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1강에서 계속)
앞으로의 새로운 불교운동
지금까지는 시간과 공간적으로 불교가 변해온 과정을 쭉 살펴봤는데,
앞으로의 새로운 불교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맨 먼저 해야 할 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이 무엇인가?’ 이것을 일단 밝히는 것이고,
이 불교의 근본 사상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꽃 피었던가?’ 를 알아야 하고,
이런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지금 이 시점에 ‘이 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다음엔 ‘이런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분석하고,
그 원인들을 제거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이 과연 약이 될 수 있겠는가?’를 살핀 후,
그것들이 붓다가 가르친 세계관, 철학, 사상, 행동지침, 가치관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하면,
‘그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즉, 불교의 근본사상이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행동표현, 새로운 지침으로 나와야 할 것인데,
그것이 ‘기존 불교의 재해석’으로 나올 지, 아니면 ‘새로운 언어표현’으로 나올 지는 우리가 더 살펴봐야 됩니다.
대중부의 불교가 기존의 불교로부터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면, 대승불교는 새로운 언어로 대승경전을 제작했습니다.
또 중국에서 대승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심화했다면, 선불교는 완전히 다른 언어방식으로 접근해 나갔습니다.
지금 기존 불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실천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불교를 향한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볼 수가 있고,
이 방법이 확실한 희망이 된다고 하면, 이것을 대중화 시킬 때는 새로운 언어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즉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이해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로 나아가는 것이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살펴보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가 대학시험에 합격하는 게 제일 큰 문제이고,
혼기에 접한 처녀들은 결혼이 가장 큰 문제가 되겠고,
회사가 어려운 사람은 부도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문제가 되겠지요.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종교라면, 기존 종교나 새로운 불교나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 외에,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커다란 문제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큰 문제지만 앞으로는 작아질 문제가 있고,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커질 문제도 있고,
지금도 크고 나중에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우선, 과거에도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이고 미래에도 문제인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계되는 것, 마음 다스리기 이런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줄어들거나 늘어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환경문제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까지 합해서 말하는 지구적인 과제 중 가장 큰 것이 환경문제인데,
이것은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이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탐욕이 원인’인데, 이런 문제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중요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 문제는 인류적 과제인데, 하나는 갈등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문제입니다.
갈등문제라는 것은 인종, 민족, 남녀, 계급, 이런 차이로 인해서 서로 차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의 차별을 폐지하고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게 평화운동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우월성이라는 것은 다 자기의 관념입니다.
관념을 버리면 다양한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기에 여기에도 충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빈곤문제란 기아, 질병, 문맹의 문제인데, 이것을 어떻게 퇴치할거냐 하는 것은 복지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도 역시 우리가 중생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검소하게 살아가는 삶이 이런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갈등문제와 빈곤문제는 구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니까 갈등을 일으키고, 약자들이 겪는 고통이 기아 질병 문맹의 문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스트레스인데, 스트레스란 정신적인 괴로움입니다.
스트레스도 다 이런 갈등관계에서부터 발생하는 문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각 개인들은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과제들에 대해서, 정토회에서 제시하는 해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개인적인 과제는 수행을 통해서 풀어나갑니다.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게 JTS(Join Together Society) 운동입니다.
갈등의 문제 중에 우리가 당면한 최고의 문제는 남북간의 갈등입니다.
우리에게 큰 문제인 통일은 갈등문제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족적인 과제로 볼 때 우선 풀어야 할 큰 문제는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정착입니다
통일이 최대의 과제 같지만 이 화해와 평화를 기초로 하는 통일로 나아가야지,
무조건적인 통일, 전쟁이 나도 통일하면 좋다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평등이 실현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지역 불균형, 동서 화합, 노사분규 문제,
여러 가지 부정부패, 인권보호 문제, 정치 경제적인 여러 문제 등,
사회적인 과제해결에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생길 것이고,
이런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 못하면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대중의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불교가 개인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철학적으로 올바른 해답을 제시하고 실천이 담보가 되어 구체적인 영향을 줄 때만이,
우리 사회에 하나의 비전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불교도들에게는 해결해야 될 큰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철학을 올바르게, 자기 사상체계나 삶의 길을 올바르게 잡아야 하고,
둘째는 내가 소속되어있는 불교를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 개혁만으로 세상이 좋아진다면 내가 소속된 불교만 개혁하면 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기존의 불교는 개혁해야 될 대상이면서도, 또 사회적인 조건 속에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즉 부패세력은 척결해야할 대상이면서도, 역사적 사회적으로 보면 피해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그냥 때려 부숴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피해자에 속하는 것은 옹호하고 보호해야 되고, 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은 타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의 불교는 서로 종파가 다른데서 문제의식을 느꼈지만
지금은 기독교나 다른 종교라고 하는 더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닥쳐와 있기 때문에
종파적인 개념을 넘어서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이게 큰 과제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면 종교라는 것도 사회에서 세력이 자꾸 약해져가고 있으니,
종교라는 틀을 넘어서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인 제문제와 사회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융화하고 비판해 나가야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가장 큰 도전이면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있는데 그게 바로 자연과학입니다.
