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상념주(別想念住) : 깊이 관하는 것, 사념처관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놓는 것은 세상살이를 좀 지혜롭게 하는 것에 속하고,
오정심관, 다섯 가지의 마음을 관하는 법을 닦는 것부터 수행이라 말할 수 있으며,
이런 관법을 어느 정도 익힌 뒤에 조금 더 깊이 관하는 것을 별상념주라 하는데,
별상념주는 앞에서 우리가 공부한 사념처관(관신부정, 관수시고, 관심무상, 관법무아)과 같은 것입니다.
신념주(身念住) : 몸이 부정하다는 것을 관하는 것
첫째, 신념주란 몸이 부정하다는 것을 관하는 것,
몸이 깨끗하지 못하고 몸이 성스럽지 못하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느낌을 관하는 것
둘째, 몸에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느낌을 관하는 것, 느낌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몸에 가렵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가렵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의지가 일어나서 손이 긁으러 가는데,
물속에 들어가면 찬 기운이 느껴지듯이 가려움도 그냥 가려움 그 자체로 느껴버리면,
일부러 가렵고 싶어서 가려운 것처럼 가려움 속으로 자기가 확 빠져 들어가 버리면 가려운 것이 없어집니다.
다리가 저리면 거부하지 말고 그냥 그 저림 속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러면 된다 안된다 이런 의지를 발동하지 말고, 그냥 가려움 그 자체에, 저림 그 자체에 싹 들어가라는 겁니다.
몸에 침을 놓으면 보통은 ‘아 따가워’ 이렇게 되지만, 관할 때는 그 따끔따끔한 걸 그냥 하나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디가 아프거나 춥다거나 덥다는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면 참거나 아니면 못 견디어 하는데,
이것들을 참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거부하는 것은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고 참는 것은 욕구를 누르는 것이니,
욕구를 따라가지도 말고 억누르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버려야 됩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깨어있으면, 즐거운 느낌마저도 나중에는 괴로움이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관심무상(觀心無常) : 마음이 시시때때로 변함을 관하는 것
셋째 관심무상, 마음을 관해보면 마음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있어 보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나는데 우리는 그 생각을 따라갑니다.
커피 생각했다하면 커피 집으로 가고, 그 커피 집에 앉았던 애인 생각하고, 그 애인하고 헤어졌던 생각하고,
헤어졌던 바닷가를 생각하고, 거기서 보트 타던 생각하고,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옮아갑니다.
생각이 옮겨가는 것을 따라서 그대로 말로 옮기면 옆에서 듣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미친 사람은 이렇게 자기 머릿속의 상을 따라가며 말을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그 상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미친 사람이 이 말했다 저 말했다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의 그 상을 짚을 수만 있으면, 그 사람하고 대화가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미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도 끊임없이 그렇게 상을 따라갑니다.
이렇게 법문을 듣고 있어도 법문에 집중할 때는 잠깐 뿐이고,
그 법문 중의 어떤 것에 연상되어 딴 생각으로 갔다가 왔다가, 또 다른 생각 좀 했다가 왔다가,
이러니까 끝나고 나면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뭘 들었는지 생각이 안납니다.
그러니 그걸 가만히 관찰을 해야 되는데, 관찰한다는 것은 그 생각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파도에 빠지는 게 아니라 바닷가 언덕 위에서 파도를 내려다보듯이,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겁니다.
남의 행동을 들여다보듯이 하면, 그 생각이라는 것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끌려들어가지 말고 망념을 그대로 관하면,
마치 뭉게구름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뀌는 것처럼, 찰나찰나로 모양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심무상입니다.
관법무아(觀法無我) : 아(我)라고 할 것이 없음을 관하는 것
다음에 관법무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똥이다 하지만, 개가 보면 밥이고 아픈 사람이 먹으면 약이고 농부가 보면 거름입니다.
무엇이 약이다 하지만 잘 관찰해보면 본래부터 약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습니다.
약이 이거 됐다 저거 됐다 하는 게 아니라, 본래 한 물건 거기에는 아라고 할 것이 없고,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도 불리고 저렇게도 불리고 하는 것입니다.
밭에 거름을 줄 때에도, 아무거나 뿌린다고 다 거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식물이 자라는 데는 여러 가지 원소가 필요한데, 그 땅에 부족한 원소가 그 땅에서는 거름이 되는 겁니다.
질소가 부족한 밭에는 질소가 거름이 되고, 인산·칼륨이 부족한 곳에는 인산·칼륨이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름이라고 하는 요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땅과의 인연에서 거름이다' 이 말입니다.
물이 없는 건조지형에는 아직까지 식물이 안 자랐기에 갖가지 원소들이 땅에 풍부하니까,
LA 같은 데서는 밭에 비료 같은 것 줄 필요가 없이 물만 주면 잘 자라니 여기서는 물이 거름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 밭은 워낙 많이 빼먹었으니 질소나 인산이나 카리 같은 비료를 줘야 됩니다.
요즘은 이런 비료를 아무리 줘도 안 자라니, 다른 흙을 집어넣거나 자연퇴비를 줘야 합니다.
‘비료보다 자연퇴비가 더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땅에 부족하거나 없는 다른 원소가 들어가야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보약도 이와 마찬가지로, 옛날의 보약이 지금도 보약일수가 없습니다.
옛날과 요즘 먹는 음식이 비슷하다면 옛날에 부족한 게 지금도 부족하니 옛날 보약이 지금도 보약이 되지만,
먹는 것, 즉 원소섭취가 달라졌다면 옛날 보약이 지금은 보약이 안 됩니다.
