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2. 불교의 역사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2강 대승불교 사상 1 - 반야부

상원통사 2014. 10. 13. 22:25

오늘은 대승불교 사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파불교의 상좌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형대로 유지 전승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대중부는 경전의 가르침과 계율을 시대와 지역의 상황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였다면,
대승불교는 기존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새로운 경전을 탄생시켰는데, 
이 경전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인들은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불렀고, 상가도 이들 보살로 구성했습니다.


보살(보디사트바)로 상가를 구성
소승불교에서의 상가는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라고 하는 출가오중으로 구성하는데 반해,
대승불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부대중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보살로 상가를 구성했습니다.


목표를 아라한이 아닌 부처가 되는 것에 둔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게 아니라 부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처에 이르기 위해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 되는데, 이것을 반야라고 합니다.
반야에 의해서만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지, 조그마한 반딧불 같은 깨달음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발심을 하여 용맹정진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한다든지, 경전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정도로는 안되고,
아주 큰 원을 세워서 한량없는 보살행을 해야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sāt-paramitā) :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섯 가지 수행법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르기 위해 닦아야 할 여섯 가지 실천덕목을 육바라밀이라 하는데,
바라밀(바라밀다, paramitā)는 ‘저 언덕(彼岸)에 이른다’,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으로,
성취, 최상, 완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살은 이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완성시켜 정토(淨土)를 건설해 갑니다.
육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여섯 가지를 말합니다.
보시(布施)는 조건 없이 기꺼이 주는 생활이며, 재보시(財布施), 법보시(法布施),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고,
지계(持戒)는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생활이고,
인욕(忍辱)은 박해나 곤욕을 참고 용서하는 생활이고,
정진(精進)은 꾸준하고 용기 있게 노력하는 생활이고,
선정(禪定)은 마음을 바로 잡아 통일되고 고요한 정신상태에 이르는 것이고,
지혜(智慧)는 진상(眞相)을 바르게 보는 정신적 밝음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 법은 공(空)사상, 수행법은 반야(般若)사상, 수행의 주체는 보살(菩薩)사상
이렇게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닦아야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반야바라밀다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면, 이 세계는 고정된 것도 없고 실체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우리 인간들의 관념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착각할 뿐이지,
제법의 실상은 그런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이것을 공이라 합니다.
공, 반야, 보살, 이것이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인데,
법의 실사상에서는 공사상이고, 수행법에 있어서는 반야사상이고,

그 수행의 주체는 무한한 희생과 봉사를 하는 보살사상입니다.


삼승설(三乘說) :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세 가지 길.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대승에서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데 3종류의 다른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에 이끌려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성문승(聲聞乘)으로 가장 능력이 떨어진 것이며,
다음은 스스로 인연의 이치를 깊이 관해서 나아가는 연각승(緣覺乘)이 있고,
최상위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을 내서, 자타일시성불도로 나아가는 보살승(菩薩乘)이 있습니다.


또 대승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길과 중생을 구제하는 길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봅니다.
깨닫고 난 뒤에 중생을 구제하거나 중생을 구제하고 난 뒤에 깨닫는 게 아니라,
바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큰 원을 갖고 정진해 나가는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수행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또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성문의 길도 있고 연각의 길도 있고 보살의 길도 있는데,

성문이나 연각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보살의 길만이 부처의 경지 이를 수가 있습니다.


육도(六道) :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십법계(十法界) : 육도(六道) + 성문, 연각, 보살, 불
해탈이란 육도윤회(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육도윤회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아직 부처의 경지에 못 이르렀기에,
일곱 번째 성문, 여덟 번째 연각, 아홉 번째 보살, 열 번째 불(부처),
이렇게 이 세계를 십법계로 나누어 십법계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다불사상(多佛思想) :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부처님이 등장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많은 부처님이 등장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계신 게 아니고,
과거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계셨고 앞으로도 수많은 부처님이 계실 것이다,
또 이 사바세계뿐만 아니고 타방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거기도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서방에는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이, 동방에는 유리광 세계의 약사 부처님이 계시는 등,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는 다불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반면에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계시고,
보살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이전 전생에 수행해오던 그분만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 모든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하니, 보살은 수도 없이 많은데,
보살 중에는 초발심 보살도 있고, 수행이 깊어 부처님과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보살도 있습니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이런 보살님들은 부처님과 동격에 가까운 그런 보살들입니다.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보살행을 해야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살의 한량없는 보살행에 대한 얘기, 즉 육바라밀의 공덕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이 말은 ‘소승처럼 책 읽고 명상 좀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딧불 같은 지혜다’ 라는 비판이 들어있습니다.


