서 보면 아리야라트네와 술락 등이 주목을 받고 있고 이 운동을 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
인도는 불교가 사라졌다 하지만 제가 가서 조사한 바로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건 성이 ‘석가’, 카스트가 ‘사키’인 석가족 출신의 소수 사람들이 불교도로 남아있습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인도에서는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이 유명합니다.
암베드카르는 천민출신으로, 아버지가 군인이고 영국 지배하에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고,
돌아와서는 독립운동을 했으며 초대 인도공화국의 법무부 장관이 된 인도건국의 핵심멤버입니다.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 천민은 다만 탄생함으로써 인간 존재로 인정될 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상층의 힌두 계급과 간접적으로도 접촉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신분을 지닌 집단입니다.
실제로 상층 계급은 불가촉 천민의 그림자조차 닿기를 꺼려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 속에서 암베드카르는 사회적인 신분 차별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1956년 10월 14일 50만명의 사람이 일시에 불교로 개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이 불교 집단 개종식을 주도한 인물이 암베드카르였습니다.
인도에서 종교라는 것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고, 종교를 중간에 바꾼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 성이 정해지는 것처럼 종교도 그렇게 정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도의 새로운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인도의 기성사회에게는 ‘불교도 = 천민’이란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지아의 불교
소승불교의 영향권에 있다가 불교가 없어져 버린 나라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입니다.
이 나라들에는 유적만 남아있고 불교도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도네시아는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고 그들은 대부분 불교신자이기에,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대승불교에 넣어야 됩니다.
일본의 불교
일본은 불교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카톨릭이 들어온 지 400년, 개신교는 100년이 넘었지만 합해도 신자가 인구의 1%가 안됩니다
그만큼 자기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 불교는 신도하고 융합이 된 상태입니다.
일본불교인들은 우리처럼 일반신자들이 공부를 하고 불교를 이해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 전통이듯이, 일본에서 불교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낸다 해도 내가 유교신자는 아닌 것처럼,
일본의 젊은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가 불교신자라는 인식도 별로 없고,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는 불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죽을 때 보면 다 불교신자입니다.
일본에는 납골당이 다 절에 있고, 조상의 위패가 거기에 모셔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조상의 위패가 조계사에 모셔져 있다면, 그 자손들의 위패도 다 조계사로 갑니다.
자기가 이미 어느 절에 소속이 되어있어 신도를 새로 포교할 필요도 없는데,
이게 일본에서 제일 큰 정토종(정토진종)입니다.
일본사람은 태어나서 예를 올리거나, 정월 초하룻날같은 때 복을 비는 곳은 진자(神社)이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화려하게 올리고,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불경을 외고 화장을 하는,
신앙 차원이라기보다는 생활 관습이나 문화화되어 있는 이런 불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본불교를 장례불교라고도 합니다.
술락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불교는 매우 아름다운 불교입니다.
사찰도 잘 지어져있고 건물도 깨끗하지만, 아주 아름답게 망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본불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1253년 니치렌(日蓮) 스님이 법화경을 중심으로 불법(佛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일련정종을 일으켰는데,
이 영향을 받아 1930년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가 창가학회(創價學會)를 조직하였고,
불법(佛法)을 근본으로 개개인의 인간혁명과 생활혁신, 더 나은 사회건설을 지향하는 종교단체로 발전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신도(神道) 중심으로 사상통일을 하면서 탄압을 받아 조직은 괴멸 상태가 되었다가,
전후 다시 복원하여 2009년 현재 회원 1,000만 세대를 거느린 일본 최대의 종교가 되었는데,
다양한 문화운동, 교육운동,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세계평화 실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조직력뿐만 아니라, 정치조직도 갖고 있어 공명당은 국회의원이 오십 몇 명이나 되고,
우리나라에도 울산 등 남쪽지방에 들어와 신도가 몇 십만이 된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우리나라에서 활동을 못했지만 이젠 일본문화가 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있고,
IMF 이후에 건물 빌딩 땅 등을 맘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엄청나게 밀려들어올 겁니다.