반대로 인스턴트 식품을 취하면서 부족한 원소가 있다면, 옛날엔 보약 안됐던 게 지금은 보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약이다, 거름이다, 보약이다 하는 것도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대로 관해보면 실체가 없다, 이게 관법무아입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는 문제가 있다, 우리 남편은 문제가 있다 이런 생각은 안해야 되겠지요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본래는 문제가 없는데 지금의 인연에 안 맞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인연을 바꿔주든지, 그 인연에 맞게끔 본인이 맞추는 어떤 이유를 설명해서 알아듣게 해주어야 됩니다.
총상염주(總想念住) : 한꺼번에 네 가지를 다 관하는 것
이렇게 하나하나 나눠서 이것을 관하는 것을 별상념주라고 하고
그걸 한꺼번에 다 관하는 것을 총상염주라고 말합니다.
견도(見道) : 사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면, 무엇을 접하거나 생각을 할 때, 쥐약은 쥐약인 줄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의 성격 등으로 볼 때 결혼을 하면 무슨 일들이 생기겠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떤 고통이 오겠다는 것을 아는 것,
즉 사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 생기는 것을 견도라고 하는데,
성인의 지위에 이르려면 첫 번째 견도가 열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여 자기에 대한 집착, 재물이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면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볼 때 그것들이 자기의 관념으로 인해서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파악이 되고
있는 그대로 파악이 되니까 이런 인연으로 하면 이런 결과가 날것이라 예측이 되는 겁니다.
이걸 아는 것을 견도라 하고, 선으로 비교하면 초견성을 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수행을 한다면 최소한 견도가 열릴 때까지는 해야 됩니다.
예류(豫流), 수다원 : 성인의 류(流)에 합류했다
이렇게 견도가 열렸다 하면 성인의 류에 합류했다 해서 예류(수다원)라 말합니다.
쥐가 쥐약인 줄 알기는 알았는데, 쥐약이니 먹으면 죽는 줄은 알았는데,
안 먹어야 되는데 하도 배가 고프니 알고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알기는 알았는데, 의식은 잘못인 줄 알아도 그렇게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 화가 일어날 그런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도 자기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낼 수가 있는 데,
화를 내더라도 이것은 내가 어리석어서 내는 것이라고,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수준이 견도입니다.
수도(修道) :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닦아 나가는 것
이 견도가 열린 다음에는 수도, 즉 마음과 행실을 닦아야 됩니다.
바르게 알기는 알았지만 실천을 해 나가면서 잘못을 범할 수가 있고,
잘못한 줄 알면서도 또 잘못할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잘못한 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들지는 않습니다.
한 번 여기까지만 올라서면 뒤로 물러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성인의 류에 들었다해서, 예류, 수다원, 이렇게 말합니다.
일래(一來), 사다함 : 한 번만 더 윤회한다.
그리고 나서 수행을 자꾸 해 나가면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횟수가 점점 적어집니다.
그렇게 하여 한 번 더 잘못하고는 그 다음부터 다시는 안하는 정도까지 가는 것을 일래, 사다함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 한 번 더 윤회해서 온다’ 는 말인데, 그런 실수를 한 번 더 저지르고 그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환(不還), 아나함 : 윤회의 세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거기서 더 닦아 나가면, 지금 내가 경험한 이것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 실수를 했지만, 실수를 했다는 걸 알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윤회의 세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을 불환, 아나함이라 합니다.
아라한 : 지금부터 바로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무학도(無學道) : 더 이상 배울 것, 닦을 것이 없다
거기서 더 닦아나가면 이제는 모든 어리석음이 사라져서 지금 이 순간부터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한 번 하고 다시는 안하는 게 아니고 지금부터 바로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과제에 부딪히면 바로 해결해 버리는 것을 아라한이라 합니다.
이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거기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닦을 것이 없다 해서 무학도라 합니다.
성인의 수행법 : 견도, 수도, 무학도
견도(見道) : 예류향(수다원향)
수도(修道) : 예류과(수다원과), 일래향, 일래과, 불환향, 불환과, 아라한향
무학도(無學道) : 아라한과
다시 말하면 성인이 닦는 수행법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견도, 두 번째가 수도, 세 번째가 무학도입니다.
이것을 성문 사향사과와 견주어 말한다면, 견도를 이루면 수다원향에 이르게 되고,
수다원향에서 수다원과로 나아가는 것부터 아라한향에 도달할 때까지가 수도가 되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무학도가 됩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가는 게 소승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소승불교 나쁜 줄 알았더니 공부해보니 굉장히 좋지 않습니까?
북방불교 사람들이 자기들은 대승이니 단번에 깨닫는다고 큰소리 빵빵 치지만,
스님들끼리 몽둥이 들고 싸우고, 술을 먹고, 결혼까지도 하니,
남방불교 사람들은 ‘대승은 무슨 수행을 어떻게 하기에 저렇게 되나?’ 라고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우리가 테라밧다다, 우리가 근본이다’ 하는 자긍심을 더 갖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더 착실히 수행을 해 나가는 소승불교인들을 얕보면 안됩니다.
대승불교가 소승보다 더 크고 포용력 있고 탁 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제대로 공부를 안하고 생활도 그렇게 안하면, 이름만 불자이지 진짜 대승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이란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고, 공부하면 할수록 재미나고 좋은 것이기에,
예전엔 왕위도 버리고서 출가하고, 전 재산을 보시하고 불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도깨비같은 세상이기에 그런 사람은 없지만, 여러분들은 늘 공부하고 닦아나가야 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현인이 되기까지만 해도 너무 힘이 드니, 더이상은 몰라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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