윤회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중시된다
대승에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보살행을 해야 하니 윤회와 전생의 얘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윤회사상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이었지만, 부처님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하셨습니다.
자기관념을 버리고 깨닫도록 그렇게 말씀하셨지, 전생얘기 같은 것은 거의 안하셨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전부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한량없는 과거생으로부터 무수히 수행정진해야 해탈을 한다고 하다보니까,
민간이 갖고 있는 사상체계가 불교에서 받아들여지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윤회전생에 관계되는 얘기는 대승불교에 들어오면서 불교의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자신의 공부’보다는 전법(傳法)이 강조된다
소승불교는 자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갖고 어떻게 공부할거냐 이게 주 과제인데,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전파할거냐 하는, 법의 전파사상이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가장 강한 게 법화경인데, 법화경에서는 법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전파하는 게 곧 해탈의 길입니다.


대승불교의 초기경전 : 반야부 계통의 경전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대승불교의 경전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은 수도 없이 많이 있는데, 가장 초기 경전이 반야부 계통의 경전입니다.,
'반야부 계통'이라 하는 이유는, 반야를 주장하는 경전이 하도 많으니까 다 뭉뚱거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반야부는 한문으로 번역된 것만 해도 600권이 있고, 금강반야바라밀경이나 반야심경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반야부 경전의 핵심사상은 반야(般若)사상과 공(空)사상
이 반야부 계통 경전의 가장 핵심사상은 반야사상 즉 공사상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를 깨닫는 게 바로 반야입니다.
‘법의 실상이 공하다’고 하는 공사상과,
‘법의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하는 반야사상이 핵심이고,
또 그것을 수행해나가는 주체자는 보살입니다.


초기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공사상을 주장한 것은 소승의 실유설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소승불교, 특히 상좌부 계통은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를 절대화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는 실체가 있다’ 이런 실유설을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대승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거다’,
‘시대상황이 바뀌면 다른 교설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 하고 주장하는 게 아집’이라면,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이것만 옳다 라고 집착하면 그건 법집’이다,
그건 다만 집착에 불과한 것이지, 그건 깨달음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다,
법의 실상은 공한 것이기에,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 가르침의 절대성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서울로 가는 길을 인천사람에게는 동이라, 수원사람에게는 북이라, 춘천사람에게는 서라 가르쳤다,
그런데 의정부사람이 물으면 경전에 없는 내용이지만 남으로 가라 이렇게 말해야 되니 새로운 언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부처님 당시에는 의정부 사람이 없어서 직접 전하지는 못하고 ‘남으로 가라’는 말씀을 따로 놔놓았는데 이제야 나왔다,
대승에서는 이렇게 주장을 했지만 그것은 경전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고,
사상적으로 봤을 때는 남으로 가라고 새로운 언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게 바로 불교의 근본사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동으로 가는 게 진리다, 서로 가는 게 진리다, 북으로 가는 게 진리다 라고 정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상황과 시대에 따른 방편에 불과하다,
방편은 인연을 따라서 일어난 것이니 그것을 절대화 하면 안된다,
그것을 절대화 하면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서 뗏목을 타고 건넌 사람이
건너간 뒤에도 고맙다고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하고 같은 것이다,
강을 건넜거든 자기를 건네준 뗏목도 버려야 한다,
뗏목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을 봐서는 안된다,
이런 사상들이 들어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도 없고, 진실한 실체도 없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브라만 사상은,
하늘에는 브라만이라고 하는 절대 신이 있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나라고 하는 절대 아가 있는데,
나(절대 아)와 브라만(절대 신)이 분리되어 있는 게 인간의 방황이고, 하나로 합해지는 게 해탈이니,
합해지려면(구원받으려면) 신에게 참회하고 갖가지 공양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에 반해 부처님께서는
그건 다 사람들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절대 신 그것도 관념이고, 절대 아 이것도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없고 진실한 실체라는 것도 없다,
이렇게 해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습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 공(空)
이 세계는 연관되어서 변해가는 것이니,
연기가 곧 ‘제행무상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가 곧 공입니다.
그러니까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붓다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교법을 유지전승하려했던 소승불교인들은 바로 그 교법을 절대화하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무아의 사상에서 오히려 유아의 사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대승불교인들은 우리들의 관념 이런 것을 색이라고 표현하고,
그 관념의 절대화를 무너뜨려버린 것 그것이 바로 공이라고 표현이 된다,
그래서 제법은 공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반야부 계통의 경도 초기에는 실체를 부정하는 공사상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반부에 가면 본래는 텅 빈 것이지만 인연을 따라서 이게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현상계가 없는 게 아니라 본질은 텅 빈 것이고, 인연을 따라서 또 현상계는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다가 공이라면 파도는 색이고 색에는 실체가 없다,
본질로 보면 텅 비었지만 그 텅 빈 자리로부터 제현상이 또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정을 통해서 다시 긍정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색과 공이 다른 게 아니라 색이 곧 공이다,
색을 절대화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색이 공인 줄 알면 바로 공으로부터 제현상까지도 수용하고 포용할 수가 있게 된다, 
이렇게 반야부 계열의 후반부에는, 부정한 것마저도 그 절대 부정 위에서 다시 수용해 나가는 이런 사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13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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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생각 ***

 

전생과 윤회는 인도의 전통사상일 뿐,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