지금은 기독교만 경쟁상대라 생각하고, 불교 안의 다른 종파만 경쟁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열린 세계에서는 일본불교, 대만불교가 들어와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종파끼리 싸우고 문중가지고 싸우는 이런 것은 서로 죽자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그들은 한국을 중요한 포교 대상으로 삼고 몇 십 년씩 준비를 해오고 있습니다.
일본불교는 민족주의와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자기를 유지시키는 힘은 있지만, 대신 세계경쟁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선은 백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선불교의 7~80%가 일본 젠 부디즘입니다.
'선(禪)'의 국제적 명칭이 '젠(Zen, ぜん)'인 것은, 일본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의 불교
한국불교는 아직도 안거철에 들어가고 수행을 강조하는 이런 분위기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에만 있는 분위기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신도들이 절에 와서 이렇게 교리를 배우고 수행을 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문제점은 맨날 싸운다는 것, 부패해있다는 것, 그런 단점도 있지만
아직도 수행에 대한 욕구들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한국불교는 자기가 수행을 하든 안하든 ‘수행하면 선’이라 생각합니다.
참선한다고 해야 수행한다고 치지 딴 건 안쳐줍니다.
수행은 선불교 형태를 가지고 있고, 주의주장하고 법회할 때는 다 대승불교를 주장합니다.
보시해라, 인욕해라,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지만, 법문의 내용 등 모든 것이 다 대승불교 사상입니다.
입만 뻥긋하면 공 얘기(대승불교)지만, 계율이나 교단은 소승계율에 소승 교단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신도들의 신앙형태는 다 정토불교요, 정토종입니다.
즉 관세음보살 부르고, 아미타불 부르고, 지장보살 부르고, 이렇게 해서 복을 비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주문이 많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밀교영향도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특징이 별로 없는, 한마디로 말하면 짬뽕입니다.
천태종이면 천태종 이렇게 어떤 경전을 중심으로 하거나, 선이면 선을 하거나 이런 게 아닙니다.
선적 입장을 가지면 일체의 관념을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요령을 흔들고 제사를 지내고 이런 것은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연 서로가 용납이 안되는 것들이 섞여가지고 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짬뽕이니 여러분들이 불교교리를 배우거나 절에 다니면 복잡하고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장점은 통불교적인 개념입니다
종파불교 등 다른 나라 불교에서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한 절 속에 다 섞여가지고,
법당에 가서 예불할 때는 무슨 종파 식으로 하고, 참선할 때는 선종 식으로 하고, 신도가 오면 무슨 식으로 하고,
이렇게 다 섞였지만 그래도 별 모순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 또 장점입니다.
전 세계가 다 기독교와 결합을 못할지라도 한국불교가 기독교와도 잘 지내는 것은 그런 전통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이것은 원효로부터 시작된 통불교의 하나의 큰 전통입니다.
중국불교와 일본불교는 종파불교이지만, 한국불교는 통불교적인 그런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계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분은 숭산스님입니다
숭산스님은 미국 내에서도 최고의 지성인 그룹인 보스톤의 하버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교화했고,
지금은 각 주마다 참선하는 선방이 있을 정도로 퍼져있고, 세계 여러 곳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선불교 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다섯 명에 한 명 정도는 숭산스님 제자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삼우스님은 캐나다 토론토와 미국 시카고 지역에서 미국사람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우리 불교는 우리 교민을 상대로 하는 불교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하나의 문화로서의 불교이기에 세계불교에 영향력이 없지만 삼우스님은 다릅니다.
그다음에 우리나라에서는 국제 연등회라고 해서 해외의 많은 스님들과 교류를 하고 있는데,
특히 유럽 쪽, 러시아 쪽, 홍콩 이런데 관계를 맺고 있는 게 국제 연등회입니다
한국불교가 국제적으로 관여한다면 세 그룹 정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제21-1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일본불교는 장례불교이고, 한국불교는 짬뽕의 통불교이다,
장례불교보다는 짬뽕불교가 더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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