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강에서 계속)
그 다음 우리가 많이 아는 대승경전으로는 화엄경이 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 반야의 공사상을 통하여 이루어진 무한한 우주의 실상을 설해 놓은 것
대방광불 화엄경은 반야의 공사상을 통하여 이루어진 무한한 우주, 제법계, 이 세계의 실상에 대해서 설해놓은 것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현상의 절대화를 부정하고 그런 관념을 타파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타파하는 것만 계속 주장하면 좀 허전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제행무상이란 ‘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 변하는 것을 모르면 집착을 하게 되는데, 변하는 걸 알게 되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생은 무상하다(허무하다)’ 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근본이 있고 실체가 있고 잡을 게 있어야’ 안심이 되지, ‘텅 비었다’는 것만 갖고는 뭔가 좀 부족합니다.
텅 빈 줄 알면 해탈한 것인데, ‘텅 빈 그 세계의 진실은 뭐냐’ 자꾸 이런 사고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텅 빈 이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 설하게 되었습니다
‘법의 실상은 텅 비었다’ 라고 끝나는 게 아니라,
텅 빈 그 세계에 전개되는 찬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화엄경입니다.
화엄경도 반야부 사상을 토대로 하였기에, 기본적으로 들어있는 공사상, 보살사상, 반야사상 외에,
크게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너 가지가 있습니다.
초발심을 낸 보살이 성불에 이르기 위해서는 52위(位)를 거쳐야 된다.
52위(位) : 10신(信),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 10지(地), 등각위(等覺位), 묘각위(妙覺位)
초발심을 낸 보살이 성불에 이르기 위해서는 52위를 거쳐야 되는데,
첫째가 열 가지 믿음, 십신을 가져야 되고,
믿음을 토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그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십주입니다.
그 다음은 열 가지 실천인 십행, 갖가지 공덕을 지어야 되고,
그 공덕마저도 자기가 갖지 않고 중생에게 회향을 해야 되는데 이게 십회향입니다.
그러고 나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십지(十地)입니다.
이때는 땅 地자를 쓰는데, 대지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모든 것을 다 자라게 하고,
온갖 오물을 다 버려도 거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흡수하므로,
분별심이 끊어진 그런 세계, 보살의 무한한 대자대비를 땅에다 비유를 한 것입니다.
여기에 이른 보살을 십지보살이라 합니다.
이것을 지나면 부처님의 깨달음과 버금가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등각위라 합니다.
등각위는 11지 보살, 일생보처(補處)보살이라도 하는 데, 이것이 성불하는 경지의 마지막 보살입니다.
마지막은 묘각위에 이르는데, 바로 부처님과 같은 급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분이 묘각위에 이른 보살인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네 분 보살들을 부처님과 거의 동격으로 치지만, 어쨌든 보살은 보살입니다
이렇게 대승불교에는 보살의 52단계를 거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데, 소승불교에서 이에 해당하는 것이 37 조도품입니다.
입법계품(入法界品) : 선재동자가 온갖 선지식을 찾아가 공부를 해 가는 과정
두 번째, 화엄경에는 입법계품이 있습니다.
선재동자라고 하는 한 수행자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온갖 선지식을 찾아가서 공부를 해나가는 그런 과정이 있는데,
맨 먼저 문수보살을 만나서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믿음을 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52위와 비교하면, 문수보살을 만나서 믿음을 갖게 되는 바로 십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면서 총 53 선지식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10주, 10행, 10회향, 10지를 지나고 등각위를 지나서 묘각위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만난 보살이 미륵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입니다.
문수로 출발해서 다시 문수로 돌아와서 보현보살로 끝나는 기나긴 여행인데,
이 여행에는 스님들만 찾아가는 게 아니라, 장자, 창녀, 이교도, 바라문 등 온갖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갖가지 직업을 갖고 있는 온갖 사람이
다 깨달음에 이르는 선지식이 될 수가 있다 하는 포용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선지식(善知識, kalyāṇa-mitra)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4법계관(四法界觀)
세 번째, 화엄경에는 네 가지 법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차별 현상계를 사법계(事法界),
차별 현상계를 떠난 본질의 세계를 리법계(理法界),
리, 사가 둘이 아닌 걸림이 없는 세계를 리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거기서 더 나아가 화작,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는 것은 차별현상계, 중생계를 말합니다.
모든 걸 살펴보면 하나하나 다 별개의 존재들이고,
그 별개의 존재들이 끝없는 생사윤회를 하고 나아간다고 사물을 보는 것이 사법계입니다.
비유를 든다면,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파도가 심합니다.
바다로 나갈 때는 놀거나 고기 잡거나 뭔가 이익을 얻으러 나갔는데,
파도와 풍랑에 휩쓸려가지고 배가 뒤집히고 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어푸어푸하면서 파도가 밀려오면 물에 잠기고 파도가 지나가면 겨우 고개를 들고 숨을 쉬고,
이러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런 세계가 사법계인데,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잘살려고 하고 자유롭기 위해 사는데, 수많은 파도(경계)가 밀려옵니다.