오늘날에는 실험실에서 아기도 만드는 세상이니,
앞으로 돼지에서 수퍼맨을 만들어가지고 그 몸뚱이를 잘라 사람에게 수술한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갖고 있는 윤리관이라든지 생명관이라든지 이런 게 다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옛날 것만 갖고는 안되고, 자연과학의 많은 부분에 대한 고려도 해야 됩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었다고 진화론을 거부해서 우리가 바르게 아는 것을 더디게 하였습니다.
백인이 지구상에 제일 먼저 나타나야 되는데 연구해보니 검둥이가 제일 먼저 나타났는데,
백인들은 그걸 인정을 안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인류학의 발전을 50년 100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인류가 이룬 제학문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해야 되며,
또 그걸 딛고 새로운 불교가 나와야지 그걸 무시한 불교라는 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 식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그것은 골동품이 되기가 쉽지, 인류에게 어떤 창조성을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은 자연과학의 원리나 첨단 과학이론들까지도 불교사상을 정립하는데 검토해야 될 중요한 문제이고,
또 정보통신의 문제도 깊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느끼고 말하는 컴퓨터가 나올 때 이것에 대한 견해도 있어야 하고,
특히 가상공간 문제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될 것인가도 큰 문제입니다.
가상공간이 생긴다고 하면 아이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친구를 사귈 때 서로 껴안고 부딪치며 노는 게 아니라 가상공간 안에 들어가서 놀았을 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교리,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거기 먹혀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해서 새로운 가치관들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가만히 살펴봤을 때 배울 점은 비판과 포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친구지간에서도 비판만 하고 포용을 안하면 서로 적대하게 됩니다.
적대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틀렸다 싶어도 끝까지 싸웁니다.
비판은 옳았을지 몰라도 결과는 두 쪽이 나고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무조건 포용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게 말하면 포용이지만, 결국은 세속적인 잘못된 것이 그대로 옮아서 같이 부패해서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판도 하고 포용도 해야 됩니다.
큰 틀은 포용하고 작은 문제들에 있어서는 비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비판은 공이었고, 그것으로 인정사정없이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는 대승이고 느그는 소승이다’ 이게 포용입니다.
이단으로 몰아서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같이 껴안고 나갔습니다.
회삼귀일(會三歸一)정신이나, 화엄(華嚴)사상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은 불립문자였는데, 요만한 티꺼리도 붙지 못하도록 때려부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라고 했습니다.
'마음에서 말씀이 나오는 것이니 마음과 말씀은 결국 같은 것이다', 이게 포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기성의 불교, 기성의 종교 또는 사회의 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것을 내세워 단칼에 깨트리고 비판하고 부숴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엉켜진 이 실타래들은 원칙을 가지고 쳐나가야지, 적당하게 타협해버리면 죽도 밥도 안됩니다.
잘못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파사의 중심이 있으면서도, 다시 다 포용해야 됩니다.
왜? 종교가 다르고 학문의 방식이 다르고 인종이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어우러져서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뤄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울타리 속에서 기독교나 여타 사상과 철학들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살아나고, 각각의 사상과 철학도 다 그대로 살아나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 그대로 용납되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없애버려도 안되는,
불교를 기준으로 해서 말한다면 새로운 불교, 제4의 불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불교라는 이름마저도 버리고 새로운 인류문명의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시기를 뭘로 볼 것이냐는 보는 눈에 따라 여러 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산업사회 이후에 정보사회의 도래로 볼 수도 있고,
철기문명 이후에 다음 문명으로 넘어가는 그런 문명의 전환기로 볼 수도 있고,
신생대 제4기 홀로세가 다른 세로 넘어가는 그런 지질적 전환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우리 주관적으로 우리 사회를 평가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놓여진 사회, 우리들의 삶, 인간 이것을 아주 냉철하게 평가한 뒤,
우리는 우리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를 하는 것도 여기서 이래야 된다 하는 결론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많은 문제와 허점들을 제기함으로써 여러분들 각자가 이제 자기의 문제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개인의 인생, 직업, 전공분야, 종교 등 모든 부분에서 있어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여러분들이 연구를 해 나간다면 바로 우리들이 어떤 새로운 모색들을 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풀어야할 과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큰 과제를 둔 입장에서 우리의 문제들을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면 음식 맛이 좋으니 나쁘니 이런 것 갖고 다툴 일도 없어지고,
옷이 새거냐 헌거냐 갖고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되고,
방 평수 갖고 신경 좀 덜 써도 된다 이말 입니다.
또 기성의 불교 교단을 비판할 때도 지금 무엇을 더 우선시 해야 되느냐에 따라서,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비판할만한 가치도 비판할 시간도 없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작지만 강하게 비판하고 나가야 될 문제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종교를 대할 때도 이런 큰 눈으로 보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종교에서 불상의 목을 쳤다거나, 페인트칠을 하거나 땅밟기를 하는 것들은,
감정적으로는 기분 나쁜 일이지만, 더 크게 볼 때는 무시해도 될 작은 문제에 속하고,
지금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처리해나가야 될 것들은 훨씬 더 큰 문제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고 우리가 다 같이 해결해야 될 과제이긴 하지만,
우리는 한국 땅에서, 불교 안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발 디딘 데서부터 출발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바라보는 안목은,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기성 불교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 사이비라 하겠지만,
물질문명에 찌든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제4의 불교를 염원하면서,
자기가 발 디딘 데서부터 출발해서 하나하나 나아가야 한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에,
난 120%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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