부모·형제·자식, 친구, 사업 등 온갖 것들에 휩쓸려가지고 허둥지둥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이런 차별현상계를 꿰뚫어서 그 본질을 보면, 갖가지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별현상계가 나뭇잎 같다면, 그 나뭇잎 줄기를 따라서 근원으로 가보면 마지막엔 한 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만법이 귀일, 일법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하나마저도 더 나아가면 텅 빈 세계, 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 세계가 리법계, 본질의 세계입니다.
비유를 들면, 파도나 풍랑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으니, 크게 방파제를 막아 그 안에서 배를 타고 논다고하면,
풍랑을 만날 이유가 없어 고요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아내 때문에 괴로우면 아내를 떠나고, 남편 때문에 괴로우면 남편을 떠나고,
자식 때문에 괴로우니 자식을 떠나고, 사업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니 사업을 떠납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 이게 다 파도니까, 다 떠나서 혼자 깊은 숲속에 가서 가만히 있으면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사(事)법계가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면, 리법계의 세계는 소승수행자들의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사(事)법계는 파도와 파도 사이에 갇혀있으면서, 파도가 한 번 오고 가는데서 생사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고,
리법계라고 하는 것은 방파제로 둘러싸여있는, 좁은 호수에 갇혀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방파제라고 하는 것도 세월이 많이 흐르면 무너집니다.
파도 속에는 1초만에 헉헉거리고 방파제 안에서 편안한 것은 백 년이라 하더라도,
우주적인 시간에서 보면 백 년이라는 시간도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큰 눈으로 보면 그는 방파제 안에 갇혀있는 것이지 자유롭게 해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게 진정한 자유와 해탈일까요?
아무런 장벽이 없는 푸른 바다에 나가서 파도가 치거나 풍랑이 불어도 끄떡없어야 진정한 자유이고,
이런 세계가 리사무애법계입니다.
본질의 세계와 차별현상계라는 게 둘이 아니다,
이것은 거짓의 세계고 저것은 참의 세계 이렇게 두 개의 세계가 아니고,
사실은 바다로부터 파도가 일어나고 파도가 잠들면 바다가 되니 리·사라는 게 둘이 아니다,
만유에 본질이 있다 하는 게 중생의 세계(사법계)라면, 잘 살펴보니 텅 비었다 이게 리법계다,
차별현상계인 색과 텅 빈 본질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이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이고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이게 리사무애법계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아주 큰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아가면 파도가 배를 뒤집지 못하고 풍랑이 뒤집지를 못합니다.
윈드서핑 같은 기술을 익히면 그런 파도와 풍랑을 이용해서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중생계에서 지금 서있는 여기가 바로 보살의 세계이고,
보살은 갖가지 중생의 고통 속에서 같이 살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그 중생을 구제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세 가지(사법계, 리법계, 리사무애법계) 다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물에 안빠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법계 사람은 물에 빠져서 죽겠다는 것이고,
리법계 사람은 빠지지 않기 위해서 고립되어 있어야 되고,
리사무애법계 사람은 그 파도와 풍랑 속에서도 빠지지 않고 맘대로 노니니 더 이상 바랄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빠져야 된다는 그 생각마저도 버려버립니다.
해녀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조개를 따려면 물에 뛰어 들어야 됩니다.
그럼 이 해녀는 물에 빠졌다고 해야 될까요, 안 빠졌다고 해야 될까요?
배가 뒤집어져 물에서 허우적거린 것이나 자기가 물에 뛰어 든 것이나, 물에 빠지긴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히 빠졌지만, 그러나 또한 빠진 게 아닌 이런 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우리같은 중생이 보면 사법계하고 비슷하지만, 사사무애법계는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도 놔버린 것입니다.
안 빠지면 안 빠진 대로 좋고, 빠지면 해녀처럼 조개 따오면 됩니다.
안 빠지는 게 더 좋다는 이런 생각도 없습니다.
빠지면 조개를 주워오기 때문에 좋고, 안 빠지면 옷을 버리지 않으니까 좋습니다.
이런 세계가 사사무애법계입니다.
(제14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바다에 빠지면 조개 따와서 좋고, 안빠지면 옷 안버려서 좋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즐겁습니다.
'법륜스님의 법문 > 2. 불교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5강 대승불교 사상 4 (0) | 2014.10.23 |
---|---|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4강 대승불교 사상 3 - 법화경 (0) | 2014.10.21 |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2강 대승불교 사상 1 - 반야부 (0) | 2014.10.13 |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1강 대승불교 - 세 번째 (0) | 2014.10.07 |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0-2강 대승불교 - 두 번째 (0) | 2014.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